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 전집>을 읽고 있다.
임화의 아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래 전 옛책들을 만지는 일을 할 때 우연히 내 눈에 띈
'가을'이라는 그의 단편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수첩에 이름을 적어놓았었다.
십몇 년 전에 읽은 짧은 글 하나가 기억 속에 그리 오래 남아 있는 일도 신기한 일이다.
좋아하는 건 꼭 챙겨먹는 식탐은 책이라고 예외가 없나보다.
그의 전집이 나와 있는 걸 알고 화들짝 얼마나 반가웠는지.
오늘 아침, 축구경기가 끝난 뒤 덮어두었던 그의 책을 펼쳤더니 두 번째가
문제의 작품 '가을' 인데,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산모가 젖이 안 나올 때 돼지족이 좋다는 얘기가 있어서 사려고 들렀다가 좋은 게 없어서
대신 돼지고기를 두어 근 샀다는......
(그러니 돼지족이 산모의 젖을 잘 돌게 한다는 이야기는 옛날부터 있었나 보다.)
아이고, 그것도 모르고!
마이 도러를 낳고 집에 누워 있을 때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시인이 족발을 사들고 왔던
8년 전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늦은 저녁, 산모답게 헐렁한 면원피스를 입고 택시에서 내리라고 가르쳐 드린 지점까지 마중을 나갔다.
분유 몇 통과 족발 봉지를 바리바리 손에 든 시인이 택시에서 내렸다.
족발 봉지 속에는 상추와 깻잎 등속과 서비스로 넣어주는 소주까지 한 병 들어있었는데
그게 '두꺼비'였다.
분유 봉지가 더 무거울 것 같아 그쪽을 받아들며 시인을 놀렸다.
"산모 집에 오면서 돼지족발이랑 두꺼비 한 마리까지 챙겨오시는 분
아마 대한민국에 선생님밖에 없을 거예요."
내 구박 아닌 구박에 시인은,
"이상하게 족발이 사오고 싶더라고, 그리고 술은 이제 한잔 마셔도 되지 않나?"
"젖을 먹이지 않으니까 한잔쯤은 상관없겠죠!"
간단하게 준비한 저녁상에 족발이 올라와 그날 시인과 나는 아주 푸짐하게 저녁을 먹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족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보쌈은 가끔 먹었지만.
그 시인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는 막연히 그의 노후를 책임지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몇 살이라도 젊고, 아무래도 시인보다는 세상을 잘 아는 편이니까 그를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그런데 지금은 연락조차 끊어졌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아간다.
아이는 금요일 오후 삼촌네 따라 부산에 가고, 다음날 남편과 단 둘이
동네 산 기슭의 노천 장어구이집에 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튼 개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모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나의 옛 친구들 이야기도 나왔고,
냄새가 나서 그냥 보자기로 슬쩍 덮어두었던 문제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었다.
문제는 결국 나자신.
골백 번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뾰족한 결론이 있을 수는 없었다.
눈물이 좀 났고, 가슴이 뻐근했다.
우리는 늙고, 세월은 이러구러 지나가는 거겠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이야기도 지나는 말로 가볍게 넘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