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달력이 도착했다. 달력을 넘기지 못했다. 빨리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과 2014년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똑같게 나눠졌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2014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많이 기울고 있다. 내년이라는 지우개가 지난해를 깨끗하게 지워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줄 거라 믿어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한 해였지만 아득하게 느껴지는 일 년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아니고 그저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무탈’이라는 말이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온 해가 또 있었을까. 온 나라에 스며든 슬픔에 비하면 개인적으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평범한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기적인 마음은 절대적인 위로가 필요하다. 부재를 인정하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상처는 버릴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날들을 살기에도 버거웠다. 그것이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하루임에도 말이다.

 

 가끔씩 생각한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누구라도 붙잡고 따지고 싶다. 지난 5월 검사를 위해 입원한 아버지가 사흘 만에 눈을 감았을 때 우리는 내심 안도했다. 아버지의 고통을 빌미 삼아 신과 타협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삶이라는 오늘을 살아내고 견디는 것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4월의 빛나는 바다와 5월의 눈부신 푸름을 지나 한 해의 끝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코미디에 웃고 드라마에 우는 날들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슴에 송곳처럼 박힌 2014년을 돌아보며 선뜻 어떤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넬 수 없다. 저마다의 절망과 분노를 알 수 없기에 말이다. 그저 오늘을 살아내는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짐작할 뿐이다. 여기 세 권의 책이 들려주는 다양한 생이 그렇듯 말이다. 책과의 만남에도 타이밍과 인연이 있는 건 아닐까. 염승숙의 『그리고 남겨진 것들』은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선물처럼 다가왔다. 마냥 신 나는 밝은 소설이 아닌데 묘한 뜨거움이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은 열 개의 이야기는 상실과 부재를 인정하라고 손을 잡아주고 다독인다.

 

 아버지의 등에 소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습濕」) 외톨이였던 누군가는 죽어 벽돌이 되어 그리운 이를 지켜보며 살아가고(「그리고 남겨진 것들」) 사라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은 노래를 듣고 요리는 하며 홀로 살아간다(「노래하는 밤 아무도」). 바쁘다는 이유로 가까운 이들의 얼굴을 잊어버리며 살아가고(「양의 얼굴」) 부와 권력으로 삶의 경계가 이뤄지듯 청력에 따라 구역이 나눠질 수 있다는 미래(「눈물이 서 있다」)는 서글프고 섬뜩하다.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들은 오늘을 살아내고 있었다. 때로 과거의 기억과 사라진 당신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도 견디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언젠가는 곁에 있는 모두가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 후에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혼자라는 고독과 소멸하는 삶뿐이라 여기는 나와 당신에게 이런 구절은 힘이 된다. 결국 저마다의 생을 살아가는 걸 알기에.

 

 ‘혼자가 아닌 거야. 누구라도,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과 함께 식사하는 거야.’(89쪽) 

 

 한 번씩 그립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눈물 흘릴 나만의 밤과 손을 잡아주며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가 간절하다. 이름만 들어도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공간은 아프다. 이광호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에서 만나는 용산이 아린 것이다. 용산이라는 지명이 지닌 의미가 노란 리본의 팽목항과 겹쳐지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상실과 부재의 크기와 모양은 다르다. 그러나 그곳에 고인 슬픔과 그곳을 지키는 이들의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를 잊게 된다는 것’은 ‘네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153쪽) 란 분명한 사실이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거기 있었던 네가 한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점차 나의 오늘에서 아버지는 옅어진다. 이미 아버지의 공간은 사라졌고 함께 했던 시간은 번져 흐려진다. 자꾸만 이광호가 담아낸 용산을 펼쳐본다. 용산을 팽목항을 아버지를 간직하기 위해서.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후회로 채워진 오늘을 자책한다. 화분 속 마른 식물 같았던 아버지에게 작은 물방울의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끔뻑이던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 면회가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핑계이며 부질없는 탄식이다. 물론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완벽하게 살았을지 장담할 수 없다. 얼마나 더 살아야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에서 누군가의 삶을 통해 그 대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유년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자갈」)과 이별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이 비껴간 사랑(「아문센」)과 욕망을 절제하는 사람들(「일본에 가 닿기를」). 가장 가까운 가족과 화해하고자 노력하는(「디어 라이프」) 삶이 거기 있었다. 통찰과 관조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인식하지 못한 과거의 잘못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게 아닌가 자책하는 나와 당신에게 괜찮다고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생채기마다 흘러나오는 붉은 피도 언젠가는 멈춘다고 말이다. 살면 살수록 생이 어렵다는 걸 알지만 만회할 수 있는 생도 우리에게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어떤 오늘은 눈물로 채워지고 어떤 오늘은 피하고 싶은 날이 될지라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수많은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쪽)

 

 책을 읽는다. 습관처럼 때로는 의식적으로 읽는다. 좋은 책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어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세 권의 책이 내게 그랬듯 당신에게 그런 어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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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4-12-1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 너무 좋아요.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자목련 2014-12-14 23:09   좋아요 0 | URL
보물선 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

2014-12-14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4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12-1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기댈 어깨 같은 글을
자목련 님의 서재에서 만나고 갑니다.
좋은글 감사해요^^

자목련 2014-12-15 17:29   좋아요 0 | URL
아무개 님 빈약한 어깨를 꼭 안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가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 시인선 57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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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편안한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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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3
김이설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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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늘하고 아프지만 이전보다는 환한 느낌의 소설이라고 할까요. 김이설과의 첫 만남으로 추천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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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4-12-0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첫이면 괜찮을 듯.

자목련 2014-12-09 14:26   좋아요 0 | URL
네, 김이설 작가의 처음은 이 소설이 좋을 듯해요.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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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편린이 모여 만들어지는 삶, 그 삶의 내밀함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만난 건 정말 행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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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2-0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가슴 뭉클하게 하는 글이네요^^
집에 전시만 해놓았는데 당장 읽어야겠습니다.

자목련 2014-12-04 17:12   좋아요 0 | URL
세실 님도 행복하게 만나시길 바라요^^

라로 2014-12-04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얼마전에 이 책 사왔는데!!!기대기대

자목련 2014-12-04 17:12   좋아요 0 | URL
완전 좋았어요. 기대 이상으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댈러웨이 2014-12-04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단편집 읽고 다른 두권의 단편집

댈러웨이 2014-12-04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 샀어요. 아C, 잘못 눌러서 두 개로 올라가요. ;; <아문센> 좋았어요. ^^

자목련 2014-12-04 19:40   좋아요 0 | URL
단편집 <런어웨이>도 좋아요.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아직 읽지 못했어요.
여긴 세상이 하얀색으로 변해버렸어요. 나흘째 이어지는 폭설이라 이젠 좀 무서워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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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슬픔으로 가득한 올해 나희덕 시인의 시가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고마운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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