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계절이 사라졌다. 여름이 지난 자리에는 가을이 당당하게 서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정리하고 여름에 사용했던 물건을 정리하는 것처럼 삶의 일부도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풍성함으로 가득한 가을을 느끼면서 여름을 정리한다.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진 삶을 본다. 욕심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가의 물건도 없고 넓은 집에 살지 않고 좋은 차를 타지 않지 않는다. 현재 특별하게 갖고 싶은 물건도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집안을 둘러보면 빈 공간이 없다. 적지 않게 쌓여 있는 책들, 베란다를 가득 채운 살림살이, 주방에 그릇이 가득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서랍장에 넣어두는 옷도 많다. 왜 버리지 못하는가? 반대로 왜 버리고 비워야 하는가?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건뿐이 아니다,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다.

 

 왜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물질에 몸과 마음이 매이지 않아야만, 비로소 인생과 그 본질적 가치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쪽)

 

 장석주는 단호하게 말한다. 단순한 삶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채우지 않고 비워둔 공간에서 생기를 찾고 빛나는 삶이다.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말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시골에 산다. 산책을 즐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산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그의 글에는 안온한 삶이 있다. 그의 삶이 정답은 아니지만 단순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정갈하게 정돈된 삶이 주는 평화를 보여준다. 내 주변을 둘러본다. 내게 속한 것들, 그것이 진정 삶의 본질을 위한 것들인가.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화한다. 그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몸부림을 치며 쫓는다. 소읍에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도시를 갈망한다.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이곳과 다른 곳을 꿈꾸었다. ​부질없는 욕망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장석주의 글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눈과 귀로 느끼는 일상의 기쁨을 다시 찾는다.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이 되려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과 마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한가롭게 걸어본 적이 있는가. 가만히 나무와 꽃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헤아릴 여유가 있었던가. 시골에 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런 삶과 가깝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욕심으로 마음을 채운 삶에는 여유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걷기는 하늘과 태양과 바람을 가슴으로 품는 일이고, 빛으로 가득 찬 누리 속에서 자유와 고요함 속에서 몸을 끌고 나아가는 활동이다. 전진의 리듬에 존재를 내맡기는 이 무보상적 행위를 통해 얻는 것은 전적으로 무해한 기쁨이다. 날마다 하루의 일부를 쪼개 걷기에 나서는 것은 그것이 내면의 기쁨으로 채우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174쪽)

 

 어쩌면 장석주가 예찬하는 걷기는 여유가 들어갈 틈을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이라는 이유만으로 걷기의 이유는 충분하다. 오롯이 가을의 특권인 투명한 하늘과 더운 여름을 견디고 단단한 열매를 맺는 거룩한 자연의 일부와 만날 수 있는 건 기쁜 일이니까. 그런 여유가 쌓이고 쌓이면 자신만의 철학으로 자리할 것이다. 그러니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산책과 리듬은 그 단어만으로도 경쾌한 멜로디가 되는 듯하다.

 

 ‘산책을 한다는 것이 갑작스럽고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걸음을 멈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산책은 오히려 리듬이 달라지게 만든다. 즉, 억압받던 팔다리와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킨다. 산책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선 억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여정과 나의 리듬, 나의 표상을 선택할 수 있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236쪽)

 

 이 산문집에는 단순한 삶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좋아하는 꽃들이 피고 지는 것들 보고 집으로 날아드는 수많은 새들과 인사를 나누며 단출한 밥상의 맛을 아는 시골살이와 함께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 자연을 통해 얻는 즐거움과 사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정갈한 문장으로 쓰인 시인의 소박한 삶에는 충만이 넘친다. 작지만 작지 않은 삶,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삶을 소망한다. 최소한의 것들로 살 수는 없지만 최대한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평온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더라도 가끔은 들길을 걷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한밤중 곁에서 걷는 친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밤하늘에 가득 뜬 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집도 읽고, 음악회도 가고, 연극도 보며 살자. (204쪽)

 

 물질에 매몰되는 하루에서 벗어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보고 높아지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삶은 결코 어렵지 않다. 타인의 삶과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고 상념으로 채워진 마음을 조금만 비워도 충분히 단순해질 것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고, 중요한 건 복잡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단순함으로 시작하는 경쾌하고 가벼운 삶이 가까이 있다. 말미를 주지 않고 떠나는 가을을 즐기는 일, 책과 함께하는 산책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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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15: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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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16: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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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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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처음 만나는 건 모두 외부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내부를 보려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고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내부의 내부까지 알 수 있는 시간은 꽤 오래 걸린다. 그러니까 첫눈에 반하는 건 거짓일 수도 있다. 나빴던 첫 느낌이 반전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새로 이사 온 동네가 점점 좋아지거나 불편했던 신발에 길들여지고 낡고 오래된 집을 떠나기 싫은 것도 내부의 내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에서 그런 사랑을 보았다. 그것은 뜨겁게 타올라 식어버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끓어올라 오래도록 온기를 남기는 온돌 같은 사랑이었다.

 

 소설은 화자인‘나’가 1982년 무라이 선생님과 보낸 일 년 남짓 시간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다. 노년의 건축가가 여름마다 사무소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일하는 여름 별장은 소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스물세 살 건축학도 ‘나’는 1982년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에 신입 사원이 되었고 여름 별장은 처음이다. 칠십 중반의 무라이 슌스케를 비롯한 오랜 시간 함께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1950년대에 지어진 여름 별장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무라이의 건축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름 별장에서 직원들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한다. 도쿄 사무실을 떠나 도서관 설계에만 집중을 한다. 검색하게 만든다. 막내인 ‘나’는 식사 준비를 돕고 선생님이 지시하신 도서관 내 스태킹 체어 업무를 맡았다.

 

 설계도면과 건축 모형만을 떠올리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지만 소설은 다르다. 여름 별장에서 생활하는 직원들의 모습과 하루하루 달라지는 그곳의 풍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아름답다. 특히 무라이 선생님의 조카 마리코와 ‘나’ 사이의 감정 변화가 흥미롭다. 건축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색다른 즐거움이지만 건축을 이용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특별하게 다가온다. 건축물 자체의 실질적인 아름다움과 편리한 사용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건축에 대한 대단한 고집과 열정에 감탄하고 만다. ‘나’ 가 스승이 만든 교회에 대한 설명을 듣는 부분에서는 귀를 기울이면 그 작은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건축가가 만든 것에는 크고 윤기 있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듯한 느낌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선생님의 건축은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어, 라고 할 정도의 소리랄까. 작은 소리를 감싸는 작은 것이라고 할까.” (81쪽)

 

 소설 곳곳에서 무라이 슌스케가 추구하는 건축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며 소설에 등장하는 건축물을 검색하게 만든다. 모든 건축은 사람과 함께 공존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집, 사람이 머무는 공간에 대한 건축가의 세심한 계획은 건축물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스며들어야 한다는 철학을 ‘나’는 스승에게 배운다.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의 느낌도 놓치지 않고 건축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깨닫게 한다. 건축가의 역할과 존재에 대해 말이다. 그것은 비단 건축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에 독자에게도 큰 울림을 전한다.

 

 “간단하고 간결하다는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건축에서 사소한 장치를 생각할 때도 사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그 장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거야.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114쪽)

 

 젊은 건축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냈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그것은 간결하면서도 탄탄한 문장으로 건축에 대한 철학과 여름 별장이라는 공간을 아름답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마치 1년 동안 여름 별장에 그들의 곁에서 지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여름 별장의 외부가 아닌 내부까지 사랑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거나 공부하는 이들은 내부의 내부까지 만났을지도 모른다.

 

 ‘여름 별장을 철수한 9월 중순에는 울창한 숲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 같았는데, 지금은 노랑, 빨강, 초록으로 나뉘어, 한 그루 한 그루의 형태와 크기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미 거의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에 대비한 나무도 있었다. 숲속은 멀리까지 전망이 트이고, 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줄기랑 가지는 상량식을 올린 가옥의 뼈대 같았다.’ (327쪽)

 

 모든 건축물은 사라진다. 무너지고 부서진 곳을 고치고 수리해도 결국엔 사라지고 만다. 외부는 그러할지라도 내부 깊숙이 닿았던 손길과 온기, 그리고 추억은 영원할 것이다. 여름 별장에 남은 그 해의 여름처럼 오래도록 깊이 각인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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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기 좋은 빗소리가 들린다. 기분이 좋아진다. 편안해진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빗소리를 듣는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지만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하나의 계절이 끝났다는 마침표 같은 비가 될 것이다. 주말에 할아버지 추도 예배를 드리면서 여름의 흔적인 전기세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했다. 누진세가 정말 무섭다는 걸 실감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위는 강렬할 것이다. 점점 새로운 계절을 만든다. 다가오는 계절을 살기 위해 밭에는 무와 배추가 자라고 가지마다 열린 모과는 제멋대로 익어간다.

 

 근처에 바다가 있어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지속되고 있는데 최근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주일마다 교회에 갈 때마다 나는 무섭다. 넓어진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기본을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사고다. 시골이다 보니 노인분들이 많은데 달리는 차에 대한 인식이 느리다. 내가 건 후에 차가 지나갈 것이라 여기시는 것이다. 기본을 지키는 일은 가장 쉬운 방법인데 우리는 쉽다고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

 

 버리는 일을 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버린다. 과감하게 컵과 그릇을 버린다. 좋아했던 컵, 내 것이 되었을 때 기뻐했던 모습이 고스란히 컵에 담겼다. 사두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도시락, 사은품 때문에 구매했지만 결국엔 짐으로 전락한 사은품, 입지 않고 모셔둔 옷가지, 사고 싶어서 갖고 싶어서 필요한 이유를 나열했던 물건들. 온라인 쇼핑몰의 장바구니도 비웠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인가, 묻고 생각한다. 그러다 궁금한 책을 발견하면 다시 장바구니를 채운다.

 

 

 

 

 

 

 

 

 

 

 

 지진이 발생하고 진동을 느끼고 공포를 안고 산다. 짧은 기도를 드리고 친구와 지인에게 안부를 묻는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다 곧 잊는다. 억울하게 죽은 이를 잊고 그리운 이를 잊고 계절을 잊는다. 잃어버리고 산다. 때로는 잊고 사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 날들이다. 그리고 이런 시로 부족하지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비가 내리는데

 사람들이 다 젖어가는데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오늘 비는 해석할 여지가 있는데

 여자아이가 알몸으로 떨고 있는데

 책장 위에서 책장을 넘기며

 밑줄을 긋고 한참을 생각하는데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오늘 비는 볼수록 난해한데

 한 사내가 빗속에서 찰박찰박 사라지는데

 속절없이 비가 내리네

 핏물이 우리의 발밑으로 흘러가는데 (「붉은, 비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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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는 도련님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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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면 얼굴은 변한다. 성격이 변하기도 한다. 외부의 변화는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내부의 변화는 감지하기 어렵다. 변화는 좋을 것일까, 나쁜 것일까. 어떤 변화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좋은 쪽으로 받아들인다. 오랜만에 백가흠의 단편집과 읽으면서 백가흠이 변화와 만났구나 생각했다. 겨우 한 권의 단편과 장편소설을 읽었을 뿐이고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렇게 판단하기로 했다. 시니컬한 분위기는 같았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호쾌한 소설이라는 건 아니다.

 

 뭔가 기묘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걸 암시하는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의 소설은 소문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 읍에서 두 명의 여인이 사라진다. 한 명은 황 약사의 며느리 장 약사로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이 난다. 다른 하나는 농장에서 일하는 탈북여성 림혜숙과 그 딸이다. 농장의 김 씨는 림혜숙을 애타게 찾으려 하지만 약국집은 남들에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처럼 단련된 소문은 기괴한 소문으로 확장되고 이를 대하는 김 씨와 황 약사의 태도가 흥미롭다. 예측 가능한 결말을 살짝 뒤틀린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몰입할 수 있는 소재와 전개가 좋다. 백가흠답다.

 

 표제작 「힌트는 도련님」과「그래서」와 「P」는 작가의 자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힌트는 도련님」는 소설 쓰기의 고단함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화자인 ‘나’와 ‘나’가 쓰는 소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마감을 앞두고 소설을 쓰지 못하는 작가의 괴로움과 동시에 작가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반면 「그래서」는 작가가 아닌 은퇴한 비평가의 이야기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게 하루 일과인 노인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이어간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의 교류도 전혀 없다. 그런 그에게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소설가 백이 등장한다. 글씨가 사라지는 절망적인 글쓰기로 고통받는 소설가 백은 백가흠의 분신이 아닐까 싶다. 자전소설을 쓰겠다고 펜션을 운영하는 희경에게 전화는 거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P」​는 10년이라는 시간의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기를 원하는 P와 희경의 대화로 소설에 대한 고민을 만난다. 세 편의 소설을 통해 백가흠의 소설에 대한 애정 혹은 고단함을 상상해본다.

 

 약자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시선도 여전하다. 150센티미터의 작은 키로 회사나 사회에서 있는 듯 없는 존재인 이혼한 정수기 영업사원의 분투기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와 고엽제 피해자로 약에 취해 비참하게 삶을 견디다 결국 죽음을 맞는 원덕 씨의 이야기「통(通)」과 베트남에서 농촌으로 시집온 어린 신부 ‘쯔이’와 소통하지 못하는 남편과 시댁 식구의 갈등을 그린 「쁘이거나 쯔이거나」는 약자와 변두리의 삶을 잘 보여준다. 특히 아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쯔이를 대하는 시댁의 폭력은 잔혹 그 이상이다.

 

 「그런, 근원」은 어린 시절 집을 나가 사라진 아버지와 동생과 자신(근원)을 버리고 재혼한 어머니가 죽어가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다. 든든한 울타리가 없이 성장한 근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던 중 만난 사장에 눈에 들어 매니저로 일한다. 화려한 세상에 입문했으니 근원은 과거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를 그렇게 대우하는 이는 없다. 어머니를 만나면 자신의 삶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뿐이다.

 

 어쩌면 이 소설집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근원이 찾고 싶었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아니었을까. 소설가에게 근원은 소설 쓰기의 즐거움과 동시에 소설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다. 사느라 자신의 근원을 잊고 사는 독자에게는 부재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삶과 사회의 근원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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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한창훈 지음, 한단하 그림 / 한겨레출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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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일까? 그렇다면 한창훈의 이야기는 불행한 나라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모두가 행복해서 정작 그 단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일까. 책을 읽기도 전에 나는 행복과 불행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불행이 싹텄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혼자만 사는 세상이라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갈 테니까.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야 한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할 수 있는 다섯 편의 짧은 연작을 읽으면서 나는 마음이 뜨거워졌다. 군사 목적으로 존재했던 섬에 병사들은 모두 떠나고 측량사만 남는다. 풍랑으로 섬에 들어온 사람, 구조선을 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그 나라로 간 사람들」는 태초의 삶이 시작된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란 법만 존재할 뿐 바다가 보여주는 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함께 살아간다. 나와 너의 분리와 경계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행복이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화산 폭발로 섬을 떠나 본토에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육지에서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열심히 주어진 일을 한다. 그들을 취재하는 기자는 왜 휴일에도 쉬지 않느냐고 묻자 섬사람들은 충분히 쉬는 것이라 말한다. 화산활동이 끝나고 사람들은 섬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남는다. 육지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한 쿠니는 헤어지고 혼자가 된다. 어느 날 공원에서 노인의 말을 들어주다 ‘이야기 들어주는 집’을 운영하다. 많은 사람들의 쿠니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들을 상대하면서 쿠니는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 「쿠니의 이야기 들어주는 집」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만 들어주기를 바라는 일방적인 모습, 상대의 목소리는 무시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한다. 소통을 거부하는 단절된 사회에서 행해지는 정치는 올바른 것일까.

 

 “당신과 가까워지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진정으로 가까워지려면 서로 번갈아 이야기하고 관심 깊게 들어야 한다는 거, 듣는 것도 마치 말하는 것 같아야 한다는 걸요.” 「쿠니의 이야기 들어주는 집」, 66쪽

 

 쿠니의 이야기가 단절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그 아이」는 규칙과 규율이라는 틀에 갇혀 지내는 아이들의 현주소를 말한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표현하기를 원하지만 어른들이 원하는 건 무조건 1등을 위한 기술뿐이다. 진정 무엇이 중요한지를 놓치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이라 서글프다. 섬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시 그곳으로」도 마찬가지다. 바다를 가장 잘 아는 섬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선장이라는 사람의 명령에 따르기를 강요한다. 선장은 독재자를 대신한 말로 그것이 주는 공포와 폭력이 얼마나 잔인한지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가. 금수저, 흙수저 란 말로 신분을 따지고 빈부의 격차가 커지며 공감은 사라지는 사회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란 한 하나의 법으로 살아가는 섬나라 사람들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한창훈이 바라고 꿈꾸는 좋은 세상을 우리는 만들 수 있을까.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해서 잘 사는 게 아니라 개인의 기쁨이 넘치고 웃음이 피어나는 나라 말이다. 타인의 불행으로 행복을 확인하지 않고 행복이란 말이 없어도 내일이 기다려지는 나라,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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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9-2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적인 나라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ㅜ.ㅜ

자목련 2016-09-23 18:03   좋아요 0 | URL
상식이 통하는 그런 나라도 넘 멀리 있는 걸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