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바다를 꿈꾸는 건 일상이다. 바다를 떠올리기만 해도 충만해지는 듯하다. 늘 서성이던 그곳에 터를 잡고 살고 싶다는 바람을 키운다. 바다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부서지는 파도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가진 게 없는 생이 부끄럽지도 않다. 해가 지는 풍경을 마주하며 나를 돌아보는 순간, 뜨거운 황홀감에 빠져든다. 예전과 다르게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는 나는 행복하다. 그러니 자연의 비밀을 아는 사람 김영갑의 생은 행복했을 것이다.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글이 아닌 사진으로 익숙한 책이다. 내게는 그랬다. 사진을 통해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보았고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려 했다. 사진으로 들어가 안갯속을 걷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180쪽)

 사진과 함께 글을 읽기는 처음이다. 사진을 업으로 알고 혼자 살다가 루게릭으로 투병하다 생을 마감했고 갤러리 ‘두모악’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제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꿈꾸었는지는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일기와 다를 바 없는 글을 천천히 읽으면서 그가 찍은 제주의 풍경을 보니 이전과 다른 사진이 되었다. 자신의 전부를 걸만한 대상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불꽃같은 삶에 후회는 없을 것이다. 누가 뭐래든 자신을 지키며 살고자 했던 생을 누군가는 고단하고 비루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행복하다 말한다. 같은 듯 다른 사진, 뭐라 말을 거드는 듯 귀를 기울이게 되는 사진, 복잡한 생각을 말끔하게 걷어내는 풍경,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시선을 빨아들인 사진은 아름답고 아름답다. 어렵고 힘겹게 찍은 사진을 나는 이렇게 쉽고 간편하게 봐도 괜찮은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섬이라는 공간에서 온몸으로 자연과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김영갑은 이방인이며, 경계인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얻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초를 겪고도 그곳에 머물고 싶었던 건 제주가 그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간첩신고를 받고 경찰서에 오가고 암실로 쓸 수 있는 공간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사람들에게 애원을 해야 했던 시간들, 모두가 사진을 찍고자 하는 그의 간절함으로 상쇄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제주를 사랑했는지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연인을 바라보듯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뜨거운지 말이다.   

 장마철이면 안개 짙은 날 치자꽃 향기에 취해 마시는 커피 맛은 유별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 보름달을 보면서 마시는 차 맛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80쪽)

 

 마라도는 참으로 아름다워서 좋다. 섬 안에서 일출과 일몰을 다 볼 수 있어서 좋다. 십 분만 걸으면 동서남북 원하는 곳에 가 닿을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은 보고 또 보아도 볼 때마다 새롭다. 사랑하는 연인처럼 늘 섬이 그리웠다. (152쪽)

타인의 이해를 바라지 않고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천국이자 낙원이다. ​루게릭 진단을 받고 염원했던 갤러리를 오하며 남은 생을 그곳에서 평온하게 살았던 그가 남긴 풍경은 삶이었다. 누군가는 외롭고 고독한 예술가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그의 글과 사진을 통해 행복의 맛을 맛볼 수 있어 고맙다. 분주한 일상을 떠나 한적한 휴가지를 찾지만 아직 떠나지 못한 이들에게 쉼과 평화를 전해준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서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 (19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건 지독한 착각이며 오만이다.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한계를 느낀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이의 생일에 선물을 고르다 나는 주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문자를 했고 나는 의문이 아닌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미나토 나가에의 『리버스』는 그런 소설이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란 충격적인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후카세’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좋은 학벌을 지녔지만 작은 회사에 다닌다. 사무용품을 배달하고 수리한다. 고등학교까지 절친은 없었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맛있는 커피가 아니라면 직장 동료나 세미나 친구들이 후카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커피는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였고 위로였다. 그런 후카세가 살인자라니. 그는 가면을 쓴 잔혹한 사이코패스란 말인가?

 

 남자친구가 살인자라는 편지를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찰에 신고하거나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이다. ‘미호코’는 후자를 택한다. 후카세는 3년 전 세미나 동기들과 놀러 갔던 일과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나눈 친구가 사고로 죽은 일을 들려준다. 운이 나빴던 사고였지 살인은 아니었다. 미호코와는 단골 커피가게에서 만난 연인으로 발전했다. 후카세에게는 처음 사귄 여자친구였다. 그러나 미호코에게 날아온 편지로 인해 둘의 관계는 깨지고 만다.

 

 3년 전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심한 후카세에게는 네 명이 세미나 동기가 있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항상 당당한 ‘무라이’, 교사가 될 거라는 확신에 찬 ‘아사미’, 모임의 리더라 할 수 있는 만능 운동꾼 ‘다니하라’, 무슨 일이든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지닌 ‘히로사와’. 후카세는 히로사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를 진정한 친구로 여겼다. 모두가 즐겁게 떠난 여행에서 히로사와는 죽었고 나머지 네 명은 그날의 음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숨기는 사실이 있다는 게 곧 죄가 있다는 증거야.’ (124쪽)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아사미를 일적으로 만날 뿐 무라이와 아사미와는 연락을 끊고 지낸다. 그런데 나머지 세 명에게도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아사미는 자동차에 전단지로, 무라이는 아버지의 선거 사무실로, 다니하라는 선로 위에서 죽을 뻔했다. 누가 그런 일을 벌였을까, 히로사와의 부모님이 배후에 있는 건 아닐까. 후카세는 자신이 조사하겠다며 히로사와의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몰랐던 히로시와의 여러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안다고 믿었지만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좋아하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조차 말이다. 그리고 밝혀지는 놀라운 진실.

 

   ‘기다란 선 위에 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84쪽)

 

 소설은 살인과 복수에 초점을 맞추는 듯 보였지만 관계와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후카세가 히로시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묘한 감동을 불러온다. 고향에서 보내온 꿀을 커피에 타서 먹었던 시간을 추억하고 진실된 우정을 나눈 히로시와를 그리워하는 후카세. 커피를 마시며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다. 마지막 반전의 한 문장마저 독하고 진한 커피의 맛으로 다가오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까지 내렸던 비가 그쳤다. 이번에는 일기예보가 맞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빗나갔다. 아직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있다. 자꾸 팔뚝을 쓸어내린다. 겉옷을 입어야겠다. 꼭꼭 닫았던 창문을 여니 맑고 투명한 건 아니지만 세수를 한 아이의 얼굴처럼 하늘은 싱그럽다. 이웃 님의 글에서 본 빨간 홍옥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그 붉은빛이 고와서 오래도록 곁에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우리 집 냉장고에는 홍옥이 없다. 사과도 없다. 시들어진 포도는 갈아서 체어 걸러 마셨다. 그곳에 포도가 있었다는 걸 잊지 않았지만 이제 포도를 먹는 계절이 아닌 것이다. 언제부터 포도는 여름 과일이 되었을까?

 

 10월의 마지막 밤까지 23일이 남았다. 뜬금없는 말이다. 벌써 10월의 여덟 번째 날이라는 게 놀랍다. 10월은 좀 조급해지는 것 같다. 올해의 시간이 세 달 정도만 남았다는 건 깜빡이는 신호등을 빠르게 건너야 하는 순간처럼 불안하다. 다음 신호등에 건너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서글픔 같은 것이랄까.

 

 아침이 되었다고 느끼는 시각도 점점 늦어지는 대신 밤이 되었다는 신호는 빨리 온다. 깊고 고요한 밤의 결을 매만지는 계절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시집이 더욱 끌린다. 시를 읽기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할까. 전화기에 대고 연인에게 짧은 시를 들려줘도 좋은 밤. 허수경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가을을 닮았다.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가을을 위로하는 시집처럼 다가온다.

 

 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 / 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 퉁퉁 부은 발에 시퍼렇게 청태가 끼어 / 빛이 되는 건 천체의 일이겠지요 //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발이 부은 가을 저녁, 일부)

 

 한 권의 시집을 온전히 읽는 가을이라면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가을일 것이다. 그리고 한 권의 소설까지. 읽기도 전에 나는 이 소설에 반해버렸다. 컨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 아름다운 우정과 소통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노년의 삶은 어떤 빛일까. 붉은 홍옥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들어진 포도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버려지지 않는 포도. 누군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알 수 없는 우정을 선물 받는 기분일 것이다. 그 누군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이바 2016-10-0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우리 영혼은』, 저도 기대하는 소설이에요.

자목련 2016-10-10 11:10   좋아요 0 | URL
에이바 님과 함께 읽는 소설이군요, ㅎ
 
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때때로 위장의 삶을 산다. 소소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계획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후자는 범죄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 범죄가 아닌 경우 다양한 삶을 살아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배우라면 그런 삶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한다. 우리는 그를 스파이라 부른다. 고급 정보를 빼내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며 살아가는 삶은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삶은 행복할까? 

 

 대학 입학 이후 15년의 기억을 잃은 어느 스파이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박주영의 『고요한 밤의 눈』은 절체절명의 위기와 긴박함보다는 삶에 대한 철학적 관조처럼 다가온다. 스파이를 키우고 주도하는 조직이 등장해 누군가를 조사하고 감시하지만 구체적인 사건 정황은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스파이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사회적 지위를 갖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혼자지만 아주 미세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간의 점이 사라져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선이 어떤 의지로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65쪽)

 

 소설은 정신과 의사인 일란성 쌍둥이 언니의 실종으로 단서를 찾는 D와 15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남자 X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X는 유일한 방문자인 Y를 만나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를 듣고 D에게 상담을 받는다. 놀랍게도 Y는 스파이였고 X도 스파이였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X는 Y에게 의지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며 거짓 아닌 거짓으로 대한다. Y는 상사 B의 지시로 소설가 Z를 감시하지만 그 이유가 묻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소설에서 보여준 스파이의 존재는 세상이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권력과 자본의 통제를 벗어나는 삶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안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사라졌다. 이쯤에서 우리는 D의 언니도 스파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자발적 실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그것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소설가 B를 감시한 이유다.

 

 ‘혁명은 사람들의 기억과 핏속, 심장에 있다. 모든 사람의 피를 세탁할 수도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도 모든 사람의 심장을 바꿀 수도 없다. 피는 흐르고 기억은 숨고 심장은 뛴다. 어디선가 여전히.’ (188쪽)

 

 기억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 소설은 예상했던 추리 스릴러가 아니라 사회적 소설이다. 때문에 누군가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 안에서 우리의 현실을 발견한다. 진실이 거짓으로 바꾸는 여론, 나도 모르게 내 모든 정보를 누군가가 수집하고, ​정의와 양심을 묵인하는 사회 말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커지는 불안과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삶은 진짜인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답답해진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불안하고 무엇 때문에 불편하지 묻게 만든다. 각자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작은 점이 되어야 한다고. 점이 모여 선이 된다는 걸 잊었냐고.

 

 ‘포기하지 않는다. 망각에 맞서기 위해 기억한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는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다시 쓰고 또 누군가는 다시 읽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되고 있다.’ (31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의 계절이 사라졌다. 여름이 지난 자리에는 가을이 당당하게 서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정리하고 여름에 사용했던 물건을 정리하는 것처럼 삶의 일부도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풍성함으로 가득한 가을을 느끼면서 여름을 정리한다.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진 삶을 본다. 욕심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가의 물건도 없고 넓은 집에 살지 않고 좋은 차를 타지 않지 않는다. 현재 특별하게 갖고 싶은 물건도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집안을 둘러보면 빈 공간이 없다. 적지 않게 쌓여 있는 책들, 베란다를 가득 채운 살림살이, 주방에 그릇이 가득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서랍장에 넣어두는 옷도 많다. 왜 버리지 못하는가? 반대로 왜 버리고 비워야 하는가?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건뿐이 아니다,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다.

 

 왜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물질에 몸과 마음이 매이지 않아야만, 비로소 인생과 그 본질적 가치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쪽)

 

 장석주는 단호하게 말한다. 단순한 삶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채우지 않고 비워둔 공간에서 생기를 찾고 빛나는 삶이다.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말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시골에 산다. 산책을 즐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산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그의 글에는 안온한 삶이 있다. 그의 삶이 정답은 아니지만 단순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정갈하게 정돈된 삶이 주는 평화를 보여준다. 내 주변을 둘러본다. 내게 속한 것들, 그것이 진정 삶의 본질을 위한 것들인가.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화한다. 그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몸부림을 치며 쫓는다. 소읍에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도시를 갈망한다.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이곳과 다른 곳을 꿈꾸었다. ​부질없는 욕망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장석주의 글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눈과 귀로 느끼는 일상의 기쁨을 다시 찾는다.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이 되려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과 마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한가롭게 걸어본 적이 있는가. 가만히 나무와 꽃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헤아릴 여유가 있었던가. 시골에 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런 삶과 가깝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욕심으로 마음을 채운 삶에는 여유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걷기는 하늘과 태양과 바람을 가슴으로 품는 일이고, 빛으로 가득 찬 누리 속에서 자유와 고요함 속에서 몸을 끌고 나아가는 활동이다. 전진의 리듬에 존재를 내맡기는 이 무보상적 행위를 통해 얻는 것은 전적으로 무해한 기쁨이다. 날마다 하루의 일부를 쪼개 걷기에 나서는 것은 그것이 내면의 기쁨으로 채우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174쪽)

 

 어쩌면 장석주가 예찬하는 걷기는 여유가 들어갈 틈을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이라는 이유만으로 걷기의 이유는 충분하다. 오롯이 가을의 특권인 투명한 하늘과 더운 여름을 견디고 단단한 열매를 맺는 거룩한 자연의 일부와 만날 수 있는 건 기쁜 일이니까. 그런 여유가 쌓이고 쌓이면 자신만의 철학으로 자리할 것이다. 그러니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산책과 리듬은 그 단어만으로도 경쾌한 멜로디가 되는 듯하다.

 

 ‘산책을 한다는 것이 갑작스럽고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걸음을 멈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산책은 오히려 리듬이 달라지게 만든다. 즉, 억압받던 팔다리와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킨다. 산책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선 억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여정과 나의 리듬, 나의 표상을 선택할 수 있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236쪽)

 

 이 산문집에는 단순한 삶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좋아하는 꽃들이 피고 지는 것들 보고 집으로 날아드는 수많은 새들과 인사를 나누며 단출한 밥상의 맛을 아는 시골살이와 함께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 자연을 통해 얻는 즐거움과 사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정갈한 문장으로 쓰인 시인의 소박한 삶에는 충만이 넘친다. 작지만 작지 않은 삶,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삶을 소망한다. 최소한의 것들로 살 수는 없지만 최대한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평온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더라도 가끔은 들길을 걷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한밤중 곁에서 걷는 친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밤하늘에 가득 뜬 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집도 읽고, 음악회도 가고, 연극도 보며 살자. (204쪽)

 

 물질에 매몰되는 하루에서 벗어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보고 높아지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삶은 결코 어렵지 않다. 타인의 삶과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고 상념으로 채워진 마음을 조금만 비워도 충분히 단순해질 것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고, 중요한 건 복잡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단순함으로 시작하는 경쾌하고 가벼운 삶이 가까이 있다. 말미를 주지 않고 떠나는 가을을 즐기는 일, 책과 함께하는 산책도 나쁘지 않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10-07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7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