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巳】二十九年 秦封衛鞅 商於十五邑 號曰 商君


【癸未】三十一年 秦孝公薨 子惠文王立 公子虔之徒 告商君欲反 發吏捕之 商君 亡之魏 魏人不受 復內之秦 商君 與其徒 之商於 秦人 攻殺之 車裂以徇 盡滅其家 初 商君 相秦 用法嚴酷 嘗臨渭論囚 渭水盡赤 爲相十年 人多怨之

상앙의 최후. 법을 강화했지만 그 가혹한 법으로 인해 본인이 형벌을 받았구나.


○ 趙良見商君 商君問曰 子觀我治秦 孰與五羖大夫賢 趙良曰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 僕 請終日正言而無誅 可乎 商君曰 諾 趙良曰 五羖大夫 荊之鄙人 穆公 擧之牛口之下 而加之百姓之上 秦國 莫敢望焉 相秦六七年 而東伐鄭 三置晉君 一救荊禍 其爲相也 勞不坐乘 暑不張盖 五羖大夫死 秦國 男女流涕 童子不歌謠 舂者不相杵 今君之從政也 陵轢公族 殘傷百姓 公子虔 杜門不出 已八年矣 君 又殺祝驩而黥公孫賈 詩曰 得人者 興 失人者 崩 此數者 非所以得人也 君之危若朝露 而尙貪商於之富 寵秦國之政 畜百姓之怨 秦王 一旦 捐賓客而不立朝 秦國之所以收君者 豈其微哉 商君 弗從 居五月而難作

輔車相依(보거상의): 순망치한 처럼 같이 사용되는 말 (백리해와 관련된 고사성어)
백리해(향후 오고대부五羖大夫가 됨)
진나라(晋)가 우나라가 가도멸괵을 통보.
백리해가 진나라(秦) 포로로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여 초의 목장으로 감. 진 목공이 백리해를 탐을 내어 그를 데려오려고 했더니 그가 초에 있기에 염소를 주고 데려옴. 미천한 출신이기에 진 목공은 말이 나오지 않게 그를 재상으로 발탁되어 결국 대부까지 오르기에 이름. 백리해가 오고대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 이런 사연이 있었음.

왜 갑자기 오고대부를 끌고 왔는가 궁금했는데 상앙과 비교를 위해서였음. 참으로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되는데. 상앙과 백리해 둘 다 머리도 좋고 계책을 쓰면서 나라를 구했지만 둘의 결말은 확연히 달랐다는 것. 상앙은 주변에 시샘을 자초하면서 거열형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해진 반면 백리해는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칭송을 받으며 대대손손 업적을 남긴 대부로 남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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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1-12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기 완독하고 뿌듯했던 기분이 기억납니다.
상앙, 백리해,,, 기억나네요^^

그 기세를 몰아서 자치통감, 한서를 읽으려고 사놓았지만 금세 바람이 빠져버렸습니다. 반드시 읽을겁니다.

왜 여기서 이런 다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ㅋㅋ

거리의화가 2023-01-12 09:0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그 두꺼운 책을 완독하시다니 역시 갓벽하십니다^^ 안 그래도 사기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이번 참에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흐~ 저도 자치통감 올재 버전으로 갖고 있거든요. 지금 춘추좌전 읽는 중입니다^^; 한서는 이북으로 받아놨는데 아직 진행을 못했네요. 그레이스님도 같이 읽으시면 저도 덩달아 열심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