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잉글랜드 수녀

아카디아 무도회에서
폭풍우
실크 스타킹 한 켤레

감상적이지 않은 토미

약혼자가 길고도 불확실한 길을 떠나겠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절대 그녀에게서 떠나는 법이 없는 평온함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말을 듣고 수긍했다.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내보이며 들떠 있던 조는떠날 순간이 되자 마음이 조금 약해졌는데, 오히려 루이자는 연한 홍조를 띤 채 그에게 입을 맞추며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조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는데, 십사 년이걸리고 말았다. - P45

두 사람으로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미묘하면서도 가장 대단한사건은 루이자의 발걸음이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이었다. 차분하고 평온한 하늘 아래 평탄한 길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무덤 외에 다른 어떤 곳으로도 벗어나지 않을 곧게 뻗은 길이자 곁에 누구도 둘 수없을 만큼 좁은 길이었다. - P46

바깥은 화창하고 활기찬 오후였다. 대기는 수확하느라 바쁜 남자들과 새와 벌의 소리로 가득했다. 소리 높여 부르는 소리, 금속 기구가 덜컹거리는 소리, 감미로운 새 울음과 길게 윙윙거리는 벌 소리. 창가에 앉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앞날을 헤아려보는루이자는 수녀원에 있지 않지만 수녀나 다름없었다. - P56

"보비노, 너 옛날부터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그랬지. 그래, 네가 원한다면 난 상관없어."
젊은 아카디아인의 그을고 다부진 얼굴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엄청난 행복감으로 달아올랐다. 그는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뭐, 싫으면 말고." 칼릭스타는 그가 아무 대꾸를 안 해서 자존심이상한 척을 하며 되는 대로 툭 내뱉었다.
"맙소사! 지금 네가 한 말에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거 알잖아.
진심이야, 칼릭스타? 또 마음 바뀌는 거 아니지?" - P102

당신이 지금 당장, 오늘밤에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견디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어, 또다시 말이야."
그녀는 안장에 팔을 걸치고 그 팔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그는 이 말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그렇게 말해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 말을 하자, 그로서는 세상 전체가 달라진 듯했다. - P103

그렇게 폭풍우는 지나갔고 모두가 행복했다. - P113

그녀 자신은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불건전한 일을 하는 법이 없었다. 과거에 빠져 있을 시간이라고는 일분일초도 없었다. 지금 사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했다. 미래가 흐릿하고수척한 괴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면 간혹 질겁하는 일은 있었지만, 다행히 내일은 오지 않았다. - P115

그곳의 구석진 곳으로 가서 면 스타킹을 벗고 방금 산 실크 스타킹으로 갈아 신었다. 그녀의 예리한 정신이 작동하지도 않았고, 사리를 따져보거나 그러한 행동의 동기를 만족스럽게 설명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 고되고 피곤한 작용에서 벗어나,
그녀의 행위를 지휘하며 그녀의 책임을 덜어주는 어떤 기계적인 충동에 몸을 맡겼다.
살에 닿는 실크의 촉감이 얼마나 좋은지! 부드러운 소파에 누워 그호사스러움을 만끽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신발을 신고 면 스타킹을 돌돌 말아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 P117

"자, 내 말 들어봐, 제이 엘링턴. 우리는 멋진 게임을 즐기고 있었던거고 이제 끝낼 때가 된 거야. 사람이 때가 되면 철이 들어야 하잖아.
제시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면서 왜 그걸 부정해? 제시는 너랑 비슷한 사람이고 너한테 빠져 있는 게 분명하니까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지. 그런 거야."
제이 엘링턴은 이 상황이 감당이 안 되는지 연신 이마를 훔쳤다. 어쩌면 지금껏 살면서 자신의 알량한 내면으로 그나마 가장 깊이 내려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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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0-12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올려주신 짧은 문구들....

[기생충]

일리노이, ... 요 부분 대사를 갑자기 생각나게 햇어요^^ 즐독하시어요. 화가님 134면 반 넘게 오신 건가요?^^

거리의화가 2022-10-12 10:07   좋아요 1 | URL
오늘 아침에 좀 더 읽어서 이제 절반 좀 안되게 남은 듯 싶습니다^^ 과거라고 해도 지금의 현실도 바뀌지 않은 것들이 많아 요즘 소설 읽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