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막다른 골목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손택수 시 중에서)

바다를 바로 눈앞에 끼고 꼬불꼬불 도는 부산의 산복도로 골짜기 동네에는
100만 명이 넘는 부산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범일동에서 시작하여, 수정동 초량동 영주동 대청동을 지나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지나......

사흘간의 촬영을 마치고 "산복도로의 끝이 어디예요?"라고 묻는 스태프의 질문에
한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산복도로는 끝이 없다!"







산복도로 위에는 내가 태어난 메리놀병원이 있고,
대학 1학년 때  짝사랑했던 머스마가 다니던
계단 가파른 남자 고등학교도 있다.


학교 졸업하고 몇 년째 펑펑 놀며 혼자 책 읽고 영화 보고 돌아다니는 게 미안해서
한 가톨릭 모임에 들어가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점자는 너무 어렵기도 하고 시각장애인들을 에스코트하는 게 더 적성에 맞았다.
어느 날 1대1 봉사(수녀님과 기사님 포함 전체 열두 명)로 동광동 사는
세실리아 아줌마를 모시고 2박 3일인가  미리내 성지에 다녀왔는데,
그만, 봉고차를 운전했던 청년과 눈이 맞아버렸으니......
세실리아 아줌마가 사는 집도 바로 저런 가파른 계단 위.






동네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골목에는 거무튀튀한 평상이 하나 있고
노인들이 사과며 배를 깎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신다.
함흥이 고향이라는 실향민 할아버지, 1.4후퇴 후 거제도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이 동네에 정착했는데 거제도 사람들이 얼마나 인심이 좋고 심성이 착했는지
잊을 수가 없다며 울먹이시고.

얼마 전 읽은 유종호 선생의 산문집 <그 겨울 그리고 가을 - 나의 1951년>에는
피난민들을 들이기 싫어 '우리 동네엔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라는 방을 써붙인 마을이
그렇게도 많았다는데......
충격이었다.








수정동인지 초량인지 영주동인지 동네 이름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진리길'이라는 명패를 붙인 한 골목의 할머니 전용 카페.
녹차 커피 300원, 대추차 쑥차 500원......

집안일을 하다가 단골들의 성화에 불려나왔다는 주인 아주머니,
"이런 게 좋지, 너무 잘살아도 재미없을 것 같아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일단 한 번 잘살아보고 나서 저런 말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게
버릴 수 없는 나의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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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9-10-2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 산복도로 얘기가 이곳에 뜨다니 정말 반갑네요. 제가 학교 졸업하고 가장 먼저 취업했던 곳이 산복도로 밑에 있는 대청동/광복동 부근 전자 골목이었답니다. 아아~, 어떻게 변했는지 찾아가보고 싶습니다. 그때 궁핍했던 부산 생활의 추억이 그립군요.

제가 산복도로를 알게 된 까닭은, 제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 누님께서 대청동에서 산복도로를 타고 올라가다가 그 언덕배기 중간쯤 오른쪽 자락에 살고 계셨는데요, 제가 가서 끊어진 전기선을 이어주고 형광등을 새로 달아드렸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그 당시의 지형이 저 위에 있는 둘째 사진과 아주 비슷했죠(물론 저 위 사진은 대청동 위쪽 산복도로가 아닌, 다른 동의 산복도로 사진인 듯한데요). 저 사진들을 보니까 그때의 옛 추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군요. 옛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아나게 해주신 로드무비(roadmovie) 님의 위 글과 사진, 정말 반갑고 고맙습니다.

(2009-10-24-맑음. 19:43)

로드무비 2009-10-24 22:55   좋아요 0 | URL
qualia 님, 지난주 프로그램 끄트머리만 보고 안타까워 하다가
오늘 낮 다시보기로 챙겨봤습니다.
제가 부민동에서 태어났거든요.
동광동 인쇄골목에서 딱 한달 이상한 직장생활도 경험해 봤고...

그래서 님이 들려 주시는 동네 이야기가 꼭 제 이야기 같습니다.
(형광등 하나 바꿔 다는 데 두서너 달 걸리는 처지지만 어쨌든...)

페이퍼를 하나 쓰고 싶어 사진들을 좀 긁어모았습니다.
좋아해 주시니 저도 반갑고 기쁘네요.^^

qualia 2009-11-11 04:28   좋아요 0 | URL
로드무비 님, 혹시 동광동 인쇄골목이라면, 대청동하고 붙어 있는 데가 아닌가요? 로드무비 님께서 동광동 인쇄골목을 말씀하시니까, 제 기억에서 또 다른 추억 하나가 호출돼 나오는데요... 제가 잘 가던 실비집이 인쇄골목 쪽에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근무하던 전자골목에서, 광복동 쪽을 바라본 상태에서 대청동 오른쪽으로 한두 거리를 가로질러 가면, 아주 싸고 맛있고 푸짐한 우동(혹은 칼국수)을 파는 실비집이 있었어요. 그 당시 제 월급이 쥐꼬리보다 적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제 나이 어린 동료랑 그 싸고 맛있는 실비집을 자주 갔었죠. 구수한 내음과 함께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우동에다 톱밥 같은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서 먹는 그 맛, 정말 잊을 수가 없네요.

제가 한번 인쇄골목의 한 인쇄소에 업무차 갔던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의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지금도 제 귀에 윙윙거립니다. 어쩌면, 로드무비 님과 저는 동일 시간, 동일 공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서로 교차했을지도 모릅니다.^^

로드무비 님의 동광동 인쇄골목 얘기 하나로 매트릭스의 세계가 따로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2009-11-11 02:39)

2009-11-11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4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4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4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5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9-10-24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맞아버렸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2009-10-24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09-10-2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둘레길 첫 마을, 지리산 매동마을 편을 하더라고요. 무한도전 재방을 보다가 친구의 문자를 받고 돌려서 봤는데... 같은 디자인의 야구모자를 쓴 어르신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야구 모자 앞에 쓰인 '신드롬' '수도왕' '마그마' 같은 단어에 혼자 웃고, 사흘 간의 촬영을 마치고 내려가려는 VJ에게 "차비 줄까?" 하며 서운해하시는 할머니 모습에 짠해도 하고.

후니훈님의 <풍경과 상처>를 앞에 놓고, 읽지는 않고 어느 분의 리뷰를 먼저 봤어요.

"대동여지도에 관한 나의 생각은 '고향'에 대한 생각과 맞물려 있다. 나는 고향에 관한 사람들의 그리움 섞인 이야기나 문학과 유행가 속에 나오는 고향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을 경멸한다. 증오한다라고 쓰려다가 경멸한다라고 썼다. 내 고향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이다. 그 먼지 나는 거리에서 나는 자랐다. 그리고 나는 내 '고향'에서 길 하나 건너간 곳에 있는 회사에서 밥을 번다. 손바닥만한 도심의 공간이 내 한 생애의 공간이다. (중략)

고향에 집착하는 인간을 경멸한다는, 내 서두의 헛된 진술을 나는 이제 파기한다. 나는 속으로 운다. 나는 다시 쓰겠다. 나는 고향일 수 없는 고향에 마음 쓸리우면서 새롭게 고향을 세우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 고향 서울 종로구는 자동차와 먼지뿐이다. 고산자여 내 고향을 네 대동여지도 속에 넣어다오."

언젠가 다 털고 조용한 산골마을에 돌아가고 싶은데, 아무래도 '먹이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인간을 사랑하는 김훈 선생의 입장에서라면 그건 좀 비겁한 일이겠죠?

아참, 잘 지내시나요?

로드무비 2009-10-25 02:04   좋아요 0 | URL
언젠가 도시 생활에 신물이 나면 이곳으로 돌아와 살겠다던
부산대 사학과 학생(산복도로 길 위에서 만난)의 말이 좋았습니다.
산복도로 동네에서 바라본 야경도 정말 근사했고요.

<풍경과 상처>는 오래 전 참 좋아했던 글들이 묶인 책입니다.
그런데 이 제목으로 책이 다시 나온 줄 모르고 있었네요.

poptrash 님, 반갑습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오늘, 아니, 어제 매동마을 편은 못 봤습니다.
일요일엔 채널권이 없는지라... 꼭 챙겨볼랍니다.^^)




2009-10-25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5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9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9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1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남선희 2012-10-1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그립네요... 부산 떠난지 8.9년 정도 되어 가는데.. 영주동에서 17년 살았거든요..
이번에 부산 여행을 한번 갈려고 해요.. 옛추억도 떠울리고 제가 태어나 메리놀 병원 봉래초등학교 은하아파트 야경 전부 다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