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년생 1
키오 시모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스위트 딜리버리>를 읽으며 재밌다고 난리를 쳤더니 자명한 산책님이 댓글을 남기셨다. 만화 <5년생>을 읽어보라고. 5년생? 그러고 보니 언젠가 물장구치는 금붕어님이 내게 권해주신 책이다. 홍상수의 영화 같은 만화라고. 나는 욕을 해대면서도 홍상수의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본다. 왜 사람도 그런 사람 있지 않나. 지긋지긋하게 싫은데도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사람. 반대로 너무너무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데 개인적으로 만나보라면 피하고 싶은 사람.
인생은 참 불공평한 것이다. 10여 년 전 어떤 소설가와 커피를 마시며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성실함의 안쓰러움과 우스꽝스러움에 대하여. 한마디로 아무 재주 없이 성실하기만 한 사람의 그 진정성이라는 것과 노력이 구차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그날 심사가 좀 사나웠던 것일까? 그는 유명작가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나의 태도는 더 비열했다. 마치 재능이라는 딴주머니를 차고 있는 사람처럼 수긍할 수 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5년생>을 어렵사리 손에 넣었다. 성적이 모자라 한 해 대학을 더 다녀야 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아키노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임시취직한 요시노의 지지부진한 사랑 이야기였다. 다음 대목을 보면 아키노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어떻게 요시노를 꼬셨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멋대가리없이 대답한다.
"글쎄, 그 당시 그 애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고...대충 얘기하자면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조금씩 다가갔다고나 할까. 글쎄, 인간이란 뭐 이렇다할 만한 이유 따위 없어도 어느 정도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럴 분위기가 돼버리는 게 아닐까?"
요컨대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운명적인 것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사랑을 엄청나게 미화하여 들려주고는 나중에 엄청난 배신감에 치를 떨며 헤어지는 친구들을 예전에 워낙 많이 보았는지라 도리어 주인공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진술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아키노는 애인과의 일주일 만의 전화 통화에 이런 낯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안다. (전 5권을 통털어 가장 달콤한 사랑 고백 장면이다.)
"네가 머리를 잘랐다는데 아직 못 보고 있으니......"
요시노는 어떠냐 하면 애인 아키노보다 더 무덤덤하고 메마른 인간이다.
"난 말야. 원래 인간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상관없는 얘기인지는 몰라도 인권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권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인간은 특히 싫어."
변호사가 되기 위한 사법공부는 자신에게 별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직장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는 그녀. 그렇다고 그것을 괴로워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유일한 장점은 속물이 아니라는 것. 유급이나 하고 멋진 삶에 대한 의욕도 도무지 없는 애인 아키노의 삶을 그대로 용인한다. 한마디로 둘은 너무 잘 만났다. 요시노도 그런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난 네가 너무 보고싶고 너무너무 사랑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게 느끼지 않는 이 감정이 내겐 소중하다고나 할까. 아키오의 존재가 가볍게 느껴지는 게 남자에게 정열을 투자할 여유가 없는 내게는 딱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어."
아, 이런 그녀의 말은 언젠가 내가 어느 남자 앞에서 읊조렸던 말이기도 한 것이다. 나 또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상과 연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구체적인 연애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별 볼일없는 저라도 사랑해 주실래요?
'연애가 뭐 별건가?' 시모쿠 키오라는 이 낯선 작가는 나의 18번인 이 대사를 다섯 권의 만화 속에 방백으로 숨겨놓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같은 만화랄까. (아쉽게도 이 책은 품절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10여 년 전 나와 '구차한 성실성'에 대해 얘기를 나눈 바 있는 소설가는 이렇게 비웃었다. "영화감독도 분명 작가인데 이건 정말 무시무시한 상상력 결핍의 제목이야. 듣기만 해도 정말 짜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