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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아름다움
로버트 K. 존스톤 지음, 주종훈 옮김 / IVP / 2005년 8월
평점 :
구약의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한 구절로 요약된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도다.'(1장 8절)
인생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 언제 찾아들지 모르는 '병고'와 '죽음'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11장 9~10절)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다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원하는 일을 행하라니,
이 무슨 소린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하는 전도서의 메시지와 밀접한 영화들을
엄선하여 소개하고 있는 로버트 존스톤의 <허무한 아름다움>을 읽은 건 달포 전.
그 당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와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고장난 컴퓨터도 컴퓨터지만,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댔기 때문이다.
욕심이 생기는 사람과의 관계는 청산하고, 욕심이 나는 일은 미리 포기하는,
'게으름과 용기 없음'이 문제인 나 같은 사람에겐 자기기만이라고 할까 합리화라고 할까,
전도서의 그 모든 전언이 꿀처럼 달콤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어제 오후 <우디 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라는 책을 읽는데
<허무한 아름다움>에 소개된 영화 '범죄와 비행'이 나왔다.
우디 앨런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멋진 기억, 가장 포근한 기억, 가장 정겨운 기억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초콜릿케이크와 우유를 든든히 먹고
부모님은 여전히 잠들어 계신 사이 학교에 가느라 집을 나서는 모습이에요.'
(뉴요커의 페이소스, 212쪽)
물론 그의 발걸음은 학교가 아니라 맨해튼의 한 극장을 향한다.
우디 앨런의 책을 읽다가 몇십 년 전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졸이던 울엄마의
들큰한 감자볶음 냄새를 맡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허무한 아름다움>의 표지에는 '현대영화의 렌즈를 통해 본 전도서'라는 부제가 선명하다.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와,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
<펀치 드렁크 러브>는 마크 포스터 감독의 <몬스터 볼>과 함께 "모든 것이 헛되고 부질없다"는
전도서의 전언을 쪽지처럼 내 손에 쥐어주고 달아났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거머쥐려 애쓰는 부富와 성공을
감히 '잡동사니'라고 말하는 앨런 볼(<아메리칸 뷰티>의 시나리오 작가)은
어느 날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비닐봉지를 보며 인생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평화와 경이감을 느끼고 영화에 이 장면을 삽입했다고 한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듯한 빨간색 장미다발과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봉지의 적절한 대비라니!
1952년작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키루(生)>부터 시작해 2003년작 알렉산더 페인의
<어바웃 슈미트>까지, 전도서와 연관지어 그가 소개하는 열세 편의 영화들은
'인생의 헛됨에 대한 시적 고찰에서 시작해, 소중하지만 덧없는 인생의 아름다움'이
전도서의 지혜처럼 녹아 있는 영화들로 꼽기에 손색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