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일상적이고 삶에 묶이는 일을 요구당하는 존재로 취급받던 여성들이었다.
남성됨의 정치는 삶이 평범하다고 보았고 이를 넘어선 차원에서 번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디 브라운은 이 카리스마적 영웅은 시대착오적이며 오늘날의 정치는 이익의 정치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진정한 정치도 진정한 남성됨도 죽어 있다는 소리다.

그동안 여성들은 인류와 정치에 속할 자격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여성들은 남성됨을 쫓기 위해 남성과 그들이 주장하는 정치를 대체로 수용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남성이 배제하고 거부하고 탄압하고 부정한 것을 가져와 통합해야 한다.
남성성은 문제가 없다. 제도화된 남성됨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소외된 남성의 정치가 문제라는 것이다.
육체와 이성이 분리되어 있는 현재와 제도화된 정치는 반쪽 짜리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추구할 정치 형태는 남성적 가치를 여성적 가치로 교체하는 방식은 결코 아니다.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는 방식의 이분법은 너무나 단순하고 조야하다.
현재 잘못 깔린 판 위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반목과 전쟁을 피하고 새롭게 판을 깔고 형성된 정치 조직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판을 바꾼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용기를 내야 한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권력이 생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이 권력 위에 있었던 적은 없지 않나.
우리의 목소리는 무시되기 일쑤였고 제도권 안에서 박탈되고 격리된 채 살아왔다.
여성은 이제부터라도 정치권력의 경험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웬디 브라운이 주장하는 것은 결국 제도권의 정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철저히 무시되고 배제된 형태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베버를 통해서 그들의 정치 이상의 한계를 엿보았다.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편가르지 말고 단순한 통합도 아닌 새로운 정치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대목이 인상깊었다.

현실의 정치는 썩어 있고 대립과 반목의 극한으로 피로하다.
여성들의 목소리는 정치판에서 그저 싸움의 도구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니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 커져야 하고 정치적 용기를 내야 한다.


피에쓰) 관련 도서들이다. 

어렵지 않은 입문 또는 개론서들을 골랐고 막스 베버는 언젠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근대 역사를 보다 보면 종종 그의 이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렌트도 마찬가지!!!




 





남성됨은 삶, 단순한 생존, 필멸성, 일상, 리듬, 자연과 필요의 개입 등을 초월함으로써 실현된다. 또한 끈질긴 불멸 추구를 통해, 특히 삶과 비교되거나 대조되는 이상과 제도의 건설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 욕구 필멸성을 초월하기 위해 분투하고 이런 것들 너머의 행동 범위에서, 즉 이런 것들이 사라지는 영역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때로는 소란스럽고 때로는 미묘한 이 노력의 잔향은 자신을 위해 고안한 기획과 그 자신이 거부하고 억압하고 탄압한 ‘삶’, 이 모두에 들어 있다. 이 ‘삶’이 저열함만으로 환원되는 사이, 이 기획은 ‘삶의 저열함’에서 멀어진다.

서구의 정치적 인간은 육체에 덫, 무기, 도구, 기반, 정신에 대한 저주 등 다양한 이미지를 덧씌운 뒤 그것을 인식해 왔다. 그리고 육체에 대한 이 가치 평가를 자신이 건설하는 정치로 가져다가 제도화한다. 인간의 개별 육체, 육체의 관리 영역, 정체 등은 모두 잘 해 봐야 도구나 기반일 뿐이며, 보통 인간과 인간의 정치 기획에 짐이 되는 것, 자극물, 위협으로 여겨졌다.

인간은 형상 부여자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상정하고, 형상 부여를 통해 정치를 구축하고, 정치를 인간의 목적이라고 부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형상을 부여할 권리를 타고났다고 상상한다. 형상을 부여하면서 점점 더 큰 삶의 공간을 통제하고 지휘하고 정복하는 힘이 인간의 존재 이유이며 남성됨 정치의 국가적 이유다.

정치는 (조직적 약탈, 노략질, 강간 등) ‘무의미한 폭력’, 즉 육체와 육체노동의 열매를 전유하고 철저히 파괴하려는 남성적 유대에서 나온다. 이런 의미 없는 폭력은 자신을 인간 존재의 목적으로 해석하길 멈추고, 내적 지배와 외적 공격의 제도로 발전해 나아간다.

마키아벨리와 그리스인에게 정치의 ‘특별한’ 본성은 비르투와 아레테로 상징되는 정치 영웅의 특성으로 구현된다. 베버도 진정한 정치가를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베버식 정치의 특별한 차원은 그가 진정한 정치가와 카리스마적 지도자 사이에 구축한 정체성에서 좀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카리스마는 ‘평범함을 넘어선’ 차원에서만 번성하고, 일상적이고 삶에 묶이는 일이 요구될 때는 빠르게 썩어 문드러지기 때문이다.

베버의 카리스마적 영웅은 시대착오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거대 정치는 사라졌으며, 이익의 정치와 육체적 사회적 존재의 정치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의 정치는 시시하고 하찮고 썩었다.

자유주의 국가의 형식상 정치권력은 ‘국익’, 즉 시민의 특정 이익 및 일반적 안녕과 병치는 ‘명분’을 주장할 때 표현된다.

역사는 인간 존재와 행위를 거의 모든 차원에서 남녀로 나눠 왔기에 여성을 더욱 ‘충실하게 인간적인’ 젠더라고 볼 순 없다. 남녀의 구축 과정 모두 편파적이며, 편파적인 내부에서 인간의 경험은 모두 젠더화된다. 오직 남녀의 경험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자유, 즉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우리 존재를 위한 지속적이고 다양한 발명을 가능케 하는 자유는 우리라는 존재,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해야만 하는 것, 필요의 길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정복하기를 그칠 때 비로소 얻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집단적이고 탈중심화된 생산의 소유권과 통제라는 기본적 민주사회주의 계율과 재생산 노동의 집단 책임이라는 기본적 급진 페미니즘의 계율이 실현될 것이다. 이와 함께 훨씬 많은 것들이 뒤따를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쾌락적이고 시적인 움직임은 물론이고 고통, 폭력, 질병까지 한데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자연과 육체에 투항하자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부적절하다.

‘육체’라는 딱지가 붙은 여성은 서구 문명에서 필요와 섹슈얼리티 양쪽 항목을 주로 담당했다. 그 결과, 서구 문명 속 여성은 자기 일에서는 비하되고 고립되고 억압당했고, 성적으로는 대상화되고 침해받았다.

사실 필요와 욕망은 모두 창의적 가능성의 장일 수 있으며, 그 어느 쪽도 태생적으로 우리를 결정짓거나 노예화하지 않는다.

인간의 열정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지의 영역이며, 주요 영역은 미개척 상태로 남아 있다. 게다가 인간의 열정은 소위 말하는 ‘생각’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존재를 통해 구체화되고 미뤄지면서도 튼튼해지고 사고의 반대편에 놓이게 된다.

어떤 삶의 형태를 만들어 내며 책임을 지기보다 통제된 조건하에서 살아가는 편이 쉽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 권력을 취하거나 강해지기보다 권력 밑에서 살아가기가 더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안락함과 편안함은 자유가 약속하는 보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살아가는 것 이상을 원한다. 단순히 오래 살기보다 세상과 창의적 적극적으로 마주하며 살기를, 심지어 세계가 움직이는 항로 가운데 어떤 것을 결정지으며 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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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1-30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의 이 글을 읽으니 제가 읽은 책의 내용이 정리되는 것 같아요. 저는 책을 읽을 때 전체적 윤곽을 잡지 못하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정리해둔 걸 보니 참 좋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1-30 20:07   좋아요 0 | URL
도움을 받으셨다니 기쁩니다^^ 다락방님도 철학자들 이론 읽어내느라 고생하셨어요. 다음 달 책은 아직 사지를 못했네요. 지금 주문해봤자 설 지나서 올 것 같아서 다음주에 주문하려구요. 다음달 책은 이것보단 쉬울거라 믿으며…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