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결혼은 "struggle"이다.  (존 업다이크)

일껏 빌려놓고 자꾸 미루던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연달아 두 권 읽었다.
결혼생활 에세이집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는 꽤 쌈빡했는데,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은 내겐 별로였다.

막연히 호감이 안 간다는 이유만으로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작가들이 몇 있는데
저번에 아사다 지로를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그 인기와 명성엔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쿠니 가오리도 마찬가지다.
뻔하기 짝이 없는 결혼생활을, 특히 아내 된 자의 마음을 콕 집어서
산뜻하면서도 여운이 남게 표현한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당신의 주말은~>에서 'struggle' 을 '만신창이'로 번역한  작가.
내 생각엔 그렇게 거하게 표현할 것 없이 '몸부림' 정도가 적당한 것 같은데.
아직 만신창이로 싸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브로티건의 <레스토랑>이라는 시 인용 부분이 특히 좋았다.
('미국의 송어낚시'의 그 리처드 브로우티건?)

서른일곱 살 / 그녀는 완전히 지쳐 있다
결혼반지란 대체 뭘까 / 그녀는 빈 커피잔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마치 죽은 새의 부리를 들여다보듯
 저녁식사가 끝나고 / 남편은 화장실에 갔다
하지만 곧바로 돌아오리라, 그리고 그 다음은 그녀가 화장실에 갈 차례다 ( 70쪽)

아무래도 들키고 싶지 않은 얼굴이나 표정을 원치 않아도 보여주고 또 보게 되는 것이
부부 사이다.(미혼 때는 이것이 '관건'으로 느껴졌다!)
같은 화장실 변기를 볼일보고 1분도 안 되어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 부부다.
물리적으로는 너무나 밀착되어 멀미가 나는......

"나 9월에 여행 갈 거야!" 하는 아내의 말에 "그럼, 밥은?"하는 비명에 가까운 남편의 물음이 
첫마디로 돌아온다.
그런가 하면 부부란 싫든좋든 '늘 들러붙어 있다'보니, 별이 쏟아지는 환상적인 밤하늘
'싱그런 초록과 물이 아름다운 5월의 고추냉이밭'을 함께 목격하기도 한다.
그 순간, 세상사람들이 모르는 풍경과 냄새와 단 둘만의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
정말 대단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새벽 세 시의 냉장고'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냄새를 풍기는 
'자동판매기의 캔 수프'  식의 제목은 가볍디가벼우나,
이 작가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이라 애상이 느껴진다.

다음은 내가 제일 재밌게 읽은 부분.

'척'은 편리한 언어의 하나.
예를 들면 동생과 쇼핑을 하러 갈 때,
"동생인 척해도 돼?
사고 싶은 것을 발견했을 때 동생이 하는 말.
나는 언니인 척하면서 그것을 사준다. 반대로 내가,
"언니인 척해도 되겠지?"
하고 물을 때는 여동생의 남자친구에게 불만이 있을 때.
"너, 최악이다. 그런 남자하고 만나는 거 그만둬."
나는 언니인 척 그렇게 말한다.
(......) 나는 가방에서 반지 두 개를 꺼내 한 개는 내 손가락에 끼고
한 개는 남편에게 건넨다.
"아니, 구속하는 거야?"
남편은 놀랐다는 듯이 허풍을 떤다. 그는 결혼반지를 '구속'이라 부른다.
"그래, 잠시 부부인 척하자는 거지."
(106쪽)

꼭 결혼생활뿐만이 아니라 관계든 뭐든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
무작정 뒤로 숨고 보는 사람에게는   그런 식의 '척'이 완충지대랄까,
아무튼 조그만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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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9-14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척' 이 말이죠. 로드무비 님의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이야기'랑 닮았구나, 싶어요.^^ 충격 흡수를 위해 범퍼를 만드는 거죠.

로드무비 2006-09-14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충격흡수를 위한 범퍼라니, 참.ㅎㅎ
'의도적으로 가볍게'도 요즘은 양에 안 찹니다.
뭐 좀 더 완벽하게 딴청을 부리는 제목 없을까요?^^

건우와 연우 2006-09-1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밤 내내 건강관리하자며 살빼라고 닥달한 남편에게, 날 너무 좋아하는척 하지마...라고 말하면 삐질까요?^^

쎈연필 2006-09-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가 이 달 안에 곧 출간된다더군요^-^ 저도 읽어 보고 싶네요.

2006-09-15 0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9-1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청춘에게 고함 님, 저도 이 영화 보고싶어요.
아아, 그런 경험이 있으시군요.
전 누군가를 그렇게 미친 듯이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그게 또 열등감 중 하납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 산문집은 가벼운 선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결혼생활'에 환상을 가진 이나 공포를 느끼는 이라면
읽어볼만합니다.
그 시인이랑은 얼마 전 동네 야시장에서 만나 마시다가
집으로 와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답니다.
시들 괜찮더라고요.^^

또마님, 반가운 소식이네요.
전 오래 전 도서관에서 빌려 봤는데 번역이 나빴는지
그렇게 빨려들진 않았거든요.
출간되면 바로 사볼랍니다.^^

건우와 연우님, 그래 지난밤 그렇게 말해보셨어요?
"날 너무 좋아하는척 하지마!"라는 말을 저도 해보고 싶어도
책장수님이 좋아하는 척도 안해주니 써먹을 수가 없구만요.^^




2006-09-15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9-1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중의 행복 님,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쁨을 드리도록 할게요.
제가 감사하지요, 뭐.^^

DJ뽀스 2006-09-2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일 기억에 남는 구절은 "밥은?" 입니다. ㅋㅋ
어제 일일드라마에서 "내가 홍씨네 밥통이냐?"란 대사가 나오길래 어무이께서 "내가 박씨네 밥통이냐?" 따라하시더라구요.(내가 밥하는 기계냐..나만 보면 밥밖에 안떠오르냐...) 결혼하면 끼니 해대는 게 정말 힘들꺼 같아요.

2006-09-22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9-2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J뽀스님, 홍씨군요.ㅎㅎ
우리 어무이 성과 같네요.

DJ뽀스 2006-09-2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로드무비님 홍씨는 19순정에 나오는 가족들의 성씨구요. 저는 박씨~ ^^:
(어제 제사 지냈더니 넘 피곤하네요. 설겆이 밖에 안했는데도...다크서클 -_-;)

2006-11-0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