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안개가 걷히는 모습을 지켜본다. 가려졌던 것들이 보이는 시간. 새삼 새롭다. 거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존재하는 것을 보는 건 마치 새로운 세계가 등장하는 것처럼 기묘하다. 사라졌다가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세계가 우리가 모르는 우주 어느 곳에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우주를 상상하며 미세먼지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여전히 비를 기다린다. 선명하고 예쁜 노랑들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날들, 그 가운데 노랑 하나를 내 곁에 두는 일도 쉽지 않다. 뜬금없이 이런 문장을 읽고 옮긴다.
슬픔과 애도는 개인적인 것이다. 그 사람이 생전에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의 무늬와 빛깔이 저마다 다른 만큼, 그를 잃은 슬픔의 무늬와 빛깔도 서로 달라 개인적인 것이다. 물론 무늬와 빛깔이 서로 다르더라도 서로를 안아주고 토닥이며 슬픔을 공유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부모를 잃은 형제들 사이에도 그건 예외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금세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자신만이 홀로 남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남긴 빈자리와 공허를 감당해내야 한다.
슬픔과 애도가 개인적인 것이라 말은 그것이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란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슬픔과 애도가 늘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공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긴 하되, 그를 깊이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개인적인 슬픔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추상적인 슬픔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그를 애도하는 것이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이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애도의 사적인 공간을 존중해줘야 하는 이유다. (103~10쪽)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요.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175쪽)
내가 이 소설을 다시 구매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정작 소설을 읽을 때에는 보통의 죽음과 보통의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누구나 경험하는 계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다. 여름은 멀어졌고 가을도 이제 곧 사라질 것이다. 삶이 끝없이 계속될 거라 믿는 것처럼 난데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삶이다.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여도 애도는 계속된다. 삶과 함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삶이지만.
생에서 단 한 번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별들처럼 스무 살, 제일 가까워졌을 때로부터 다들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따금 먼 곳에 있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 말 역시 우스운 말이지만, 부디 잘 살기를 바란다. 모두들. (스무 살, 44쪽)
김연수의 소설을 읽은 시간은 기쁨이 충만하다. 스무 살로 기억하는 어떤 사람, 어떤 공간, 어떤 색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스무 살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 시기를 함께 한 그것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슬픔, 분노, 절망, 두려움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눈 사람들. 스무 살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어제와 오늘을 보내는 것들도 그렇다. 그 놀랍고 감사한 것들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