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將軍紀信 言於漢王曰 事急矣 臣請誑楚 王可以間出 於是陳平 夜出女子東門二千餘人 楚因擊之 紀信乃乘王車黃屋左纛 曰 食盡 漢王降楚 楚皆呼萬歲 之城東觀 以故 漢王得與數十騎 出西門遁去〈出漢書本紀〉

○ 漢王 出滎陽 至成皐 入關收兵 欲復東 轅生 說漢王 深壁勿戰 令滎陽, 成臯間 且得休息 漢王從其計 出軍宛, 葉間 與黥布 行收兵 羽聞漢王在宛 果引兵來 漢王堅壁不與戰〈出漢書本紀〉

○ 彭越爲漢將 游兵擊楚 羽乃使終公守成皐 而自東擊彭越 漢王破終公 復軍成皐 羽已破走彭越 乃引兵西 拔滎陽城 遂圍成皐 漢王逃 獨與滕公共車 出成皐玉門〈出史記項羽紀〉

○ 北渡河 宿小脩武傳舍 晨自稱漢使 馳入趙壁 張耳, 韓信未起 卽其臥內 奪其印符 以麾召諸將易置之 信, 耳起 乃知漢王來大驚 漢王旣奪兩人軍 卽令張耳循行 備守趙地 拜韓信爲相國 收趙兵未發者擊齊〈出史記韓信傳〉

○ 諸將稍稍得出成皐 從漢王 楚遂拔成皐欲西 漢使兵距之鞏 令其不得西 〈史記羽紀〉

○ 漢王欲捐成臯以東 屯鞏, 洛 以拒楚 酈生曰 知天之天者 王事可成 王者 以民爲天 民以食爲天 夫敖倉天下轉輸久矣 藏粟甚多 楚人拔滎陽 不堅守敖倉 乃引而東 此天所以資漢也 願足下急進兵 收取滎陽 據敖倉之粟 塞成臯之險 杜太行之路 距蜚狐之口 守白馬之津 以示諸侯形制之勢 則天下知所歸矣 王從之 乃復謀取敖倉〈出漢書本傳〉

형양에서 붙잡힌 한왕은 장군 기신의 계책에 따라 진평과 갑옷을 입은 여자 2천을 밤에 함께 동문으로 내보낸 상태에서 초나라가 이를 공격하는 사이 서문으로 몰래 빠져나온다.
성고로 간 한왕이 팽월 장군으로 하여금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항우에게 오히려 성고성을 함락당하고 포위당하였다. 한왕이 겨우 하후영과 함께 조나라로 가서 한나라 사신인 척 하고 간다. 새벽녘이어서 장이와 한신은 자고 있는 상태였고 이때를 틈타 도장과 병부를 탈취하여 두 장수 휘하에 있는 군대를 부릴 수 있게 되었고 이들로 하여금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한왕이 성고 동쪽 땅을 떼어주면서 초나라를 막고자 하니 역생이 북쪽의 곡식창고를 점거하고 요새를 막는다면 초나라를 제압할 수 있을 거란 제안을 하니 한왕이 이를 따른다.


진짜 한왕은 항우를 무력으로는 이기지를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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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3-03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이 한왕이 패왕에게 마지막으로
당한 패배였나요? 아니면 치욕이 더
남아 있던가요.

역발산기개세의 패왕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한왕을 쓸어 버리지 못한
것도 참, 피할 수 없었던 숙명인가
봅니다.

거리의화가 2023-03-04 10:39   좋아요 1 | URL
기신이 한왕 대신 죽을 자리를 자처하고 주가와 종공이 순절한 이후 역이기가 죽고 나서부터는 이후 항우가 계속 고전하죠. 광무산 대전, 홍구 회담, 구리산 전투 등 핵심 전투들이 이제 남아 있습니다. 패왕의 무력은 정말 압도적이었는데 주변에 참모들이 부족했고 주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오만함과 배우려는 자세 등이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