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흑인 여성에게 해방의 의미
노예 해방 후에도 흑인 여성은 대부분이 농장에서, 주방에서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부의 흑인들은 노예제 대신 재소자 임대 제도에 의해 재소노동자로 당국에 임대되어 수용 시설에 수용된 채 쓰러져 숨을 거둘 때까지 노역을 당했다. 재소자 임대 제도는 노예 소유주와 주 당국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어 그들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되었다. 재소자 여성들의 경우 감옥에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노예제 이후 농장에서 시달리지 않는 대다수 흑인 여성 노동자들은 가사 노동자가 되어 30년 이상 집 안 하인으로 일했다. 그녀는 백인 고용주의 노예에 불과한 삶을 살았다. 사실상 가사서비스는 노예제의 연장 선상에 다름 아니었다.
짐크로법은 철저한 인종 분리 정책으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된 법이다. 흑인들은 이 때문에 백인보다 경제, 교육, 사회 모든 면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웃긴 것은 흑인 하인이 백인과 같이 있으면 문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도장이나 지문처럼 주인이 있으면 그 상황에서는 하인 또는 노예가 인정되고 허락되는 시스템이었다.
흑인 여성의 '부도덕함'에 대한 끈질긴 이야기는 가사 노동자의 취약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가사노동은 대부분 흑인 여성이 수행하고, 비천한 일을 수행하는 흑인 여성들이 '무능'하고 '문란'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가사 노동을 한다고 해서 그런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무능하고 문란한가. 이는 신화로 이용되는 도구였을 뿐이라 생각한다.
1890년 인구 총조사에서 48개 주 가운데 32개 주에서 대다수의 흑인들이 종사하는 직업이 가사 서비스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럼 당시 백인 여성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백인 여성들은 가사 노동자들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예제에 맞서지 않는 백인 여성들은 노예제의 비인도성을 외면하였다. 1940년까지도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 여성은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운 좋게 산업계에 진출한 흑인 여성들도 저임금과 착복에 시달렸다.
6장 교육과 해방: 흑인 여성의 관점
지배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흑인은 열등한 위치에 자리했으나 그들은 교육의 기회를 얻는데 적극적이었다.
다행인 것은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은 연대하였다는 것이다. 프루던스 크랜들과 마거릿 더글러스, 미르틸라 마이너는 젊은 흑인 여성들에게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투쟁했다. 미르틸라 라이너는 1851년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를 열었다.
교육은 흑인들에게 해방이자 빛이었다. 교육을 받은 흑인들은 자신들이 얻은 지식을 노예 해방과 집단 투쟁에 이용하였다.
1831년 냇 터너 반란 이후 남부에는 노예 교육 금지 법안이 강화되었다. 메릴랜드와 캔터키 주를 제외하고 모든 남부가 노예 교육을 금지하였다.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들의 교육을 저지하기 위해 체벌을 가했다. 그럼에도 몰래 독학으로 읽고 쓰기를 배운 이들은 자매와 형제들에게 지식을 나누었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에 여러 흑인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인종분리 교육이 등장하여 흑인의 교육 기회가 급감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육에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사실 여전히 "유색인종 여성은 백인 남성의 적법한 먹잇감 취급을 당했다". 그리고 만일 이들이 백인 남자의 성폭력에 저항할 경우 감옥에 내팽개쳐져서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로의 회귀‘인 시스템의 피해자로 전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P146
나는 백인 아이들과 전차를 기차를 타러가곤 했고 (...) 앞자리든 뒷자리든 내가 원하는 데는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 백인 남자가 다른 백인 남자에게 "저 검둥이가 여기서 뭐하는 거죠?"하고 물었는데 "아, 저 여자는 그 앞에 있는 백인 아이들의 보모예요"라는 대답이 나오면 순식간에 평화의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하인-노예-으로서 백인 남자의 객차에 오르거나 전차의 백인 남자 구역에 있는 한 만사형통이지만 옆에 백인 아이가 없어서 내가 하녀임을 증명할 수 없으면 단박에 ‘검둥이‘ 자리나 ‘유색인종 객차‘를 할당받곤 한다. - P148
재건시대부터 지금까지 흑인 여성 가사 노동자들은 ‘그 집 남자‘들이 자행하는 성학대를 중대한 직업상의 위험 요소 중 하나로 여겼다. 이들은 번번이 일을 하다가 피해를 당했고, 자신과 가족이 절대 빈곤으로 떨어지든가 성학대에 굴종하든가 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조지아의 한 여성은 "마님의 남편이 내게 키스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입주 일자리 중 한 곳을 잃었다. - P149
인종주의는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굴러간다. 백인보다 흑인하인을 더 좋아한다는 말로 자신이 흑인을 칭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용주들은 실제로는 하인-솔직히는 노예-은 천생 흑인의 숙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다른 고용주는 자신의 요리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근면하고 조심성이 있어요. 정성스럽죠. 그녀는 착하고 충직한 사람이고, 아주 고마워할 줄 알아요." 미국 문학과 이 나라의 대중매체는 흑인 여성의 숱한 전형을 충직하고 참을성 있는 하인으로 제시한다. - P152
백인 여성들은 더 나은 일을 찾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절대 가사노동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 여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이런 일자리에 발목이 붙들렸다. 심지어 1940년대에도 뉴욕과 그 외 대도시에는 백인 여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흑인 여자들 무리에서 원하는 사람을 골라갈 수 있는 길거리 시장-현대판 노예 경매장-이 존재했다. - P153
작금의 ‘중간계급‘ 페미니스트 프로그램에서 가사 노동자 문제가 편의적으로 누락된 것은, 그들이 부리는 가정부에 대한 착취적인 처사를-최소한 부유층 여성들의 입장에서-감추고 정당화하는 방편인 것으로 드러날 때가 심심찮게 있었다. - P155
수백만 흑인-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은 해방이 ‘주님의 강림‘이라고 확신했다. - P161
흑인들은 해방이 되면 ‘40에이커의 땅과 노새 한 마리‘가 생긴다는 망이 악의적인 루머임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땅을 손에 넣기 위해, 정치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치며 투쟁해야 했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지내던 이들은 간절한 학구열을 충족시킬 권리를 열정적으로 부르짖게 된다. - P163
마르틸라 마이너는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은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돌을 던지는 인종주의 폭도들의 여러 비행과 방화 시도, 퇴거 조치와 전투를 벌였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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