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명계 >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 집의 부엌은 뜨스할 것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초롱이 희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가며
별 사이에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행길에는 선장 대어가는 장꾼들의 종이 등에 나귀 눈이 빛났다
어데서 서러웁게 목탁을 뚜드리는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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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삶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목탁을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 있다.

20년도 전 종로의 피맛골을 자주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때만 해도 개발이 되기 전이라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국밥집이며 술집이며 그런 것들이 수두룩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는 호기심이 많았거나 열정이 넘쳤는지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밤을 새면서 술을 먹고 이른 아침 전철을 타고 다시 귀가를 하곤 했다. 취기가 가득한 상태에서 걷고 있을 때 새벽녘 거리의 모습은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한편으로는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멍한 표정의 공허한 사람들 등 참 다양했다. 솔직히 취한 상태라 별 생각이 없이 걸었을 텐데도 희한하게 그 시절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그 전의 피맛골에서 사람들과 정겹게 술잔을 기울이던 기억도 있고.
이 시를 읽으면서 비슷한 시간이라도 누군가는 삶을 준비하고 다른 누군가는 삶을 마감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 광원 >

흙꽃 이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가정거장도 없는 벌판에서
차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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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와 쓸쓸함이 느껴진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2000년대 초반 MBC 베스트극장에서 방영을 해준 적이 있다. 시에서는 두 명의 여성이 정거장에 내렸다는 표현만 있는데 오래전 이 작품이 떠올랐다. 도중에 내린 남녀. 곰스크행 기차가 언제 올 지 모르지만 남자는 끊임없이 기차를 기다리고 여자는 이 생활도 만족하여 굳이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 남행시초 4: 삼천포 >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러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두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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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농촌의 정경.

봄이 다가올 무렵 볏짚을 쌓아둔 마당에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데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다가 말다툼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실제로는 가난했을 사람들이지만 마지막에 '가난'이라는 글자를 넣으면서도 '따사로이 가난'이라고 표현해서 우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 좋았다.


< 북관 >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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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함흥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지은 시라고 한다.
그의 화려한 외모와 이력과 시의 표현이나 내용이 달라서 놀랄 때가 많은데 특히 이 시가 그렇다.

토속 음식을 느끼고 시큼하고 퀴퀴한 내음새 속에서 그 옛 시절 여진인들과 신라인의 향수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진인들은 실제로 함경도 지역에서 많이 살았고 신라인은 전성기 때 함경남도 지방까지 올라온 적이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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