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사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누군가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저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정해놓은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명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픔과 상처가 나의 몫이라는 게 때로 가혹하고 부당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면 조금씩 괜찮아지기도 할 것이다. 결코 밝지 않은 한강의 소설엔 그럼 힘이 있다. 이상하게도 맨살로 맞이하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점차 사그라드는 기분이랄까. 한강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평범하다 못해 조용한 사람들이다. 환하게 웃음을 짓거나 크게 소리 내어 웃지 않는다. 행복해서는 안 된다고 학습을 받은 사람들처럼.
『여수의 사랑』이 그러했고 『내 여자의 열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이 바라는 건 커다란 행복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존재 증명이며, 타인과의 소통일 뿐이다. 아프다고 말했을 때 아프구나, 힘들지? 하고 물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함께 고통을 나누자는 게 아니라 아픔을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남편에게, 연인에게. 화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말이다. 인정받지 못한 삶은 상처로 자신과 상대에게 상처로 이어진다. 상처받은 삶은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고립을 원하기도 한다.
사랑했기에 소유해도 된다고 믿고 자신과 거리를 두는 여자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는「어느 날 그는」의 남자와 완벽한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아기 부처」의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내는 모두 그들만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흔적을 뒤늦게 발견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혹독한 겨울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폭설과 비바람을 견디며 자라는 숲의 솔잎이 항상 초록빛을 띄고 있다는 걸 마주하는 아내가 봄이 온다는 사실에 작게 안도하는 것처럼 우리네 삶도 같을 것이다. 생명력 질긴 식물처럼 살고 싶은 욕망 말이다.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아기 부처」, 125쪽)
누군가는 이미 그 겨울을 지나왔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지금 그 겨울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에게는 그 겨울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는 사실이 있어 다행이다.
이 소설집을 말할 때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내 여자의 열매」와 『흰』을 떠올리게 만드는「아홉 개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온몸에 푸른 멍이 번지기 시작하여 점점 초록의 식물로 변해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은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무엇이 아내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아내가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 화를 내고 질책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남편과 가족처럼 영혜를 탓하고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계절이 바뀌면서 열매를 맺고 사라져가는 아내가 다시 봄이 되면 꽃을 피우기를 소망한다.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아내의 꽃이 붉게 피어날까. 나는 그것을 잘 알 수 없었다.’ (「내 여자의 열매」, 242쪽)
하나인 듯 하나가 아닌 듯한 「아홉 개의 이야기」는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순진하고 순수한 첫사랑의 떨림, 나직이 나를 부르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라고 하면 좋을까. 그것은 한강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기 봄이 오고 있다고, 봄에 함께 기뻐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