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슬픔에 관할 수 있는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설령 슬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해도 그건 그의 고유한 영역이다. 슬픔을 달래고 이겨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슬픔을 달래고 이겨내는 방법이나 방식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오수영의 에세이 『긴 작별 인사』 은 그런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상실과 애도에 대해 어떤 말이나 행동이 아닌 기록으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며 개인적인 고백이다. 그러나 상실과 애도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기에 누구도 피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모두의 기록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책에서 지칭하는 ‘그녀’는 저자의 어머니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간의 기록이다. 처음 ‘그녀’의 등장에 나는 연인이 아닐까 섣부른 짐작을 했다. 그러나 곧 글에서 등장하는 ‘그’가 저자의 아버지라는 걸 눈치챘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자 남겨진 아버지와 아들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슬픈 세상의 풍경, 하루가 음소거 상태로 흘러간다. 소란스러웠던 세상이 고요하다. 차들이 빼곡한 도로와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나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다. 다채롭던 세상에 흑백만 남는다. (19쪽)


상실의 아픔과 슬픔은 어떻게 표출되는가. 큰 울음으로 요란스럽게 공간을 메울 수도 작고 오랜 흐느낌으로 바닥에 내려앉을 수도 있다. 저자처럼 고요한 짧은 메모와 사유로 일상을 채울 수도 있다. 그 슬픔은 너무도 차분하고 내밀해서 읽는 내내 숨소리도 크게 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예감하지 못한 이별, 부정하고 싶은 작별, 코로나로 인해 병원 면회를 할 수 없는 현실. 장례식장에서 집으로 돌아봐 그녀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을 마주하는 일은 이제껏 일어난 일들이 꿈이 아닌 실재라는 걸 알려준다. 곳곳에 남겨진 어머니의 메모, 쉽게 치워버릴 수 없는 것들. 경험한 이들은 경험한 대로 유품 정리에 대해 조언하고 남겨진 삶에 대한 당부를 건넨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실감하는 건 다르기에 그것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정리할 거라며 자꾸 미루는 아버지를 탓할 수 없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먼저 겪어본 사람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다 잊은 것처럼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서 언뜻 슬픔이 비치는 건 각자의 ‘그날들’이 남기 흉터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49쪽)


직장으로 돌아온 저자가 아무렇지 않게 일에 적응하고 춤을 배우고 취미 생활을 하는 아버지가 일상에 복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어머니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서로가 느낄 수 있다. 셋이 차지했던 공간에 둘이 앉아 밥을 먹고 셋이 함께했던 자리에 둘이 나타났을 때 상대는 그들을 기억하지만 한 사람의 안부는 묻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부재를 인식시킨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다만 가까운 이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구태여 의식하지 않을 뿐. 슬픔은 늘 곁에 있었다. 우리가 외면한 슬픔의 세상을 배회한다.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면서. (103쪽)

결국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녀의 물건과 흔적들은 조금씩 정리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부재를 인정하고 살아간다. 슬픔이 작아졌거나 사라진 건 아니다.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는 소중한 이의 자리는 우리의 곁에 있다.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자주 접하는 날들이기에 저자의 글은 누군가의 시간이 된다. 지난 나의 시간과 겹쳐진다. 절대 회복될 것 같지 않았던 절망으로 채워진 시간들. 


한 사람의 개인적인 슬픔과 상실의 기록인 오수영의 『긴 작별 인사』를 읽노라면 델핀 오르빌뢰르의 『당신이 살았던 날들』이 자꾸 겹쳐진다. 슬픔이 남긴 상실과 애도의 시간은 어떻게 채워질까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때로 두렵고 공포스럽지만 어느 죽음도 하찮게 여길 수 없음을 느낀다.


부재로 인해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 역시 언젠가 부재로 존재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부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간다. 어디에도 당연한 죽음은 없고 모든 죽음은 사고라고 했던가. 절망과 고통에 익숙해져 살아간다는 건 슬픔이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죽음은 말을 벗어나는데, 죽음이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 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 139쪽)


시간이 지나 우리는 조금씩 잊는다. 마치 그게 당연한 삶의 진리인 것처럼.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와 바람은 끊어지지 않는다.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작별을 생각한다. 나의 부모, 나의 형제와 나눈 작별. 쓸쓸하고도 외로운 작별을 생각한다.


의도하거나 그렇지 않은 이별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작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헤어짐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죽음을 연기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단호한 죽음 앞에 모든 건 부질없다. 다만, 우리는 끝나지 않을 애도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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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8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0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05-07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두번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리뷰는 슬프지만 오늘은 즐거우시길 바라겠습니다~!!

자목련 2022-05-09 09:11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처럼 파랗고 맑은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5-0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2-05-09 09: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