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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 정끝별의 밥시 이야기
정끝별 지음, 금동원 그림 / 마음의숲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홀로 되어
자식 같은 천둥지기 논 몇 다랑이
붙여먹고 사는 홍천댁
저녁 이슥토록
비바람에 날린 못자리의 비닐
씌워주고 돌아와
식은 밥 한 덩이
산나물 무침 한 접시
쥐코밥상에 올려놓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흙물 든 두 손 비비며
(고진하 詩 '쥐코밥상' 전문, 163쪽)
시인이자 평론가인 정끝별이 밥시들을 한 군데 모아
한 편 한 편에 알뜰하게 자신의 단상을 곁들였다.
그런데 어째 몇몇 찬들은 신통찮다.
내 입맛이 바뀌었나?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사꾼들이 먼저
밥이나 먹고 보자며 자장면집으로 몰려가자
그걸 지켜보던 밥집 주인 젊은 대머리가
저런, 저런, 쌀값 아직 한참은 더 떨어져야 돼
쌀농사 지키자고 데모하는 작자들이
밥은 안 먹고 뭐! 수입밀가루를 처먹어?
에라 이 화상들아
똥폼이나 잡지 말든지
나는 그 말 듣고 내 마음 일주문을 부숴버렸다.
(이중기 詩 '그 말이 가슴을 쳤다' 전문, 58쪽)
글쎄, 밥집 주인으로서야 생계가 달린 일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지만
그 말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시인은 마음의 일주문을 부숴버렸다느니
가슴을 쳤다느니 수선을 떨까?
우리 쌀 지키자고 데모하러 갔다가 자장면을 사먹을 수도 있는 거고
칼국수든 쫄면이든 먹고 싶은 걸 사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참, 시인을 이해 못할 것도 없겠다.
죽이 됐든 밥이 됐든 가슴을 쳐야 시가 한 편 나오는 거라면.
흰쌀밥을 보고 별이라느니 꽃이라느니 감탄하는 시들이 더이상 감탄스럽지 않다.
쥐코밥상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나물 한두 가지에 밥 한 그릇의 밥상'이다.
분식집에서 혼자 사나운 얼굴로 라면과 김밥과 만두를 시켜
혼자 우적우적 먹는 여자를 놀라서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그 옆에서 친구들과 후룩후룩 낄낄 해장라면을 먹으며......
그런데 며칠 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바로 그 여자가 아닌가.
어쩌다 내가 이 꼴이 되었을까!
천양희 시인이 웃으며 쪽지를 내민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詩 '밥' 106쪽)
나는 읽는다 너는 가고
네가 남긴 책갈피에서
머리카락이
아침 국그릇에 떨어졌다
호수처럼 국물이
출렁, 하더니
곧 잠잠해졌다
(이성미 詩 '추모합니다' 전문, 70쪽)
7, 8년 전, 친한 후배가 집에 들렀는데 서울대 병원에 병문안을 가야 한다며 일찍 일어섰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윤림 시인이란다.
그 며칠 후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맛없는 인생을 차려놓은 식탁에 /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시. 총 4행.)
가고 없는 누군가의 책갈피에서 머리카락이 툭 떨어진 것처럼, 내 국그릇에,
가슴이 철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