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내렸던 비가 그쳤다. 이번에는 일기예보가 맞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빗나갔다. 아직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있다. 자꾸 팔뚝을 쓸어내린다. 겉옷을 입어야겠다. 꼭꼭 닫았던 창문을 여니 맑고 투명한 건 아니지만 세수를 한 아이의 얼굴처럼 하늘은 싱그럽다. 이웃 님의 글에서 본 빨간 홍옥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그 붉은빛이 고와서 오래도록 곁에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우리 집 냉장고에는 홍옥이 없다. 사과도 없다. 시들어진 포도는 갈아서 체어 걸러 마셨다. 그곳에 포도가 있었다는 걸 잊지 않았지만 이제 포도를 먹는 계절이 아닌 것이다. 언제부터 포도는 여름 과일이 되었을까?

 

 10월의 마지막 밤까지 23일이 남았다. 뜬금없는 말이다. 벌써 10월의 여덟 번째 날이라는 게 놀랍다. 10월은 좀 조급해지는 것 같다. 올해의 시간이 세 달 정도만 남았다는 건 깜빡이는 신호등을 빠르게 건너야 하는 순간처럼 불안하다. 다음 신호등에 건너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서글픔 같은 것이랄까.

 

 아침이 되었다고 느끼는 시각도 점점 늦어지는 대신 밤이 되었다는 신호는 빨리 온다. 깊고 고요한 밤의 결을 매만지는 계절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시집이 더욱 끌린다. 시를 읽기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할까. 전화기에 대고 연인에게 짧은 시를 들려줘도 좋은 밤. 허수경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가을을 닮았다.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가을을 위로하는 시집처럼 다가온다.

 

 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 / 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 퉁퉁 부은 발에 시퍼렇게 청태가 끼어 / 빛이 되는 건 천체의 일이겠지요 //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발이 부은 가을 저녁, 일부)

 

 한 권의 시집을 온전히 읽는 가을이라면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가을일 것이다. 그리고 한 권의 소설까지. 읽기도 전에 나는 이 소설에 반해버렸다. 컨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 아름다운 우정과 소통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노년의 삶은 어떤 빛일까. 붉은 홍옥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들어진 포도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버려지지 않는 포도. 누군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알 수 없는 우정을 선물 받는 기분일 것이다. 그 누군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이바 2016-10-0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우리 영혼은』, 저도 기대하는 소설이에요.

자목련 2016-10-10 11:10   좋아요 0 | URL
에이바 님과 함께 읽는 소설이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