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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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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오셨을 때는 동독 시절부터 있었던 '차이꼽스끼 에크'에
모두 함께 갔었죠? 이번에 오시면 꼭 '까페 마야꼽스끼'에 갑시다.
여기는 내부장식이 아름답고 값은 조금 비싸지만 음식이 정말 맛있습니다.
(...)메뉴에 있는 마야꼽스끼의 얼굴은 어쩐지 화가 나 있는 듯이
보이긴 합니다만
.(2007년 2월 14일 타와다 요오꼬의 답신)

2006년 7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디아스포라와 예술' 강연회장에서
처음 만난 두 디아스포라 서경식과 타와다 요오꼬는 명함을 교환한다.
타와다 요오꼬의 주소는 '베를린 마야꼽스끼 링크 xx번지'.
좋아하는 시인 이름의 그 주소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서경식은 며칠 후
기세좋게 그 집을 방문하는데......

두 사람의 서신 왕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지명에 매혹된 일 없으셨나요?'
하는 서경식의 첫 편지에
타와다 요오꼬는 이렇게 재치있는 인사로 마무리한다.
'이번에 오시면 까페 마야꼽스끼에서 저녁을......'

광주 충로 뒷골목의
경양식집 '브레히트와 노신'이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주 비엔날레에 빠지지 않고 오는 그인만큼, 그런 이름의 식당이 있는 걸 안다면
한 번은 꼭 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비엔날레나 망월동 묘역을 혼자 찾았다는 서경식의 다른 저서에 실린 글이
참 인상적이었다. 광주에 몇 번 가보지 않았지만 나도 언제나 혼자였고
'브레히트와 노신'에서 돈가스와 맥주를 먹는 것으로 짧은 여행을 마무리하곤 했다.)

브레히트는 잘 모르겠지만 노신은 서경식이 몇 번인가 이야기한 작가다.
'당신의 고향은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책 아홉번째 편지에도
노신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등등 열 개의 주제로 나누어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종횡무진, 전혀 막힘이 없고 도무지 경계가 없다.

일도 언어도 예술도 너무 근엄하고 진지하게만 말고, 놀이처럼 가볍고 쉽게 접근하자는
견해에서는 일치를 이루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제각각 딴청을 부리는 듯 보일 때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남의 편지를 몰래 훔쳐 읽는 듯한 묘미가 아닐까.

'번역'에 대한 이야기 중 타와다 요오꼬 여사의 다음과 같은 묘사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 하쯔(hearts)와 모쯔(닭 소 돼지등의 내장을 뜻하는 일본어 준말)는 운이 같지만
후자는 영어가 아니라 한자어입니다.
내장보다는 창자 쪽이 무섭죠? 오래된 낱말의 주름은 깊고 매력적입니다.(167쪽)

보통 입담이 아니다.
다음 글을 읽으며 아꾸다가와 상을 받았다는 그녀의 소설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본이 주변 나라들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것을 지적당하면 오히려 뻔뻔해지는 이유는 '지면 바로 죽어버릴 작정이었으니
나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된 것은 우연이다'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죽으면 되니까'라든가 '나 역시 죽을 각오로 하고 있으니까' 식의 사고방식은
실은 몹시도 잔혹한 것이지만 어느샌가 그것이 달콤한 자기도취가 되어가는 것이죠.(176쪽)

서경식이 소개하는 빈 외곽의 정신치료 요양소 '예술가의 집' 내의
작은 미술관 이야기도 빠트릴 수 없다.
그 시설을 취재중인 유명한 아나운서가 어느 날 식당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 뭘 그리고 있냐고 물었다.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가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 단호한 대답이야말로 예술가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치료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환자'가 아니라 '환자이기도 한 예술가'들의
적나라한 예술이라는 뜻으로 '아르뷔르 쎈터'(아르뷔르 Art Brut : 프랑스어)
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웠다.
미로나 에곤 쉴레 등 화가의 그림과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그림이 무엇이 다른가,
'누가 광인이고 누가 광인이 아닌가?' 하는 인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언제 들어도 깊은 울림이 있다.

식당 이름 이야기를 앞에서 너무 길게 하다보니 리뷰가 길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메뉴판의 '어쩐지 화가 나 있는 듯이 보이는 마야꼽스끼 시인'의 사진이
명함판 크기의 흑백사진으로(타와다 요오꼬의 답신 옆 페이지에)
떠억하니 실려 있다는 사실.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번쩍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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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7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8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8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1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나 2010-04-0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뉴판의 '어쩐지 화가 나 있는 듯이 보이는 마야꼽스끼 시인'의 사진이
명함판 크기의 흑백사진으로 떠억하니 실려 있다는...
마야코프스키 카페.
책보다 그 사진이 더 보고 싶네요. 혹시 기회되면 올려주세요 ^^

로드무비 2010-04-01 22:19   좋아요 0 | URL
snowdrop 님, 아글씨, 제가 그 사진을 찾아봤는데
제 재주로는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그게 명함판인지 반명함판인지도 헷갈립니다.
책으로 직접 보시는 게 빠를 듯.^^

(나중에라도 발견하면 이 리뷰에 꼭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