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땀냄새 정도가 아니라 자기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20년 전, 조선소 용접공들.
(설마, 지금은 좀 나아졌겠지?)

그들의 작업복 등판에 '이른 봄 피어나기 시작해 늦가을이 되어서야 서러이 지는'  허연 소금꽃.
그 조선소 용접공이었던 김진숙은 아침 조회시간마다 동료들의 등판에 주렁주렁 피는
꽃을 지켜보았다. 자신도 소금꽃들을 등짝에 가득 매달고.
며칠 전, 책 제목에 대한 간략한 소개만 듣고 바로 이 책을 주문했다.

-- 난 아직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
인간이 돈에 왕따 당하는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9쪽, 책을 내며)

'아직도'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홀로 노동자의 삶을 시작한 김진숙.
공장이라 할 것도 없는 한복 금박을 박는 가내수공업 골방에서 시작해
대우실업, 한진중공업(전 대한조선공사) 등 큰 규모의 회사로 옮겼으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2006년 부산지하철 매표소 해고노동자 결의대회에서 그가 직접 써서 낭송한
'우리가 단지 역사를 추억할 때  스스로 역사가 되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처럼,
많은 이들이 운동에 잠시 투신했던 추억을 팔아먹으며 살고 있을 때도
그는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스스로 역사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공장에서 나온 그가 땡볕 아래 해운대 백사장을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을 팔 때
나는 단발머리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그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수배자로 쫓기며 새벽에 어느 집 대문간의 제삿밥을 주워 먹고 있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시립도서관과 재개봉관이나 들락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성지곡수원지 나무 그늘 밑에 쪼그리고 앉아 그가 유인물을 씹어 삼키고 있을 때
난 무얼 하고 있었을까?
(반성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인데 살던 동네가 겹치다 보니
절로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고 종내에는 얼굴이 뜨뜻해졌다.)

제목은 가물가물한데 여학교 때 단체로 본 영화가 생각난다.
울산의 한 방직공장과 기숙사, 야간학교를 무대로 낮밤없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산업전사 소녀들이 주인공이었다.
소녀들의 방은 좁았지만 로션 냄새가 향긋했고 휴일엔 한껏 멋을 내고 시내까지 진출하여
돈을 모아 통닭을 뜯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 책에서처럼, 방송통신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재직증명서를 떼러 온 소녀에게
"방통고 나온다고 니 인생에 꽃이 필 것 같나?"
하고 면전에서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인간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영화보다 현실이 더 기막히다니 이럴 수가!

--내가 거기(대공분실)서 살아 나온 게 견딜 수 없는 자책이었던 적도 있었다.
1년 뒤 박종철 학생이 그렇게 죽어 나왔을 때, 이철규, 이내창 그들이
내가 그랬음직한 모습으로 저수지에서 떠올랐을 때......
그리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시신조차 건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새빨간 눈빛들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바탕 장대비 내리는 툇마루에서 꾸었던 어릴 적 악몽처럼 지나가는 말투로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간혹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보면 사람들은 감동적이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31쪽)

하긴, '감동적'이라는 말을 그동안 얼마나 남발했는지 그만큼 안 감동적인 말도 드물 것이다.
책의 맨 마지막 '여섯' 마당에 묶인 그의 가족사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벌어졌던 입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절로 다물어졌다.

--잊고 있었다는 듯 큰언니가 울기 시작했다.
가게를 보던 조카가 "엄마, 와사비 얼마야?"라고 묻는 전화가 오면
"큰 거 짝은 거?" 묻고는 "짝은 건 820원." 대답하고는 다시 우는 사이......(244쪽)

코끝을 찡하게 하는 와사비보다 독한 저자의 살아온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가 직접 만난 몇몇 노동자들의 인터뷰 기사, 또 박창수, 김주익, 배달호 등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또 모르는 열사들을 보내며 쓴 추모사까지
가슴을 두드리지 않는 글은 한 편도 없었다.

출판 의사를 묻자, 책으로 만들기 위해 나무들을 벨 만큼 자신의 이야기가 가치가 있는 걸까,
물었다는 저자.
책 잘 읽은 기념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꼭 심겠다, 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osa 2007-06-0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분께 어쩌다가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대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바꾸고 싶었던 비인간적인 7,80년대의 노동환경, 사람만 바뀌었더라고. 한국인들에서 이주노동자들로 사람만 바뀐 채 환경은 여전하더라고. 그 분은 그래서 이주노동자들 곁으로 돌아가셨답니다. 조선소 내의 환경은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어쩌면 별로 바뀌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가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로드무비 2007-06-03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제도의 명칭이든 구체적인 내용이든 허울좋은 변화일 때가 많습니다.
비인간적인 것으로 치면 지금이 더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설마 여벌의 작업복은 지급되고 있겠지요.
식품이며 물자가 넘치는 세상이다 보니 그런 정도의 개선이나마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rosa 님도 읽고 아시겠지만, 그때, 차마 상상할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 아니었습니까.

2007-06-04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rosa 2007-06-0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가끔씩은 과거보다 지금이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하는 생각은 한답니다. 여벌의 작업복에 대해서도 그렇게 확신할 수 없었답니다. 언젠가 한국의 굴지의 대기업에서 정규직과 하청노동자의 출입증 카드가 다르고, 밥 먹는 시간대도 다르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남긴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6-0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막연한 기대(최소한의 것에 대한)를 배반하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또 얼마나 많을지 모를 일이지요.
집집마다 음식물 쓰레기통이 저렇게 넘쳐나니
굶어 죽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알고보면 또 아니잖아요.
도처에 뚫린 구멍들.
혹, 여벌의 작업복도 모를 일이네요.
저야말로 rosa 님께 감사드립니다.^^

네꼬 2007-06-0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한 진심이 묻어나는 글이라, 닫지 못하고 한참 있었어요. 인용한 글이 참 먹먹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waits 2007-06-04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보관함에 담아놓고 언제 주문할까 하던 책이었는데, 로드무비님이 먼저 읽으시고 리뷰까지 써주시니 반갑고 고마워요. 님의 리뷰가 이 책 판매고에도 적잖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로드무비 2007-06-05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 님, 호호, 판매고에 적잖이 도움이 되겠지요.=3=3=3
저만 해도 두어 권 더 살 예정이니 말입니다.^^

네꼬 님, 제가 왜 엉뚱하게 와사비 어쩌고 하는 대목을 넣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2007-06-06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08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키타이프 2007-06-08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이라는 말을 얼마나 남발했는지 그만큼 안 감동적인 말도 드물다는 말씀에 귀기울입니다.

로드무비 2007-06-1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안 감동적'이라니 표현이 좀 어색하죠?^^

나무 심기 요원하니 님, 컴이 자주 다운되어 댓글 쓰기도 어렵습니다.
가르쳐주신 주소는 수첩에 메모해 둘게요.
경비아저씨께 이번에도 구박을 받으셨는지?=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