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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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랍시고 남편에게 한때 "남양주의 공선옥"을 사칭한 적이 있다.
작년에 이사를 오면서 사는 동네가 바뀐 김에 이제 또 누구를 사칭해 볼까 궁리해 보지만
적당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서글픈 건 누군가 잘 나가는 사람의 이름을 갖다붙이면 내 상황이
'유머'나 '재치'가 아니라 '주책바가지'가 되어버린다는 사실.
흰머리를 더이상 새치라고 우길 수 없는 날이 당도하고야 만 것이다.

--아침에 식구들이 나가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는 쌀통 안에 숨겨뒀던 소주를 꺼낸다.
아무 감정 없이 아침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소주를 마신다.
아침햇살이 부드럽게 거실로 스며드는 그 시간에 소주는 내 가슴 안으로 스미는 것이다.

('79년의 아이' 197쪽)

'맛술 조심'이라는 제목으로 언젠가 페이퍼도 하나 썼지만,
저녁 메뉴로 닭매운탕이나 돼지불고기를 하려고 고기에 소주를 붓다가
그 맛술을 한 모금 맛본다는 것이 그만 거나한 술상으로 이어진 경험이 몇 번 있다.
 "눈부신 햇살이 비쳐준대도 내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하는
'이치현과 벗님들'의 노래 가사가 절로 생각나는 인용구가 아닐 수 없다.

감출 수 없는 주름살이며 거친 피부, 흐린 눈 때문에라도 '아침 햇살'이라면
도망부터 가고 싶은, 그것이 꼭 껍데기의 문제만이 아닌, 단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뿐이지
두렵고 스산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다.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열심히 사노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서방이나 새끼들은 이 모양이고, 도대체 내 꼴은 이게 뭐란 말인가.
삶은 여전히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아도 최소한의 먹을 것이 늘 입에 들어왔던 나는
공선옥의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왜 이리 정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들과 다르게 약아빠져서 좀처럼 남에게 먼저 마음을 열지 않았던 나의 삶이
문득 뒤돌아봐지고.

글을 쓴답시고 노트북과 책, 좋아하는 음반만  달랑 챙겨
도시를 떠나 면소재지의  한적한 별장에 기어든 남자가 그 곳의 단 두 명 처녀인 
간호조무사 둘을 차례로 후리는 장면('명랑한 밤길')도
작가는 그럴 수 없이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 곁에 있어주>라는 싱가포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영화관 로비에서
웬 묘령의 여성과 나란히 서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중견 소설가와 마주친 적이 있다.
내게는 그 소설 속 남자나 극장에서 만난 소설가나 
명랑한 밤길의 소녀나 그 귀부인이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공선옥은 이 소설집에서 경제적으로 보면 형편이 어려운,
나이로 치면 이른 폐경 직전 여성들의 신산한 삶이나 마음의 풍경을
('폐경 전야'라는 제목의 단편도 있다) 
덤덤한 필치로 보여주고 있는데 몇 걸음 뚝 떨어져서 보는 관찰자의 시점이 아니라
자신의 사는 꼴이나 누추한 마음의 지경으로 거의 동화된 것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바로 나의 현실(이나 미래)인 듯 몰입하게 한다.
흥분하지 않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꼬집는 솜씨도 놀랍고.

어제 오후,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이 소설집을 덮자마자 나는 혹시 싶어
쌀통 속을 휘저어 보았다. 
쌀도 거의 바닥이 나서 휘젓고 말고 할 것도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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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1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쌀통 속의 소주라.

그런데, 로드님 서재 벽지가 근사해졌군요.(웃음)

로드무비 2007-12-13 15:31   좋아요 0 | URL
L-SHIN 님, 알라딘에서 얻어온 저 벽지 이름이 '선셋'이랍니다.^^
압정으로 붙인 영화 전단지와 잘 어울리죠?

비로그인 2007-12-13 20:42   좋아요 0 | URL
네, 너무 근사합니다. ^^

로드무비 2007-12-14 14:59   좋아요 0 | URL
L-SHIN 님 방만큼이야 하겠습니까.^^

2007-12-13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3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7-12-13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가 애칭을 지어드려볼게요.
알라딘의 사치에상 (카모메식당의 주인장) ^--^
비록 사치에 상보다는 덜렁거리시는 거 같지만 (ㅋㅋ), 그 은근한 카리스마와 대장 다운 모습이 저에겐 로드무비님을 닮았어요.

로드무비 2007-12-13 16:32   좋아요 0 | URL
치니 님, 말씀은 고맙지만, 사치에가 아니라 전 미도리라니까요.^^
그리고 제가 은제 덜렁거렸어요?==3==3==3(몸이 무거워서.)

치니 2007-12-13 17:51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미도리도 ㅋㅋ 좀 닮았어요.
왠지 로드무비님도 독수리오형제 같은 노래를, 아니 어떤 시를, 그렇게 줄줄 읊을 것만 같은...

로드무비 2007-12-13 23:05   좋아요 0 | URL
딱 미도리라니까 그러시네.ㅎㅎ
전 독수리오형제 노래 몰라요.
황금박쥐 첫머리는 압니다.^^

2007-12-13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3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3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7-12-1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공선옥의 작품은 사야 한다는 의무감에 닥치는대로 읽어댔는데... 지지리 궁상 떠는 꼬라지에 어느날 비위가 확~ 상하더군요. 나 사는 것이나 그녀가 사는 것이나 오십보 백보 같아서요. 그 후 손에서 놓았는데, 이제 다시 봐줘야 할 것 같은 맘이 듭니다. 님 리뷰 덕분에 ^^ 감사!

로드무비 2007-12-13 22:58   좋아요 0 | URL
순오기 님, 사줘야 한다거나 봐줘야 한다거나
그런 표현은 조금 거시기한 것 아닌가요.ㅎㅎ
전 여유가 없어서 마음 가는 쪽 책만 읽습니다.
고맙다고 하시니 저도 덩달아 즐겁긴 하지만요.^^

순오기 2007-12-14 10:49   좋아요 0 | URL
옙, 제가 실수했네요. '줘' 지웠어요 ^^

로드무비 2007-12-14 14:58   좋아요 0 | URL
아이코, 실수라고 할 것까지야.=3=3
순오기 님 섬세하시군요.
고맙습니다.^^

Mephistopheles 2007-12-14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를 보면서 "아 속삭이듯 다가와 나를 사랑한다고~~"흥얼거리고 있습니다.^^

로드무비 2007-12-14 10:15   좋아요 0 | URL
"아 헤어지며 하는 말, 나를 잊으라고~ "
메피스토 님, 그런데 저 가사 맞아요?
<사랑의 슬픔>이 듣고 싶네요.
이치현과 벗님들 노래는 좋아하는데 가사가 늘 오락가락합니다.^^

rainy 2007-12-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쌀통.. 우리집엔 쌀통도 없더라(ㅋㅋ)는..
잘 지내시죠? 오랜만..
공선옥 읽어야지 , 박완서도 읽어야지,
행복한 계획 세우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세상은 넓고 위로받을 대상은 많다!!!
따끈하고 맛있는 점심 드세요 ^^

로드무비 2007-12-14 14:56   좋아요 0 | URL
rainy 님, 몇 달 전 양철통으로 하나 샀더니 꽤나 요긴하더라고요.
님도 잘 지내시죠?
점심 맛있게 드셨는지요?
어쩌다 보니 전 아직 못 먹었습니다.
위로받을 대상이 많으시다니 다행.
그 중에 하나가 저의 리뷰라니 기분 좋습니다.^^

2007-12-14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4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2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31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