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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 ㅣ 최인훈 전집 2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광장과 구운몽에 이어 이 작품을 읽으니 최인훈은 한국 전후문학의 세태와 현실을 잘 반영하는 작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과 구운몽이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배경으로 씌여져 196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회색인은 1958년과 1959년 사이가 배경이라 오히려 1950년대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4.19 혁명 딱 직전의 상황을 그린다.
국문학도이자 소설을 쓰는 독고준의 하숙집으로 친구인 김학이 찾아온다. 학은 학술 동인지 『갇힌 세대』에 실린 준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준에게 동인회 가입을 권하지만 준은 스스로를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여긴다. 학은 정치학도로서 사회변혁을 꿈꾸는 급진적 행동주의자인데 반해, 준은 사색적이며 관념적이며 사회의 변혁에도 회의적이며 소극적이다.
주인공 준은 패배주의에 젖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그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친구인 학은 여전히 혁명을 이야기한다. 준은 그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흘린다.
고향인 북한을 그리워하지만 갈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의 배고픔이 사라질까? 그의 배고픔은 상실이 아니라 마치 붙잡을 희망조차 생기지 않게 되버린 젊음을 잃어버린 늙은이 같다.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자기의 몸속 어디선가 자라고 있는 식물의 지극히 은밀한 성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 식물의 형태를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람이 제 몸속에 자라는 암을 언젠가는 눈치를 채듯이 그도 속의 부스럼이 자라고 있는 기척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 심란하게 스스로 의심해보기도 했다. 나는 정신병의 초기나 혹은 상당히 깊어진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런데 몸의 탈과는 달리 마음의 그것인 바에야 환자가 스스로를 진단하는 힘이 있는 동안에는 아직 그의 정신은 파멸까지에는 이르지 않은 것일 테지. 그리고 나는 파멸은 원치 않아. 그리고 아니, 나는 행복을 원한다. 다만 그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 - P37
폭격은 계속되었다. 폭탄이 떨어져 오는 그 쏴 소리와 쿵, 하는 지동 소리는 한결 더한 것 같았다. 준은 금방 까무러칠 듯한 정신 속에서 점점 심해가는 폭음과 그럴수록 그의 몸을 덮어누르는 따뜻한 살의 압력 속에서 허덕였다. 폭음, 더운 공기.
더운 뺨. 더운 살. 폭음. 갑자기 아주 가까이에서 땅이 울렸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웅성거렸다. 폭음. 또 한번 굴이 울렸다. 아우성 소리. 폭음, 살냄새··· - P62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길만 허용되고 다른 길은 용납되지 않아. 요 먼저 어느 야당의 국회의원이 남북통일은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아?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 국시를 어겼다, 용공容共이다, 괴뢰들에게 동조한다고 야단이더군. 앵무새처럼 한 가지 말만 하라. 이것이 정부의 요구야. 인생과 정치를 좀 다원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터부에 속해. - P94
준의 상황은 아마 그 시기를 살아낸 사람이라면 전부 같지는 않더라도 경험해봤음직한 일일 것이다.
일부는 북한에 다른 일부는 남한에 흩어져 살게 된 가족의 상황, 끊임없이 의심을 받으며 사상 검증을 해야만 하는 현실, 어느 곳에도 귀속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이 소설 속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시작된 전쟁이란 상황은 가족의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는 비극의 장소였다.
하지만 전쟁의 폭격과 화마 속에서도 삶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줄 때는 희망도 엿볼 수 있었다.
정전 후 남북한 국민들은 재건이라는 이름 아래 단결을 요구받았다.
4.19 이전 남한의 젊은이들은 '(봇물처럼 들어온) 미국 문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는 이도 있었던 반면 '우린 무엇을 해도 안돼' 라며 자조하는 이도 있었다.
이후 혁명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정치와 사상으로부터 그 후로도 몇 십년간 구속받는 세월을 보냈으니 말이다.
결과론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고뇌하며 자아비판을 하거나 세태를 풍자하며 토론을 벌일 때는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을 떠올리게 되어 흐뭇했다. 세상을 바꾸지 못했어도 괜찮다. 그들은 그 시기를 충분히 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현대 한국인이 방황하고 자신이 없는 것은 어떤 ‘연속‘의 체계 속에 자기를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P126
인생의 두 가지 길. 투쟁과 체념 사이의 조화를 얻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생활. 격식도 없고 믿음도 없는 시대. 도시에 나가 소란한 장바닥에서 부대끼다가 고향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작아 보이고 무지스러워 보이는 그러한 마음. 그것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이겨내는 길은 한두 가지에 손을 대는 것으로써는 되지 않는다. 갑이 을과 얽히고 을이 병과 얽히고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얽혀 있으므로 그 속에서 사는 어떤 개인이 아무리 절박한 위기를 느낀다 해도 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신경만 갉아먹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은 저 갈 데로 간다. - P163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이라면 1959년 2.4파동이다. 2.4파동은 자유당 정권이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여러 법안들을 통과시킨 일련의 정치사건으로 '보안법 파동'으로 불린다. 1956년 이승만이 당선되었으나, 진보당의 조봉암이 2백만 표를 얻은 것은 자유당 정권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1958년 1월 12일 진보당의 조봉암 및 간부들을 체포하고 정당 등록 취소로 이어졌다. '보안법 파동'은 자유당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예산안 등 10개 법안 27개의 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1960년 선거에 영향을 주었고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1959년은 이른바 2.4 파동의 떠들썩한 소문을 안고 시작되었다.크리스마스이브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국회에 나타나서 눈부신 활약을 한 이 사건은 분명히 한국의 정치사에 길이 남을 만한 큰일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2천만 국민이 모두 다 이일에 비분강개해서 인심이 흉흉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고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신정은 도시에서 여전히 축하되었으며, 여전히 새해의 태양(조금도 다르지 않은 싱싱한)은 솟아올랐고, 사람들은 열심히 사랑을 하고, 사무실에 나갔다. - P175
혁명은 사상과 엘리트와 대중의 삼중주라고 할 수 있어. 이 셋 가운데 어느 하나가 빠져도 혁명은 성공하기 어려워. - P208
준에게 김순임과 이유정이라는 여자가 있다. 김순임은 기독교 전도를 하려 한다. 이유정은 서양화를 전공한 유학파다. 둘은 배경도 성격도 다른데 준에게도 마찬가지다. 준은 둘 사이에서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누구를 선택한다는 것이 마치 그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 같이 여겨졌다. (마지막에 누구를 선택했는지는 직접 읽어보시길.)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저녁, 친구 김학이 준을 찾아온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김학은 준을 또 다시 설득하려 하지만 준은 끝내 거부한다.
누가 앞설지 뉘라서 알리오. 앞서지 않아도 좋다. 내가 안 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누워 있다. 나는 뛰지 않는다. 나는 농촌계몽도 안 하고 사회 조사도 안 한다. 여울이 망하는 것보다 내가 망하는 것이 더 아프니까. 살여울이 망하는 것은 너도 망하는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망할망정 살여울의 주민은 망하지 않는다. 적어도 앞으로 올 세계에서는 그리고 살여울은 망하지도않을 것이다. 김학이 같은 사람들이 한사코 지킬 테니까. 나의 무대는 그 다음이다. 나는 회피하는 것인가. 그렇다. 회피하는 것이다. 정치의 악을 ‘에고의 사랑‘으로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을 나는거부한다. - P289
"자네가 말하는 혁명이란 뜻있는 분들이 모여서 당파를 만들고 폭력으로 정권을 인수한다는 것이겠지?
"학은 웃으며,
"그게 혁명이잖아?"
"그러니까 싫어. 이것 봐. 혁명은 실천하는 거 아니야? 지금 당장에 민주주의를 대신할 새 신화란 걸 생각할 수 있나? 없단 말야. 그렇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라 강제적인 정권 교체, 즉 사람을 바꾸는 것밖에 안 되는 건데, 난 새 신앙을 제시하지 않는 사람의 교체는 위험스런 일이라고 봐. 이 자네 글에 있는 상황과는 달라. 자네 말처럼 상해의 권위를 장한다는 신화적인 후광이 있는 인물이나 집단인 경우라면 몰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 어디 그런 인물이나 집단이 남아있나? 어느 날 이천만 민중이 홀연 인간적 모욕을 실감하고 일제히 폭동을 일으킨다면 그땐 나도 그 대열 속에 있을 거야." - P371
나는 당시를 직접 겪어내지 못했지만 책이나 1차, 2차 사료들을 통해서 간접 경험해왔다.
1960년대보다는 1940년대와 1950년대 관련 문헌들을 많이 읽어서인지 회색인이 상대적으로 더 잘 읽혔고 공감이 많이 갔다.
경험한 만큼 보인다고 해야겠지. 나는 준과 학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갇힌 세대였지만 그들은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고 미래를 꿈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