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읽은 이청해의 어느 소설 대목은 잊을 만하면 가끔 나타나 나를 실소케 한다.
무더운 여름날 무위의 고독과 우울에 몸을 맡기고 혼자 산길을 걷는 여성이 있다.
심각한 얼굴의 장병들을 잔뜩 태운 탱크와 군용트럭이 지나간다.

이 더위에 중요한 작전수행중인가?
좋겠다, 저들은 함께라서.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
트럭이 일으키고 간 흙먼지를 피해 그녀는 비칠비칠 산길을 걷는다.

얼마 후 그녀가 목도한 것은 계곡에서 등목을 하고 물장구를 치는 장병들의 모습.
중요한 작전수행중인 줄 알았더니 물장구......
"혹시, 사람들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닌가."
그녀는 화들짝 놀란다. 인생의 베일을 한 꺼풀 벗긴 느낌.

이사 간 집에 찾아갔더니 김치도 없이 카레라이스만 달랑 내놓았던 친구가 있었다.
희한한 것이 그런 행동조차 주변 사람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 
독특한 미모와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정사각형의 톱밥상자를 스무 개쯤 쌓아놓고 책들을 쑤셔넣은 것이 서가였는데
한쪽 구석에 숨어 있는 멋진 은제 보석함이 눈에 띄었다.

"반지도 하나 없는 사람이, 나처럼 플라스틱 쪼가리들을 보석이라고 넣어놓았남?"

웃으며 뚜껑을 열었더니 이상한 잔해가......
언제적 것인지 모르는 그녀의 발 뒤꿈치 굳은살들은 투명함을 잃어버리고
말라 비틀어졌다.

"어쩐지 버리기가 싫더라고요."

민망하고 어색한 웃음.
그런 표정은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조금 더 가깝게 여겨졌다.

내가 오기 며칠 전 시인과 소설가, 화가인 친구들이 놀러왔단다.
한 시인과 나이를 떠나 친구가 되면서, 그녀는 예술가 친구들을 무더기로 얻게 되었다.
눈빛이 좀 무서운 소설가 김 모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문짝과 서랍을
열어보았단다.
심지어는 안방 장롱의 속옷서랍까지.
"미친 것 아닌가 싶어 섬뜩하더라고요. 두꺼비집까지 열어봤다면 말 다했죠."

몇 년 뒤, 나는 그가 그동안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함부로 열어제꼈던
수많은 서랍들 속을 한 권의 책을 통하여 구경할 수 있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프리즘을 통하여 그 모든 다양한 빛깔들을 굴절시키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발가벗겨졌다.
이해가 안 되는 건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

얼마 전 친한 사람이 함께 일해 보라며 누군가를 전화로 연결시켜 주었다.
카페에서 얼굴 마주보고 인사 나누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장면이 어색해서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어느 대낮에 병에 든 오렌지주스 세트를 덜렁거리며 집으로 왔다.

알고봤더니 부동산으로 돈을 좀 벌어 재테크 관련 책을 내보겠다고
출판사를 차린 케이스.
알고봤더니 그가 바라는 건 최소한의 경비로 교정을 딱 한 번만 보고
일정에 맞춰 후닥닥 책을 내는 것.
그동안 나온 두 권의 책을 훑어봤더니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엉망이었다.
신생출판사와 손잡고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나마라도 안하는 것보단 낫지 않아?  당분간 책값은 되잖아."
그를 보내고 돌아와서 나는 종이박스에서 주스를 꺼내고
냉장고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당분간 책값'이라고 시건방을 떨었지만, 그때 내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두꺼운 병 속의 오렌지주스 색이 그렇게나 선명하고 예쁜 것이
조금 위로가 되었던가 말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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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7-07-1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서재에 맨 처음 들어왔을때, 전세보증금 얘기가 있었어요.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한 이야기'라는 카테고리 제목이 딱이다 싶었는데, 오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로드무비 2007-07-12 14:59   좋아요 0 | URL
수단 님, 김서령 소설 읽고 너구리 속의 다시마 조각 하나에 줄줄이 생각나더군요.
이청해의 소설부터 오렌지주스까지.ㅎㅎ
이 카테고리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제 방 가끔 들른다고 하셨죠?
다행 + 흐뭇.^^

nada 2007-07-1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은살 상자는 조금 무서워요. >.<

로드무비 2007-07-12 14:51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 님, 사람들의 서랍 속엔 별 게 다 들어 있죠.
굳은살 정도가 대수예요?=3=3=3

2007-07-12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3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2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3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7-1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전 이 페이퍼 읽을 때마다 섬뜩,해요.
가볍게 처리하시는 삶의 무게에.. 오늘, 제 서랍들을 하나씩 열어 살펴보고
싶어져요. 정리 안 하고 사는데... 제맘의 서랍들도 열어봐야겠어요.
이 페이퍼를 좋아하는 한 사람.^^

로드무비 2007-07-13 12:44   좋아요 0 | URL
혜경 님, 전 하도 엉망진창이어서 처박아 두고 자꾸 새 서랍만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