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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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정지해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시기도 사실은 도전 의식을 북돋우며 미래에 필요한 전술을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시기인지도 모른다(P45).


다른 어떤 문장보다 나는 책에서 이 문장이 가장 좋았는데 이것이 그동안 여성들이 걸어온 길과 여성 운동의 역사를 말해주는 동시에 현재와 미래를 긍정 또는 부정으로 속단하거나 예단하지 않기 때문이라 여겨서다. 


이 책은 1950년대부터 202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배경으로 페미니스트들이 걸어온 길을 조망한다. 그러나 이 책은 페미니즘의 쇠퇴와 몰락을 다룬 역사가 아니며, 그런 일과 관련된 페미니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역사도 아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목격중인 부활에 관해 희망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 이 책은 수 세대에 걸쳐 여성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문화적 변혁의 비전을 형성하기 위해 자기 삶의 수수께끼를 타진해왔는지 따져보는 이야기다(P43). 


미국 페미니즘의 역사는 그동안 다른 책들을 통해서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페미니즘 작가나 사상가들의 작품은 생소해도 이제 대부분의 작가들의 이름은 낯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냉전의 시작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특히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해 페미니스트들도 반전 운동에 뛰어들었다. 


‘평온한’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성별 분화라는 이데올로기가 W.H.오든이 1947년에 (개인적인 불안감과 공적인 불안감을 뜻하여) “불안의 시대”라고 명명했던 때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개인적인 불안감과 겹쳐진 공적인 불안감은 의심의 여지 없이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버섯구름에 집중되어 있었다. - P62


“그와 그녀의 시간”이라는 어구는 양성의 별개 영역, 즉 생계 책임자와 가정주부라는 별개 영역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회색 모직 양복을 입은 남편”이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귀가하면, 길고 폭넓은 치마와 장식이 달린 1950년대식 뉴룩 스웨터를 입은 교외 지역 내조자가 깔끔하고 깨끗한 베티 크로커/베티 퍼니스사의 가구가 구비된 부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P59


언급된 페미니스트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실비아 플라스였다. 그녀가 토해낸 ‘아빠’라는 단어는 어떤 여성도 쉬이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이 아닐까 생각했다(아빠에게서 시작하여 남편에 이르기까지). 위압적인 “아빠”와 흡혈귀 같은 존재이자 아빠의 복제물인 남편 모두에 대해 다시 상상한다(P122).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을 추었고 당신을 짓밟았어요.

그들은 그게 당신이라는 걸 내내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나쁜 인간, 이제야 끝이 났네요. - P122


또 베트남 전쟁과 그것에 철저히 개입한 미국에 대해 언급한 수전 손택을 빼놓을 수 없다. 

손택은 역사학자 시어도어 로자크가 대항문화라고 불렀던 문화 운동의 진정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1966년에 발표한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는 “캘리포니아의 새로운 아빠가 된 로널드 레이건과 백악관에서 돼지갈비를 씹고 있는 존 웨인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더욱 괘씸한 글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결함을 나열하면서 (“근대의 제도 중 가장 잔혹한 노예제도”, “토착 문화가 그저 적일 뿐인 나라”, “자연 역시 적으로 삼는 나라”) 그녀는 미국이 악명 높게도 “백인종” 문화를 신성시하는 곳이라고 언명했고, “백인종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암덩어리이며, (…) 그들이 퍼져나가는 곳마다 자율 문명을 박멸하고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뒤집었다”고 결론지었다. - P167~168


1970년대 페미니즘이 절정에 이르면 운동 주체들의 여러 가지 차이(표면적인 리더들과 추종자로 추정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 급진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차이, 레즈비언과 이성애자 사이의 차이, 유색인종 여성과 백인 여성 사이의 차이)가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한 담론들을 다양한 형태의 굴종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만들어냈다. - P199


1980년대로 들어오면 페미니스트들은 정체성 정치(인종적, 민종적, 언어적, 영적 기원의 탐색에 전념하는 여성들의 연대를 고취)와 후기구조주의(남성성과 여성성에서 나아가 이성애와 동성애에 관한 인습적 사고에 대한 해체)를 들고 나온다. 이 두 그룹은 앞선 1970년대 활동가들이 유색인종 여성의 현실을 보지 못했다고 하거나 젠더의 사회적 형성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들을 맹비난했다(P341).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된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했는데 맥신 홍 킹스턴과 글로리아 안살두아가 그렇다. 


그 중 맥신 홍 킹스턴은 특히나 눈에 띄었는데 이는 얼마 전 원서 읽기에서 중국계 이민자 소녀 가족의 이야기를 만나서 그런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1976년 ‘정체성 정치’ 개념이 부상할 즈음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 텍스트를 발표했다. 소설집 ‘여전사: 귀신들 사이에서 보낸 소녀 시절 회고담’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여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한 1970년대 담론들에 더해, 여성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특징짓는 다른 많은 차이들(지리적 차이, 언어적 차이, 요리법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추가시켰다(P319). 

‘여전사’는 어머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며 나아가 일반적인 여성 명사의 대표로 쓰이는 존재가 아닐까. ‘귀신’은 중국계 이민자로서 경험한 미국인/백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1980-1990년대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지금 읽어도 여전히 유효하게 읽을 수 있는 읽을 거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후에 인종 문제를 노예 제도에 빗대 다룬 토니 모리슨의 ‘빌러버드’란 작품도 있다. 


‘글로리아 안살두아’는 남부 텍사스에서 멕시코계 미국 여성으로 성장한 과정을 민족정체성 정치와 초국경적 사안에 관한 페미니즘적 사고에 영감을 불어넣으며 이민 정책의 역사를 조명했다. 

“젠더만이 유일한 억압은 아니다”라고 선언한 그녀의 말에 나도 동감하는 바이다. 그는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문화와 멕시코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멕시코계 미국/멕시코 문화와 흑인 문화, 북미 토착 미국인 문화, 앵글로색슨계 미국인 문화, 그리고 다른 나라 문화와의 소통을 증진하기 위하여 역사, 자서전, 신화를 이용했다. 그녀는 “메스티사 의식”이라는 역설적 사고에 대한 인식을 논했다. 메스티사 의식은 다층적 정체성을 지니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국경선 경계 지대의 거주민들이 물려받은 상충하는 충성심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 P351

국경이라는 단어는 인위적인 것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한쪽으로 정해지는 것을 강요받기 쉽다. 장르는 SF로 다르지만 멕시코계 인물들이 나오’고 그들의 언어가 나오기도 하는 ‘Last Cuentista’의 배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21세기는 9.11테러에 이어 이라크 전쟁 발발로 1950년대가 회귀하는 듯한 흐름으로 시작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민주주의는 후퇴하는 듯 보였으나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질 바이든이 있었고 카멀라 해리스가 부통령이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경 삼아 국회를 장악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여성들은 이런 사회적 흐름에 맞서 꾸준히 투쟁 중이다. 비록 인종주의자들이나 남성우월주의자들에 의한 백래시를 겪기도 하지만 N.K.재미신이 ‘부서진 대지’ 3부작을 통해 지구온난화보다 더 나쁜 기후변화를 겪으며 파괴되는 지구를 묘사하는 것처럼 발전된 문명에 대한 의문(페미니즘의 확장)을 품으며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있다.


이틀 만에 완독했는데 재밌었고 잘 읽혔다. 비록 미국의 페미니즘 역사이지만 멀지 않은 과거의 현실이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역사라서 더 눈에 잘 들어왔던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의 작품은 한 번쯤 읽어보겠다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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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2-25 15: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빨리 읽으셨네요! 전 일주일에 한 장씩 읽었는데.. 화가님 완독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3-12-25 15:12   좋아요 3 | URL
수하님^^ 생각보다 잘 읽혀서 쑥쑥 읽었습니다. 찾아보면서 읽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ㅎㅎ) 아주 훌륭한 페미니즘 역사서였네요! 수하님도 완독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3-12-25 2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
전 지금 글로리아 스타이넘 부분 읽고 있는데 넘 흥미롭네요.

거리의화가 2023-12-26 09:1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남은 분량도 즐겁게 읽어나가실 수 있을거예요^^ 응원합니다!

독서괭 2023-12-26 14: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축하드려요! 전 4장까지 읽었어요. 저자가 백인 페미니스트 뿐 아니라 흑인 페미니스트 이야기도 고루 하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중국계, 멕시코계도 나오는군요! 끝까지 열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2-26 17:26   좋아요 1 | URL
저도 다양하게 다루고 있어서 더 좋더라구요. 뒷부분도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