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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평점 :
쓰는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대단한 글쓰기를 하는 줄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인지 써야 할 것들에 대한 부담이 늘어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반갑고 부럽다. 나의 기록을 생각한다.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을 기록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한때는 좋은 글을 쓰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다. 블로그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어떤 날은 답답한 마음이 고스란히 글에 있었고 어떤 날은 커다란 분노가 거기 있었다. 서로 다른 감정이 글에서 자라고 있다니 놀라웠다. 글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라서 말보다 강한 힘을 지니기도 한다. SNS에 올라오는 글도 그렇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 모르겠다. 짧고 간결한 문장에 자신만의 색을 담은 글은 정말 대단한다. 글은 공기와 같아서 함께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다.
좋은 글을 만나는 즐거움은 쓰는 즐거움 이상으로 크다. 그러니 안대회의 『문장의 품격』에서 만난 조선시대 문장가 7인의 문장을 읽는 건 더운 여름의 소나기처럼 반갑다. 잘 알려진 허균,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과 조금은 생소한 이용휴, 이옥의 글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보여준다. 좋은 문장을 친절한 안대회의 해설로 만날 수 있다. 17~19세기 조선시대의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7인 7색의 즐거움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그들의 글이 모두 정치, 문학, 경제를 논하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를 그린 풍경이며 누군가를 향한 애도의 글이며 우정을 전하는 편지글이며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와 같다. 그들에게 글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었고 자신과 시대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신기하게도 시대를 바라보는 문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일은 날이 갈수록 그릇되어가고, 선비의 행실은 날이 갈수록 허위에 젖어들며, 친구들끼리 등을 돌리고 저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배신 행위는 길이 갈라져 분리됨보다 휠씬 심하다.’ (19쪽, 허균) 허균의 문장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를 꿰뚫는 듯하다.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정리하고 쓸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문장의 품격이다.
박지원의 산문은 무척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큰누님을 잃고 쓴 제문에는 그리움이 가득했고 짧은 편지를 소개한 척독집(尺牘集)은 유쾌한 위트가 넘쳤다. 그러나 계속해서 읽고 싶은 문장은 마음을 고요히 가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글이었다. 문 밖의 소리에 대한 비유로 정말 매력적이다. 그런가 하면 책만 보는 바보로 익숙한 이덕무는 책만 읽는 자신의 모습을 쓴 글이 많았다. 반복되는 일상을 다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책과 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우직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짧은 글로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가. 생활문장의 진수라 하겠다.
‘깊은 솔숲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흥분했을 때이고, (…)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놀랐을 때이고, (…) 거문고가 웅숭깊게 어울려 연주하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슬플 때이고,(…)’ (112쪽, 박지원)
‘내가 사는 집은 저잣거리 바로 옆이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이 장을 열어 시끌벅적하다, 해가 들어가면 마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어댄다. 그러나 나만은 책을 읽으며 편안한다.’ (146쪽, 이덕무)
박제가의 문장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이옥의 글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로 쓰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으며 정약용의 친근하고 편안한 글에서 귀양살이의 고단함은 찾을 수 없었다.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고, 물 위에서 잠을 자며, 파도 위의 오리처럼 둥실둥실 떠다닌다. 때때로 짧은 노래 작은 시를 지어, 기구하고도 뇌락(牢落)한 심경을 스스로 펼쳐낸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다.’ (282쪽, 정약용)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자신의 삶을 치밀하고 담백하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능을 떠나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던 7인의 문장은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내면의 목소리를 투명하게 발산할 수 있는 문장을 갖고 싶다. 우선은 쓰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