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봄 - 정신과 의사의 일상 사유 심리학
김건종 지음 / 포르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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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마주하는 물건과 풍경이 어느 순간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매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거기 그 자리에 항상 존재하는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타자는 변한 게 없고 내가 변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생각이 변하는 순간은 어떻게 오는 걸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공부를 해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상의 사유는 쉬운 듯 보입지만 어렵고 힘들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김건종의 에세이 『바라;봄』은 그런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사유를 전한다.


그가 바라보는 것들을 함께 보고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순간 조금씩 사유가 확장되는 걸 느낀다. 아마도 이 책을 만난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이라는 직업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사물과 사람을 향한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다정하다. 살피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알아보고 바라보는 모든 것들은 그의 개인적인 일상이면서도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깊게 공감한다.


병원을 찾는 이들을 상대하며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 두 아들을 키우며 경험하는 것들, 산책을 하고 바다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포착한 순간을 기록한 담담하면서도 솔직한 문장이 치유로 다가오는 건 그가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가로수’를 시작으로 마지막 ‘흉내’까지 사물을 바라보고 단어를 바라보고 행동을 바라보며 기록한 문장은 일기처럼 은밀하면서도 안내처럼 꺼릴 게 없다. 그가 바라본 것들의 어느 하나를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고 좋다. 특히 주택을 손질하며 두 아들과의 지내는 일상이 허물없이 다가온다. 사고가 성장하는 큰아들과 나누는 대화, 활동량이 많은 작은아들의 모습을 보며 추억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넘치는 생을 마음껏 낭비할 수 있는 부유한 시간을 아이는 살고 있구나. 우리 모두가 한때 누렸던 순수한 과잉의 기쁨. 오로지 놀이 속에서 어른들도 잠깐씩 이 순간으로 되돌아온다. (「날뛰다」, 중에서)


있는 그대로 감정을 표출하는 아이를 통해 그 시간이 아이에게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인지 알게 된다. 코로나로 인해 밖이 아닌 안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함께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는 뒷모습에 대한 그의 사유는 나의 뒷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마음을 누군가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도.


뒷모습은 준비할 수도 없고, 조절할 수도 없고, 꾸밀 수도 없다. 항상 활짝 열려있어서 얼굴 표정처럼 닫을 수도 없다. 팔다리 휘둘러 방어할 수도 없다. 말이 없기에 침묵의 온도가 느껴지고, 표정이 없기에 온몸이 말하고, 무력하기에 오히려 존재 자체가 오롯이 떠오른다. 우리가 한 사람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다. (「뒷모습」, 중에서)


쉽고 친근하게 읽다가도 이런 부분에서는 감탄하고 그의 상담실에 입장한 기분이 든다. 고민하고 걱정하던 것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불과하며 앞으로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전하는 강한 어조가 들린다고 할까. 삶의 균형을 잡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죽음을 생각하면 한없이 감사한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그것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한 눈으로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다른 한 눈으로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 눈으로는 우리가 내일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 눈으로는 오 년이고 십 년이고 살 것처럼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얼굴에 나란히 자리한 두 눈으로 우리는 정반대의 세계를 보며, 그 모순의 관계 속에서 삶의 균형이 지탱된다. (「양안」, 중에서)


내가 두 눈으로 보는 것들은 얼마나 정확할까. 때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건 아닐까. 무언가를 바라봄에는 그런 고찰도 필요할 것이다.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당연한 게 아니며 감사할 일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볼 수 있는 것들을 언제라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당연하게 맞이한 오늘이 누군가 간절하게 바란 내일이라는 것처럼.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더라도 기억해야 한다.


피어나는 것들은 다 그렇다. 불꽃도, 향기도, 웃음도, 홍조도, 사랑도, 그렇게 잠깐 제 몸을 태워 빛을 내고 스러진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피어나기에 애달프다. 그래서 소중하다. (「피어나다」, 중에서)


보통의 일상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유가 가득한 책이다. 복잡하고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면 어떨까. 그리고 마주한 풍경과 눈을 맞춰봐도 좋을 봄이다. 저자가 바라본 사물과 단어를 따라 그에 따른 나의 시선을 기록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은 저마다 다르고 그것들은 모두 고유하고 특별하고 소중하다. 이 봄을 바라보는 나만의 바라봄을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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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2 소설 보다
김병운.위수정.이주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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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 하는지 안다고 확신하는 일은 어렵다. 기준을 모르기도 하고 그것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가 아니라 내가 보는 나는 항상 흔들리니까. 『소설 보다 : 봄 2022』 수록된 세 편의 소설은 어쩌면 그런 정체성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나를 알아가는 일, 나에 대한 확실과 불확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은 모습은 고민의 종류만 다를 뿐 우리와 같다.


김병운의 「윤광호」는 화자인 ‘나’가 ‘윤광호’라는 인물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다. 소설은 폐암으로 투병하다 죽은 윤광호의 소식을 시작으로 과거 그와 알고 지냈던 시간을 소환한다. ‘나’와 윤광호는 게이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처음 만났고 둘 다 게이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일찍 커밍아웃을 한 광호와 달리 ‘나’는 그들 무리에서만 소속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얻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음지에서는 그들과 같은 사람이지만 밖으로 나와서는 굳이 그걸 말해야 한다고 인식하지 않았다. 2010년을 생각하면 ‘나’의 태도는 그들에게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나’는 글을 쓰고자 했지만 결코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거라 했던 ‘나’에게 광호는 쓰게 될 거라고 말했다. 단체에서 퀴어 문학을 읽는 모임을 해보자는 광호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그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이유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소설에서 이광수의 「윤광호」가 등장하는데 읽지 않는 단편이라 그와 김병운의 「윤광호」가 연결되는 부분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어느 시대를 살든 우리는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산다는 것. 중요한 건 시간의 문제라는 광호의 말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어떤 일은 때로 많은 시간을 감내해야 하므로. 물론 무작정 시간이 기다리기를 바라서는 안 되고 소설 속 광호처럼 약자와 소수에 대한 차별 폐지와 인권을 위해 연대하는 활동을 기반을 하겠지만. ‘나’의 말처럼 현재 우리 사회는 광호 씨 같은 이가 더욱 필요하고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우리가 더욱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광호 씨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우리에게 필요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윤광호」, 33쪽)


김병운의 「윤광호」가 사회적인 인식 개선과 동시에 개인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위수정의 「아무도」는 조금 더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다룬다. ‘나’는 남편 수형과 별거를 시작했고 그 이유는 수형이 아닌 그 사람을 사랑해서다. 하지만 별거가 이혼 후 그 사람과의 결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혼자 지내면서 직장에 나가고 동료와 수다를 떨고 가족과 관계를 이어간다. 다만 사랑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과거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시절을 떠올린다. 누가 봐도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였기에 ‘나’는 그 이후로 아버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아버지 역시 가정을 버리지 않았고 여전히 어머니와 잘 지낸다. ‘나’가 사랑하는 그 사람도 가정이 있다. 소설에서 ‘나’가 숨이 막힐 때까지 달리기를 하고 노숙자가 되고 싶은 마음과 물과 상비약도 없는 집은 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겪는 혼란과 양가감정은 독자에게 당신은 어떠냐고 묻는 듯하다.


어떤 마음은 없는 듯, 죽이고 사는 게 어른인 거지.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미래가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건가?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나는 할 수 없었다. ( 「아무도」, 88쪽)


그럴 거면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혼을 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부모처럼 누구도 ‘나’에게 어떤 강요도 할 수 없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꿈에서 빨리 깨고 싶지 않은 ‘나’. 어쩌면 그래서 고독하고 쓸쓸한 ‘나’에게 연민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아무도」라는 제목이 주는 텅 빈 공허감처럼.


이주혜의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는 수술대 위에 오른 53세 여성 구은정의 21그램의 영혼으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시작한다.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돌보지 못한 몸. 은정이 여성을 상징하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는 설정은 또 다른 상징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아닌 인간 구은정의 몸이 되는 일. 고등학교 졸업 이후 가구회사에 일하며 가장 역할을 해 온 거구의 은정을 향한 직장 동료의 시선들. 그런 은정을 동반해 일본 출장길에 오르며 일본에 있는 연인을 만난 사장, 둘 사이의 소문을 감당하는 몫은 은정이었다. 은정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직장 선배 소희 언니만 있으면 좋았다. 하지만 소희도 다른 이들처럼 은정을 대했다.


나는 회복실 천장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있지도 않을 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21그램 더하기 자궁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내 몸이 억울하게 뺨을 맞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내 몸을 구해줄 생각도 없이 그저 이런저런 것들의 무게가 궁금했다. (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136쪽)


은정은 앞선 세대의 K- 장녀였다. 그녀의 감정이나 사랑은 존중받지 못했고 스스로를 돌보는 대신 누군가를 돌보거나 돌봄의 도구였다. 그러니 텅 빈 자루 같은 몸에서 벗어난 은정의 영혼은 자유롭고 평안하다. 은정을 짓눌렀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은정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화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역시 여성이고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면 조금 괜찮아질까.


나를 아는 일이 어려운 만큼 누군가를 안다는 일 역시 그러하다. 아는 척 하지 말고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말하는 『소설 보다 : 봄 2022』. 공감하고 연대하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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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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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으로 살지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냥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나 꿈같은 게 없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게 싫었지만 담임한테 대들 수 없었고 막연하게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수동적인 삶이었다. 나는 없고 남들처럼 사는 시간만 있었다. 그래서 십 대 조카와 이야기를 할 때 이모랑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을까. 십 대의 일상을 들려주는 최진영의 『일주일』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어른인지 느끼며 조카의 기분을 생각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어른 가운데 어떤 이는 어쩌겠니, 세상이 그런 걸 하며 아이들을 달래려고 할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거나 인식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말이다. 아이들의 마음에서 공감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처럼 어른이 되고서야 그때의 답답함과 슬픔을 조금 알게 되었을 테니까.


최진영의 소설에서 만난 청소년은 주변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아이들이다. 어린 시절 같은 유치원에 다니며 함께 일요일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나’, ‘도우’, ‘민주’가 성장하면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요일」. 각기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세 명의 일상은 일요일에도 만나기 어렵다. 특목고에 간 도우와 일반고에 간 민주와 다르게 특성화고에 간 ‘나’는 실습생이 되어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사회에 나온다. 가장 낮고 취약한 자리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일요일에도 쉬지 못한다. 빨리 자립하려고 선택한 학교는 안전한 고용에 대한 학습이 아닌 취업률만 높이려 아이들은 현장에 내보내고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돈 버는 일이 힘들다고 말할 수는 있어.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먹고사는 일이 원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어. (「일요일」, 47쪽)


‘나’의 불안은 누구의 책임일까. 어른과 사회의 잘못이다. 그런 미안함은 자신만의 비밀문자를 남기고 사라진 ‘지형’과 ‘나’의 이야기 「수요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입시로 찌든 학교생활,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 부모, 그 안에서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지형인 사라지고 남겨진 ‘나’는 ‘지형’이 보호자라 부르는 엄마에게 추궁을 당한다. 자신의 잘못과 아이가 느꼈을 아픔과 고통은 헤아리지 못하는 보호자는 어른의 표본일까 두렵다. 그 시절을 지나왔다고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무책임한가.


그런 의미에서 학교를 자퇴하고 자신만의 계획으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나’와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대화를 협의점을 찾는 엄마의 이야기 「금요일」은 조금이나마 희망적이며 위안을 준다. 학교에서 경험하는 불공정과 불합리한 제도에 목소리를 내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왕따와 학교폭력에 대해 방관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일주일』속 청소년은 실재하는 십 대다. 그래서 더 아프고 가혹하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뉴스에 등장하는 안타까운 죽음의 주인공이며 지금도 든든한 울타리 없는 일터에서 일하고 누구에게도 답답한 현실을 토해내지 못해 아파하고 버티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이런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면 금세 잊히고 말았을 걸 알기에. 부족한 어른이라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누구는 웅덩이에 있고 누구는 언덕에 있다. 각자 다른 세상에서 어쨌든 노력하며 아무튼 불공평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 제발 세상이 좋아졌다느니 젊은 애들이 문제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으면 좋겠어. (「일요일」, 26쪽)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가장 빛나고 영롱했다. 분명 지금의 아이들도 그러할 텐데, 우리는 자꾸만 무엇을 놓치고 실수를 반복한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하면서 더 나은 쪽으로 가기를 원하면서 아이들의 바람도 다르지 않다는 걸 왜 어른들은 방관하는가. 반성의 시간이 길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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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20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성화고 실습생들의 여러 차례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분노와 무력감을 번번히 느낍니다. 이 시대의 10대들이 안정감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는 어려운걸까요? 어른으로서 마음이 아픕니다.

자목련 2022-04-22 10:38   좋아요 1 | URL
어른이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현실, 부끄럽지요.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놓치는 게 아닐까 싶어요.

mini74 2022-04-20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을 착취하는 사회가 참 슬프네요.ㅠㅠ

자목련 2022-04-22 10:35   좋아요 1 | URL
네, 고통을 안겨준 일들이 소설로 다시 복기 되는 사회, 아프네요.

물감 2022-04-20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진영의 작품을 읽으면 과거로 꼭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되게 묘한 작가에요🙂

자목련 2022-04-22 10:34   좋아요 3 | URL
물감 님의 댓글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제가 읽은 최진영의 소설이...

새파랑 2022-05-07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당선 축하드려요. 예전에도 최진영 작가님 글로 당선되셨던거 같은 기억이 있네요 ㅋ (아닌가? ㅎㅎ) 즐거운 주말보내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2-05-09 09:10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 감사하빈다. 저도 축하드려요.
최진영 작가의 소설은 뭔가 묘한 끌림이 있어요. 좋아하는 것과는 살짝 다르다고 할까요. ㅎ

mini74 2022-05-07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디 자목련님 *^^*

자목련 2022-05-09 09:09   좋아요 1 | URL
저도 축하드려요.
맑은 5월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2-05-07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자목련 2022-05-09 09: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겁고 기쁜 하루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2-05-07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2-05-09 09:08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환한 하루 시작하세요^^

러블리땡 2022-05-0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력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ㅎㅎ 트리플시리지 정말 좋아하는데 ㅎㅎ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2-05-09 09:08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트리플 시리즈, 저도 더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강나루 2022-05-0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자목련 2022-05-09 09:07   좋아요 2 | URL
강나루 님, 감사합니다.
저도 축하드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개정판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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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음복>이 유난히 좋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강화길을 소설을 챙겨 읽지는 않는다. 김초엽의 <인지 공간>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계속 이어진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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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슬픔에 관할 수 있는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설령 슬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해도 그건 그의 고유한 영역이다. 슬픔을 달래고 이겨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슬픔을 달래고 이겨내는 방법이나 방식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오수영의 에세이 『긴 작별 인사』 은 그런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상실과 애도에 대해 어떤 말이나 행동이 아닌 기록으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며 개인적인 고백이다. 그러나 상실과 애도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기에 누구도 피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모두의 기록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책에서 지칭하는 ‘그녀’는 저자의 어머니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간의 기록이다. 처음 ‘그녀’의 등장에 나는 연인이 아닐까 섣부른 짐작을 했다. 그러나 곧 글에서 등장하는 ‘그’가 저자의 아버지라는 걸 눈치챘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자 남겨진 아버지와 아들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슬픈 세상의 풍경, 하루가 음소거 상태로 흘러간다. 소란스러웠던 세상이 고요하다. 차들이 빼곡한 도로와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나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다. 다채롭던 세상에 흑백만 남는다. (19쪽)


상실의 아픔과 슬픔은 어떻게 표출되는가. 큰 울음으로 요란스럽게 공간을 메울 수도 작고 오랜 흐느낌으로 바닥에 내려앉을 수도 있다. 저자처럼 고요한 짧은 메모와 사유로 일상을 채울 수도 있다. 그 슬픔은 너무도 차분하고 내밀해서 읽는 내내 숨소리도 크게 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예감하지 못한 이별, 부정하고 싶은 작별, 코로나로 인해 병원 면회를 할 수 없는 현실. 장례식장에서 집으로 돌아봐 그녀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을 마주하는 일은 이제껏 일어난 일들이 꿈이 아닌 실재라는 걸 알려준다. 곳곳에 남겨진 어머니의 메모, 쉽게 치워버릴 수 없는 것들. 경험한 이들은 경험한 대로 유품 정리에 대해 조언하고 남겨진 삶에 대한 당부를 건넨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실감하는 건 다르기에 그것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정리할 거라며 자꾸 미루는 아버지를 탓할 수 없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먼저 겪어본 사람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다 잊은 것처럼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서 언뜻 슬픔이 비치는 건 각자의 ‘그날들’이 남기 흉터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49쪽)


직장으로 돌아온 저자가 아무렇지 않게 일에 적응하고 춤을 배우고 취미 생활을 하는 아버지가 일상에 복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어머니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서로가 느낄 수 있다. 셋이 차지했던 공간에 둘이 앉아 밥을 먹고 셋이 함께했던 자리에 둘이 나타났을 때 상대는 그들을 기억하지만 한 사람의 안부는 묻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부재를 인식시킨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다만 가까운 이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구태여 의식하지 않을 뿐. 슬픔은 늘 곁에 있었다. 우리가 외면한 슬픔의 세상을 배회한다.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면서. (103쪽)

결국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녀의 물건과 흔적들은 조금씩 정리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부재를 인정하고 살아간다. 슬픔이 작아졌거나 사라진 건 아니다.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는 소중한 이의 자리는 우리의 곁에 있다.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자주 접하는 날들이기에 저자의 글은 누군가의 시간이 된다. 지난 나의 시간과 겹쳐진다. 절대 회복될 것 같지 않았던 절망으로 채워진 시간들. 


한 사람의 개인적인 슬픔과 상실의 기록인 오수영의 『긴 작별 인사』를 읽노라면 델핀 오르빌뢰르의 『당신이 살았던 날들』이 자꾸 겹쳐진다. 슬픔이 남긴 상실과 애도의 시간은 어떻게 채워질까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때로 두렵고 공포스럽지만 어느 죽음도 하찮게 여길 수 없음을 느낀다.


부재로 인해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 역시 언젠가 부재로 존재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부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간다. 어디에도 당연한 죽음은 없고 모든 죽음은 사고라고 했던가. 절망과 고통에 익숙해져 살아간다는 건 슬픔이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죽음은 말을 벗어나는데, 죽음이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 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 139쪽)


시간이 지나 우리는 조금씩 잊는다. 마치 그게 당연한 삶의 진리인 것처럼.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와 바람은 끊어지지 않는다.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작별을 생각한다. 나의 부모, 나의 형제와 나눈 작별. 쓸쓸하고도 외로운 작별을 생각한다.


의도하거나 그렇지 않은 이별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작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헤어짐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죽음을 연기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단호한 죽음 앞에 모든 건 부질없다. 다만, 우리는 끝나지 않을 애도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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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8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0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05-07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두번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리뷰는 슬프지만 오늘은 즐거우시길 바라겠습니다~!!

자목련 2022-05-09 09:11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처럼 파랗고 맑은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5-0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2-05-09 09: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