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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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세계에서 느끼고 다른 세계에서는 생각하고 명명하며, 그리하여 이 두 세계 사이에 어떤 일치점을 설정할 수 있지만, 그 간격을 메울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넘어서야 했던 거리감이자 균열이었다(P83).

3부(5, 6권)의 공간적 배경은 '게르망트'다. 2부가 사교계 모임과 공연장에서 주로 이루어졌다면 3부는 귀족 사회 내부를 훑는다.

2부에서 연극을 보러 간 화자가 라 베르마를 보고 실망했다고 했다. 그 이후 주인공은 계속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가「페드르」1막 출연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아버지를 설득) 그녀를 보러 가게 된다.
한 번 실망했던 사람에게 다시 애정을 가지기는 어려운 걸까. 나는 그녀의 연기를 보며 연극적 이미지로 애써 보려고 노력한다.「페드르」와 ‘고백 장면’과 라 베르마는 당시 내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실존을 의미했다.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로부터 물러난 그 실존은 그 자체로 존재하여 내가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무리 내 눈과 영혼을 크게 뜨고 깊숙이 그 안으로 꿰뚫고 들어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적은 것밖에 흡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삶은 얼마나 상쾌해 보였던가! 옷을 입거나 외출 준비를 하는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보내는 삶의 무의미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너머에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선하고 접근하기 힘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게 불가능한 보다 견고한 현실인「페드르」와 ‘라 베르마가 말하는 방식‘이 있었으니까(P75). 나는 그녀에게 충분히 만족했다. "나는 정말 라 베르마가 첫 번째라고 생각해." 하지만 어렴풋이 내 선호도에 대한 주장과 내가 그녀에게 붙인 이 '첫 번째'라는 등수가 라 베르마의 재능을 정확히 표현해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86)

나는 게르망트 부인이 사는 파리 게르망트 저택의 별채로 이사한다. 아침마다 거리에서 부인을 엿보며 오페라좌에서 그녀를 만나곤 사랑에 빠진다. 낯선 상냥함과 더불어, 하얀 모슬린 옷에 감싸인 공작 부인이 들어왔다. 나는 신비로움을 느꼈지만, 그 빛나는 푸른 광채에서 그녀가 친구들에게 손을 맡기며 건네는 웃음 띤 눈길의 비밀은 해독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프리즘을 분해하고 그 결정체를 분석할 수 있다면, 그 순간 거기 나타났던 미지의 삶의 본질을 포착했을지도 모른다(P87).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처럼 내 마음속에 몇 시간 떠돌다가, 그 이미지가 나타나기 전에 품었던 낭만적인 관념과 더불어 점차 하나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연상 작용으로(어떤 다른 여성적 이미지와도 완연히 구별되는) 발전했으며, 따라서 추억이 가장 잘 떠오르는 바로 이런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 추억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추억이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P98).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조카이자 친구이기도 한 생루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가 일하는 곳(군대)으로 찾아간다.

나는 생루의 친구들이 저녁 식사 중에 펼치는 전술론에 흥미를 느끼면서 자주 연대 훈련장을 찾아 연대 행렬을 구경한다. 그리고 친구는 얼마 전 전화기가 이곳에 설치되었다며 파리에 있는 할머니와 통화를 해보라 이야기한다. 호텔의 직원이 나를 불러 우체국으로 전화를 받으러 오라고 한다(이렇게 어렵게 통화를 해야 하다니).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알던 할머니가 아니다 생각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틀 안에서만, 끊임없는 우리 애정의 지속적인 움직임 안에서만 본다(P226). 이미 오래전 거울에서 얼굴을 바라보지 않게 되어 그가 결코 보지 않는 얼굴을, 매 순간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이상적인 얼굴상에 따라 만들어 내는 병자가, 거울에서 메마르고 황폐한 얼굴 한가운데서 이집트 피라미드마냥 거대한 분홍빛 코가 비스듬하게 치솟은 모습을 보면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할머니가 여전히 나 자신이며 언제나 내 영혼 속, 늘 과거 같은 지점에서 겹쳐지는 인접한 추억의 투명함을 통해서만 할머니를 보아 왔던 나는, 이제 갑자기 우리 집 거실에서 새로운 세계, '시간'의 세계, "그 사람 잘 늙었네."라고 말하는 낯선 이들이 사는 세계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난생처음으로,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에 거기 등잔불 아래 긴 의자에 앉은 붉고 무겁고 천박하고 병든 여자가, 내가 모르는 쪼그라든 늙은 여자가 꿈꾸듯 멍한 시선을 책 위로 이리저리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P227).
할머니와의 통화에서 나는 갑작스러운 낯섬을 느낀다. 늙어감은 당연한 것이며 자신조차도 인정하기 힘든 것인데 하물며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가 자신을 그렇게 느낀다면 꽤나 충격이지 않을까 생각했다(할머니 입장에서). 그리고 몇 년전 내가 부모님의 얼굴에서 마주했던 낯섬의 감정이 느껴졌다. 생각하면 나도 늙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부모님은 똑같을 거라고 단정하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렇게 할머니가 그리웠던 화자는 파리로 서둘러 돌아온다.

얼마 후 나는 휴가를 나온 생루와 그의 애인 라셸을 만난다. 그녀는 단역 배우이기도 하지만 사창가의 매춘부로 일한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 여인을 처음 알게 되는 경우, 나는 인간의 상상력이 그 여인과 같은 작은 얼굴 조각 뒤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 또 반대로 수많은 몽상의 대상이던 사람도 그 몽상과 상반된 방식으로 가장 하찮은 사실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에는 얼마나 초라하고 온갖 가치가 제거된 물질적 요소로 분해되는지도 알게 되었다(P255). 나는 라셸이 싫지 않았다. 생루는 그녀의 행동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사랑한다.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온갖 쾌락을 그는 유명한 이름이나 잘생긴 외모 덕분에 사교계에서 쉽게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으며, 이와 반대로 라셸과의 관계는 오히려 그를 사교계와 단절시켜 인기 없는 남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 만큼 그는 충분히 명석한 사람이었다. 아니, 연인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명백한 징표를 무상으로 받은 것처럼 보이려는 이 자존심은 단순한 사랑의 여파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욕망일 뿐이다(P261~262).

나는 빌파리지 부인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여러 귀족들을 만난다. 빌파리지 부인의 살롱은 삼류였다는 평을 받지만 정작 당사자는 무척 괴로워했다. 지금은 저명한 사람들과 친교를 쌓기 원하는 이들이라면 빌파리지 저택을 누구나 찾는다.
모임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드레퓌스 사건이 주요 토론 소재인데 1894년에 시작되어 1906년까지 이어진 사건이다. 우리에게는 '드레퓌스 사건'이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한 사건에 불과할 지 모르는데 프루스트는 이 사건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비단 프루스트 뿐 아니라 유럽 내에서는 손에 꼽힐만큼 중요한 사건이기도 할 것인데 아무튼 거의 5권 내내 드레퓌스 사건의 비중이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몇 사람들만 보이면 드레퓌스 지지파 vs 드레퓌스 반지지파 로 갈려 열띤 토론을 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통 사람은 환자의 병이 엑스레이 사진에 전부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사진은 단지 판독에 필요한 하나의 요소만을 제공할 뿐 다른 많은 요소들이 더해져서 의사가 그 모든 걸 가지고 추론하며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진실이란, 진실을 아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그 진실을 포착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빠져나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드레퓌스 사건에 국한하여 말해 본다면, 앙리의 자백과 이어 그의 자살과 같은 명백한 사실이 일어났을 때도, 이 사건은 드레퓌스파 장관들과, 스스로가 문서 위조를 발견하고 심문을 주관한 카베나크와 키네 사이에서는 정반대로 설명되었다(P399).

드레퓌스 사건에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도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마니아인이나 이집트인과 터키인은 유대인을 싫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살롱에서 이들 민족 사이의 차이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한 이스라엘인이 마치 사막 한구석에서 나온 듯 몸을 하이에나처럼 구부리고 고개를 기울이고 커다랗게 "살람!"이라고 인사하며 살롱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취향은 완벽하게 충족될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사교계'에 속해서는 안 되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대인의 얼굴이 쉽게 영국 귀족의 얼굴로 보이고, 그 행동 방식도 지나치게 프랑스화되어, 한련화마냥 제멋대로 난 코가 엉뚱한 방향으로 뻗으면서 솔로몬 왕의 코보다는 차라리 마스카리유의 코를 연상시킬지 모른다(P305). 어쨌든 종족의 항구성을 말한다는 자체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등 모든 민족들로부터 받는 인상을 - 그들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편이 훨씬 나은 일인데도 - 부정확하게 만든다. (...)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아 왔던 이미지는 피상적인 것이었다(P307).
"이 사건은 유대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제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해.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유대인이 한 명도 없다는 타당한 이유 때문인데, 저는 늘 이런 다행스러운 무지 상태로 남아 있을 작정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이 보수적이라고 해서, 유대인 상점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단지 그들 양산에 '유대인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썼다고 해서 만나기를 강요한다면 정말 전 참을 수 없을 거예요."(P391).
그들은 귀족이며 계급적으로는 자신들만을 그룹화시키며 마치 '너희들은 끼어들 수 없어' 라 규정짓는 듯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야말로 저열하고 유치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샤를뤼스와의 선약이 있었던 나는 모임하던 도중 나가고 샤를뤼스와의 산책 중 화자는 불편한(!) 제안을 받는다. 샤를뤼스씨는 내게 사교계에 나가지 말 것. 남자 친구를 선택하는 일에 신중할 것. 자신을 매일 만나야 하는 것을 주문한다. "어쨌든 내가 자네에게 제공하는 걸 상기해 보게나. 자네는 헤라클레스처럼, 불행하게도 그렇게 힘센 근육은 없는 듯 보이네만 두 갈림길에 서 있네. 미덕으로 인도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아서 평생토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P493). 마치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튼 그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왔더니 할머니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바깥 공기를 쐬라는 의사의 당부에 함께 밖을 나섰는데 할머니가 쓰러지고 만다. 나는 지금까지 아무리 큰 고통에도 도피처가 있으며, 모든 걸 실패할 때도 항상 휴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은 뜻하지 않은 사태를 불러왔다(P145).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삶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려고 노력하지만,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인간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현재 우리 모습을 그림처럼 복사하면서 그 형태를 부여한다(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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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5-23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혼자서 잃.시.찾 꾸준히 읽어나가시고
거기다 토지까지~~
정말 진정한 독서가이십니다^^

거리의화가 2023-05-23 14:20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 잃시찾은 줄거리만 겨우 이해하는 상태로 읽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안에 숨은 의미들이 많을텐데 그런 것들은 역시 한 번에 이해는 어려운 듯하네요^^
시리즈를 병행하여 읽으려니 힘들긴 합니다. 다음에는 이런 무모한 도전은 안하려고 생각중입니다ㅋㅋ 읽더라도 한 해에 시리즈 하나만 시도하는 걸로 해야겠어요^^;

새파랑 2023-05-23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리뷰를 보니까 조금씩 기억이 나는거 같습니다 ㅋ 화가님 독서 천재이신듯 ^^

거리의화가 2023-05-23 15:57   좋아요 1 | URL
다른 분들 리뷰 보면서 책의 내용을 회상하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이제 살면서 칭찬받을 일이 딱히 없는데 이곳에서만큼은 많이 받는 듯하여 감사할 따름입니다^^ 천재는 새파랑님이시죠! 저는 노력형입니다^^

희선 2023-05-24 0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보다 할머니는 더 나이가 많을 텐데, 그대로일 거다 생각한 건지... 자신이 나이 들어가는 것처럼 부모 할머니도 나이를 들어가죠 그런 거 잘 생각하지 못하기도 하겠습니다 어느 날 깨달을지도... 그때 귀족 사회를 볼 수도 있겠군요 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유대인 차별이 있었다고 한 것 같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5-24 08:58   좋아요 1 | URL
화자는 외면과 내면의 불일치와 균열에 계속 주목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보이는 것은 외면 뿐이지 내면은 아니잖아요. 오래도록 보아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상대방이 나를 속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일부만 내보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화자가 안 그래도 감정이 섬세한 쪽인데 이런 균열감이 실망감으로 크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늙죠. 내가 잘 알고 있고 아끼는 사람이 어느 순간 외모가 변해있을 때 충격이 되기도 하잖아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통해 나이든 할머니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왠지 다음 권에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듯하네요;;;
유대인 차별이나 비하는 오래된 일이죠. 이런 안 좋은 전통(?)은 고수할 필요가 없는데 뿌리박혀 있다보니 한참을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