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언어 가운데 사분의 일에는 젠더와 젠더 고정관념이 문법 체계 속에 녹아 있다. 영어는 아니지만, 프랑스어, 스페인어와 같은 언어들은 모든 명사를 남성 혹은 여성형으로 분류하고, 이 분류는 접두사, 접미사에 영향을 준다. ('중성' 명사가 있는 언어도 있다.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성적이냐 비이성적이냐, 생물이냐 무생물이냐 등 스무 개도 넘는 범주를 가진 언어들도 있다.) 


언어학자인 수잰 로메인은 모든 언어에는 문법적 젠더와 실제 삶에서의 인간 젠더를 인식하는 방식 사이에 부인할 수 없는 '누수'가 발생한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요점은 남성과 여성을 분류하는 언어(스페인어부터 산스크리트어까지)에서 단어에 담긴 젠더가 이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화자의 인식에 조금씩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이다. - P170~171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독일어였다. 지금은 문법이고 뭐고 다 잊어버려서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남성,여성형이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난다. 세계의 언어 중 1/4이나 문법에 젠더 관념이 포함된다니 생각보다 너무 많은 듯해서 놀랐다. 


왜 어떤 언어들은 문법적 젠더를 갖게 됐을까? 영어 단어인 '젠더'는 라틴어 '제누스genus'에서 왔다. 이 단어는 '종류'나 '유형'을 말하던 단어로, 원래 사람에게는 전혀 쓰이지 않았다. 고대 영어에서는 명사를 남성, 여성, 중성으로 나누었다. 이 체계는 오늘날의 러시아어, 그리스어, 독일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족 언어에 여전히 남아 있다.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이 영어권에 고대 노르만 불어를 유입시키면서, 3젠더 체계는 사망하게 된다. 젠더를 표기하는 접미사도 그때 거의 사라진다. '젠더'가 사람을 묘사하는 데로 뻗어 나가게 된 건 몇백 년 전이다. 모든 단어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너무 복잡하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의 자연적 젠더 시스템도 이게 없는 언어가 보기엔 마찬가지로 복잡하다. 헝가리어, 핀란드어, 한국어, 스와힐리어, 터키어는 젠더화된 대명사가 없는 몇 안 되는 언어이다. 이런 언어들은 맥락을 통해서 대상을 알아낸다. 어떤 언어는 젠더 중립적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북미의 토착 알곤킨어에는 젠더를 지칭하지 않는 삼인칭대명사가 두 개 있다. 이는 어떤 사람이 대화의 중심에 와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고 대명사는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문법적 젠더를 가진 언어에서, 여성과 남성에 대한 말은 '규범 문법'을 가지고는 '문법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서는 선망받는 직업 대다수가 남성이다. 경찰, 의사, 교수, 엔지니어, 정치학자, 변호사, 외과의사 등 수많은 직업이 남성 성별이다(간호사, 돌봄노동 종사자, 하인에 대한 단어는 모두 여성). 따라서 '그 의사가 용감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의사가 여성이라면 운이 없는 상황에 처하는 셈이다. 


현실에서 여성을 자연, 영토, 기술에 비유하는 행위는 여성이라는 성별을 '타자'라는 범주로 묶는다. 로메인에 따르면, 바다와 해양과 같은 자연에 여성을 비유하는 행위는 "여성은 자연과 문명 간의 갈등,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끌어당기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정복해야 하는 무언가"라는 뜻을 지닌다. 여성은 식민화해야 하는 대륙이고 포위해야 하는 성채이다. - P181


문법을 지적하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든 간에, 발화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교정하거나 멈추고자 하는 깊은 열망이 있다는 것이다. 언어가 변화하면 삶에서 어떤 것이 변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귀찮아진다. 언어의 변화는 더 큰 사회적 변화의 신호이기 때문에 이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 P196


사람들은 규범 문법-국어 선생님이 배우라고 하는 그것-이 막강하고, 영원히 작용하는, 그러니까 중력이나 해와 같이 변치 않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문법이 인간의 발명품이며,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진화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 P167~168


누군가 하는 말의 도덕적 중요성은 내용에 있지 문법에 있지는 않다. - P194


저자의 말에 공감가는 부분이 위 두 문장(문단)들이었다. 

언어는 생각보다 빠르게 변화한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몇 십년전에 유행했던 문장들이 지금은 전혀 쓰이지 않기도 하고 어떤 문법은 사장되기도 했다. 언어에 포함된 젠더 표현들도 이렇게 바꾸어갈 수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와 분리되어 살 수 없다. 내가 프랑스에 태어났다면 프랑스어를 해야 하고 독일에 태어났다면 독일어를 해야 한다. 결국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담기는 것이 언어라면 문법보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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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9-14 17: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등학교시절 제2외국어가 일어였거든요. 여동생은 불어였는데, 여성 명사 남성 명사 구분이 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나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사람들은 그러면 그걸 다 외우고 다니는거야?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 태국에 여행갈 때 간단한 인삿말이라도 외우고 가려고 검색했는데, 거기는 화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따라서 말이 달라지더라고요. 도대체 그게 달라야 하는 이유가 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저는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해야 하는 인사를 외워서 갔습니다.

컵쿤카. 사와디카.

왜 인사를 하는데 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따라 달라져야 할까요?

거리의화가 2023-09-14 17:47   좋아요 1 | URL
저도 젠더 구분을 하는 언어는 왜 그런가 궁금했는데 위에 적혀 있듯 고대 영어에서는 남성, 여성, 중성이 모두 있었다고, 그 흔적이 남은 언어들이 있는 거더라구요. 한국어가 젠더구분까지 해야 하는 언어였으면 무척 버거웠겠죠? 생각보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어렵다고ㅎㅎㅎ 이건 반대말과 존대말 탓도 있는 것 같지만요^^

책읽는나무 2023-09-14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독일어가 아닌 일본어 수업을 받긴 했었어서 독일어를 잘 모릅니다만...독일어에 남성형, 여성형 명사를 따로 외워야 한다는 것이 있는 걸 보구선 왜 굳이 이렇게 분류해 놓았을까? 그게 참 궁금했었고 좀 짜증이 났었어요. 안그래도 암기가 힘든데 성의 분류까지 들어가니 암기하기 정말 힘들겠구나! 싶더군요. 저런 암기들은 넘 싫어하는지라...ㅜㅜ

거리의화가 2023-09-14 17:49   좋아요 2 | URL
나무님도 일어 수업을 받으셨군요ㅎㅎ 저도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알려줘서 해결이 되었네요. 암기도 암기인데 문제는 직업적 구분에서 애매해지는 듯 해요. 저자가 예를 들기도 했는데 남성 명사인 직업을 여성이 하게 된 경우 관련 언어를 쓸 때 좀 이상해져버리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결국 젠더 문법을 당장 바꾸지 못한다면 그 내용에 중점을 두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9-16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 여성과 남성 성을 다르게 쓰는 게 생각나네요 그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지금 생각하니 러시아만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문법보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16 21:30   좋아요 0 | URL
인도 유럽어과에 속하는 언어들 중 성을 구별해서 쓰는 언어들이 많다고 합니다^^; 독일어도 그 중 하나인데 전 세계의 1/4 정도가 이렇게 구분되어 있는 언어라는게 놀라웠습니다.
결국은 내용이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