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식당 차림표에는
열 가지가 넘는 메뉴가 준비되어 있고
가격 또한 저렴한 편인데
가령, 낙지볶음은 한 접시에 기껏 오천 원이다

홀 한쪽에는
주방으로 쓰는 싱크대와 장탁자가 있고
식탁은 세 개
의자는 열세 개 있다

손님은 하루 평균 여남은 명인데,
어쩌다 술손님을 한 팀 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주인아줌마는 기꺼이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그 식당이
텅, 텅, 비어 있던 어느 날
나는 거기서 짠 국밥 한 그릇을
신김치와 콩나물무침으로 먹은 적 있다

어쩌다 이렇게 조용한 주택가 길목에
이런 식당이 허술하게 문을 열고 있담,
생각하는 것이 상식, 그 상식을
보기좋게 뒤집으며 식당은 거기 있는 셈인데......
한번은 세무서에서 나온 젊은 주사가
조용히 업종 전환을 권유한 바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식당 아줌마는 늘 준비해 놓은 반찬 중에서
날짜를 못 이겨 상하기 직전인 것만으로
자신의 식사를 해결하곤 하는데,
그 처연한 혼자만의 식사를
그 앞을 지나다니며 무심히 몇번 보았다

삶이란 게 그런 것은 아닌가,
쉬어빠지기 직전의 음식을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느릿느릿 씹어대는, 어떤 말로는 다 못할
무심함 같은 그런 나날들의 이어짐......

                                    -- 시집 <물방울 무덤> 중에서, 2007년, 창비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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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간극장에서는 혼자서 환경미화원 일을 하며 어린 세 자매를 키우는
씩씩한 젊은 여인의 생활을 보여주었다.
갓 서른.
자신의 직업도 처지도, 그녀에겐 도무지 당당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구역에서 죽은고양이를 만난다.
어떤 더러운 것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치우는 그이지만,
죽은 동물의 몸뚱이는 아킬레스건.
망설이다 울며 부들부들 떨며 진저리를 치며 그 무서운 것을 치우는 그녀를 보며
함께 가슴 졸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산다는 건  자신에게 가장 무서운 것을 번쩍 들어 치울 수 있기까지의
지난한 단련, 혹은 수행 과정이 아닐까?

낡은 '잠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소읍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던
엄원태 시인의 시집이 12년 만에 나왔다.
그의 정다운 눈길과 발길은 여전히 그 소읍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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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2-1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속으로 달리는 일상생활에서도 그래도 가끔은 한턴씩 쉬어주면서
사소한 것일지라도 느끼고 뒤돌아보는 생활을 지향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더라구요...^^

2007-02-10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7-02-10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일이 삶을 지속하는 일 같습니다.

로드무비 2007-02-1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어빠지기 직전의 음식엔 토마토 케첩을 듬뿍 뿌리면 최고지요.
국물 쪽 음식이라면 마늘과 고춧가루를 팍팍.
그런 에너지가 없어서 버리는 쪽입니다. 저는 가차없이.....

물만두 님,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고, 그죠?

뭐라 말할 수 없이 님, 고달프고 울적하고,
어제 저는 <느낌으로 아는 것들>이란 책을 읽고 원기를 좀 회복했습니다.^^
(리뷰 쓸까봐요.)

메피스토 님, 광속으로 달려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전 한 번이라도 꼭 그렇게 살아보고 싶군요.=3=3=3
(님은 한 턴 아니라 두 턴씩 쉬어주시는 분 같은데요? 가끔!^^)

에로이카 2007-02-12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도, 인간극장 얘기도... 참.. 가슴 깊이 남습니다... 혼자 밥 먹는 일이 많은 저는... 볼이 터져라 밥을 쳐넣고 눈물 흘리는 게 가장 서러운 눈물이라고 생각하는 저는... 시인의 시각이 다소 부담스럽습니다... "그 처연한 혼자만의 식사"라니... 혼자 먹는 밥도 오래 먹다 보면 괜찮은데 말이예요... 어쩌면 시인이 '무심히' 몇번 보았다고 썼지만, 그 아주머니는 그 눈길에 오래 노출되고 싶지 않아 허겁지겁 먹었을지도 모를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괜한 자기동일시입니다.. 헤헤..

로드무비 2007-02-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제가 새끼손톱만한 금붕어도 죽으면 못 건져올리는
위인이거든요.
그러니 고양이는......으으으......
사람마다 속으로 무서워하는 게 다 다를 것이고.

그리고, =3 혼자 먹는 밥이 뭐 어때서요.
시인이 그 아줌마의 밥상을 오해했을 수도 있는 일이고.
혼자 먹는 밥도 맛나고 여럿이 먹는 밥도 맛나고,
그것이 저는 도리어 문제여라.^^


2007-02-12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2-12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2-12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1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없는 말, 전화, 참 딜레마지요.
현명하게 잘 판단하시길.
반신욕 끝났죠?
지금 반짝반짝 무지 예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