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계절이 사라졌다. 여름이 지난 자리에는 가을이 당당하게 서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정리하고 여름에 사용했던 물건을 정리하는 것처럼 삶의 일부도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풍성함으로 가득한 가을을 느끼면서 여름을 정리한다.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진 삶을 본다. 욕심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가의 물건도 없고 넓은 집에 살지 않고 좋은 차를 타지 않지 않는다. 현재 특별하게 갖고 싶은 물건도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집안을 둘러보면 빈 공간이 없다. 적지 않게 쌓여 있는 책들, 베란다를 가득 채운 살림살이, 주방에 그릇이 가득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서랍장에 넣어두는 옷도 많다. 왜 버리지 못하는가? 반대로 왜 버리고 비워야 하는가?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건뿐이 아니다,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다.

 

 왜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물질에 몸과 마음이 매이지 않아야만, 비로소 인생과 그 본질적 가치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쪽)

 

 장석주는 단호하게 말한다. 단순한 삶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채우지 않고 비워둔 공간에서 생기를 찾고 빛나는 삶이다.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말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시골에 산다. 산책을 즐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산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그의 글에는 안온한 삶이 있다. 그의 삶이 정답은 아니지만 단순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정갈하게 정돈된 삶이 주는 평화를 보여준다. 내 주변을 둘러본다. 내게 속한 것들, 그것이 진정 삶의 본질을 위한 것들인가.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화한다. 그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몸부림을 치며 쫓는다. 소읍에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도시를 갈망한다.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이곳과 다른 곳을 꿈꾸었다. ​부질없는 욕망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장석주의 글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눈과 귀로 느끼는 일상의 기쁨을 다시 찾는다.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이 되려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과 마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한가롭게 걸어본 적이 있는가. 가만히 나무와 꽃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헤아릴 여유가 있었던가. 시골에 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런 삶과 가깝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욕심으로 마음을 채운 삶에는 여유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걷기는 하늘과 태양과 바람을 가슴으로 품는 일이고, 빛으로 가득 찬 누리 속에서 자유와 고요함 속에서 몸을 끌고 나아가는 활동이다. 전진의 리듬에 존재를 내맡기는 이 무보상적 행위를 통해 얻는 것은 전적으로 무해한 기쁨이다. 날마다 하루의 일부를 쪼개 걷기에 나서는 것은 그것이 내면의 기쁨으로 채우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174쪽)

 

 어쩌면 장석주가 예찬하는 걷기는 여유가 들어갈 틈을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이라는 이유만으로 걷기의 이유는 충분하다. 오롯이 가을의 특권인 투명한 하늘과 더운 여름을 견디고 단단한 열매를 맺는 거룩한 자연의 일부와 만날 수 있는 건 기쁜 일이니까. 그런 여유가 쌓이고 쌓이면 자신만의 철학으로 자리할 것이다. 그러니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산책과 리듬은 그 단어만으로도 경쾌한 멜로디가 되는 듯하다.

 

 ‘산책을 한다는 것이 갑작스럽고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걸음을 멈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산책은 오히려 리듬이 달라지게 만든다. 즉, 억압받던 팔다리와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킨다. 산책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선 억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여정과 나의 리듬, 나의 표상을 선택할 수 있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236쪽)

 

 이 산문집에는 단순한 삶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좋아하는 꽃들이 피고 지는 것들 보고 집으로 날아드는 수많은 새들과 인사를 나누며 단출한 밥상의 맛을 아는 시골살이와 함께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 자연을 통해 얻는 즐거움과 사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정갈한 문장으로 쓰인 시인의 소박한 삶에는 충만이 넘친다. 작지만 작지 않은 삶,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삶을 소망한다. 최소한의 것들로 살 수는 없지만 최대한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평온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더라도 가끔은 들길을 걷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한밤중 곁에서 걷는 친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밤하늘에 가득 뜬 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집도 읽고, 음악회도 가고, 연극도 보며 살자. (204쪽)

 

 물질에 매몰되는 하루에서 벗어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보고 높아지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삶은 결코 어렵지 않다. 타인의 삶과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고 상념으로 채워진 마음을 조금만 비워도 충분히 단순해질 것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고, 중요한 건 복잡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단순함으로 시작하는 경쾌하고 가벼운 삶이 가까이 있다. 말미를 주지 않고 떠나는 가을을 즐기는 일, 책과 함께하는 산책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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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15: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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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16: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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