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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라닌(solanin) - 감자의 싹에 있다는 독.
목숨을 뺏을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은데 '솔라닌'은 배탈 등 갖가지 증상을 일으킨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고독을
이 만화는 감자의 싹과 독(毒)에 빗대었다.
겉모습만 보면 넙데데하고, 꾀죄죄하고, 나사가 한 개 빠진 것 같은 남녀 주인공들이
멋진 바닷가가 아니고 동네의 개천 가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제각각 쪼그리고 앉아 있다.(표지)
다행히 고무보트가 뜰 만큼 제법 규모가 큰 하천 같은 개천.
<저녁뜸의 거리> 이후 표지만으로 단번에 나를 사로잡은 만화인데
솔직히 <저녁뜸의 거리>보다 더 마음에 든다.
청춘의 하릴없음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낼 수 없으리라.
생각해 보면 푸른 바다를 꿈꾸며 동네의 냄새 나는 개천가를 배회하는 것이
대부분 청춘들의 모습 아니던가.
좋게 말해 개성적인 외모(나쁘게 말하면 다소 떨어지는)에 출중한 재능도 배경도
구체적인 꿈도 없이 호구지책으로서의 밥벌이만 간신히 하고 있는 주인공들.
그나마, 유부남 부장의 호된 질타와 추파를 동시에 받던 날, 주인공 메이코는
"기분이 너무 엿 같아서 조퇴하겠습니다!"하고 사무실을 뛰어나와서는 그 길로 사표를 낸다.
열아홉에 만나 스물셋, 애인이라는 위치에서 기둥서방 비슷한 것으로 전락한 애인 다네다는
잡지에 일러스트를 그려 자신의 용돈 정도나 벌면서, 애들 장난 같은 밴드 활동을 하는 프리터.
재능도 그렇고 마음자리도, 믿을 수 없이 시시한 것이 바로 자기자신이고 인생이라는 걸
깨닫는다고 해서 그 당장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인내도 어른의 바로미터는 아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같은 건 어떤 경우 말장난에 불과하다.
인생에는 일보후퇴로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는 순간이 있다.
"저어, 메이코. 만약에 우리 부자 되면 아까 그 장어요리 먹으러 가자."
메이코의 엄마가 상경하여 인사를 하고 점심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
다네다가 메이코의 손을 잡으며 씩씩하게 말한다.
연인의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뜬구름 잡는 약속들에 비하면 얼마나 진솔한지.
서면의 동보극장에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적이 있다.
"<내 마음의 풍차>를 꼭 보고 싶은데, 미성년자 관람불가인데,
너무너무 보고 싶으니 저 좀 몰래 입장시켜 주시면 안 되나요? 네에?"
최인호의 원작에 얼마나 열광했던지, 그것이 내겐 일생의 용기를 건 최초의 전화였다.
약간 병든 감수성.
나중에 보니 작가는 '길'이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시시하게 살다가 시시하게 죽어간다.
이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나도 일찍부터 감은 잡고 있었지만,
최근에야 조금씩 구체적으로 납득하기 시작했다.
-- 잠깐잠깐. 우리들의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있을까?
아마 없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내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제2권 16쪽)
-- 인간은 살아가는 것만도 몹시 힘들고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 거야.(201쪽)
일상의 고린내가 물씬한 생생한 그림은 물론이고, 별 대수로울 것 없는 대사들까지
가슴 속에 콕콕 와 박히는 것도 이 만화의 강점.
***제목의 '호박'은 나나난 키리코의 만화 <호박과 마요네즈>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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