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시절은 영원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른이 되는 순간 보호는 사라진다. 육체적인 성장뿐 아니라 정신적인 독립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이가 아니더라도 결혼을 하게 되면 어른으로 대우한다.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서로에게 부여된 의무와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빠른 결혼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나는 봄에 없었다』, 『딸은 딸이다』를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 애거사 크리스티의 『두번째은 여자에게 두번째 생이라 할 수 있는 결혼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소설은 초상화가 래러비가 만난 서른아홉 살의 여자 셀리아의 인생이다. 절망의 순간과 맞닿은 셀리아가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연보라색 아이리스가 기둥을 휘감은 것 같은 아기방의 벽지. 유모가 있었고 셀리아의 전부가 되었던 엄마 미리엄과 다정한 아빠, 유쾌하고 친절한 할머니. 아름다운 정원이 있던 집에서 셀리아의 삶은 모든 게 완벽했다. 때문에 친구란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다. 셀리아에겐 엄마라는 가장 든든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셀리아는 읽기의 매력을 알게 됐다. 책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다. 요정과 마녀, 도깨비, 유령의 세계. 그녀는 요정 이야기에 홀딱 빠졌다. 현실 세계의 아이들 이야기는 별로 재미없었다.’ (50~51쪽)

 

 동화 속 행복한 공주였던 셀리아의 책 속엔 불행은 없었다.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셀리아는 두려움을 상대하지 않았다. 피아노와 성악을 배운 셀리아의 외모는 뛰어났고 만찬과 파티에서 만난 남자들의 청혼으로 이어졌으니까. 미리엄은 모든 엄마가 그렇듯 셀리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바랐다. 셀리아를 이해하고 감싸줄 남자를 찾았다. 하지만 셀리아는 결혼이라는 현실을 알지 못했고 박력 넘치는 군인 더멋을 선택했다.

 

 더멋에게는 영원한 소년 같은 기질이 있었다. 그 소년이 셀리아 안의 아이를 만났다. 그들은 인생의 목표, 내면세계, 성격이 전혀 달랐지만 놀이 친구를 원했고 서로에게서 그것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결혼생활은 놀이였고, 그들은 열심히 놀았다.’ (247쪽)

 

 평생 돌봄을 받았던 셀리아에게 결혼은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더멋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굳게 믿은 것이다. 모두가 그랬듯 더멋도 자신만을 바라보며 가족을 사랑하는 멋진 남편이 될 거라 기대했다. 딸 주디에게 최고의 아빠로. 그냥 보통의 삶을 원했고 나쁜 일은 타인의 몫이라 여기며 산다. 점점 가정에 소홀하는 더멋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그랬듯 셀리아는 그녀만의 이야기를 만들며 그 시간에 만족한다. 사실 누가 불행을 예비하고 살겠는가. 때문에 미리엄의 죽음으로 힘겨운 상황에 마주한 더멋의 외도에도 기다림으로 응수할 수 있었다. 어쩌면 셀리아가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선택한 결혼이기에 맏아들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감당할 수 없던 것이다. 셀리아는 소설 곳곳에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반추하는 것으로 성장이 아닌 도피를 선택한다.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추억과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려움을 상대하는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자라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두려운 일인가. 사람에게 다른 어떤 순간보다 더 자기 자신다운 특별한 순간이라는 게 있을까? 앞으로…… 앞으로 셀리아는 어디로 가게 될까……’ (354쪽)

 

 우리네 인생엔 목적지를 입력하면 소요 시간을 알려주는 길 찾기 앱이 없다. 다양한 길을 발견하고 걸어봐야 한다. 변화가 주는 놀라운 힘을 경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셀리아가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두번째 봄을 맞은 것처럼 말이다. 악재라 말하는 아홉 수를 견디고 다시 성장을 위해 돌아간 그녀. 셀리아를 통해 애거사 크리스티를 본다. 그랬다. 이 소설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자전적 소설이다. 초상화가 래러비가 그림이 아닌 글로 셀리아를 묘사하듯 추리소설가가 아닌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한 여자의 생을 읽는 것이다. 

 

 ‘그녀는 서른아홉 살에 돌아갔다…… 성장하기 위해……’ (412쪽)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상처와 좌절을 견디고 추리 소설의 여왕으로 두번째 봄을 맞은 그녀의 황홀한 비상은 우리에게 내면의 성장을 선물한다. 상실과 성장의 계절인 봄에 만난 애거사 크리스티는 다른 얼굴로 평온한 미소를 보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5-04-2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좋은 단어이지요.

자목련 2015-04-30 06:59   좋아요 0 | URL
^^*

뒷북소녀 2015-05-1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자목련 2015-05-12 06: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바람도 비도 잠잠한 아침이네요. 그곳도 그럴까요?
 
국수
김숨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김 숨 고유의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소설. 느리게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는 삶에 대한 이야기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월 23일 책의 날이다. 책의 생일지만 매년 이 날을 알려주는 건 서점이다. 4월에 책의 날이 있다는 건만 알뿐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한다. 책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수많은 책들. 도서관, 창고, 서점, 화장실, 침대, 기차 안, 지하철, 스마트 폰까지 펼쳐지거나 접히거나 사라지는 책들. 여전히 내게는 정리해야 할 책도 많고 읽어야 할 책도 많다.

 

 책의 날을 맞아 몇 권의 책을 생각한다. 그냥 떠오른 책이다. 가장 최근에 가장 나를 휘어잡은 책은 평범하면서 특별한 한 남자의 이야기 『스토너』, 많은 소설이 나와도 은희경과 하나로 인식되는 『타인에게 말걸기』, 같은 제목의 시집을 출판사, 디자인에 다르게 소장하게 된 정현종 시집 『견딜 수 없네』, 엄태웅의 서툰 연기와 나만의 곰스크를 생각나게 만드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 인생이라는 길고 긴 길을 걷는 우리네 삶 『이런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끝내 완독하지 못할 책과 사람들의 이야기 『젠틀 매드니스』,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에프』.

 

 

 

 

 

 

 

 

 

 

 

 

 

 

 

 

 

 

 

 『에프』의 이런 문장을 지나가고 있다. 의도하지(어쩌면 일부러 이 포스팅을 위해 이 부분에서 멈췄을지도) 않았는데 마침 책에 대한 내용이다.

 

 이반과 에릭과 나는 갈색 포장지의 봉투에 든 이 책을 각각 우편으로 받았는데, 발신이나 헌정의 말도 없었다. 책은 어느 곳에도 소개된 적이 없었고, 서점에서도 보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난 뒤에야 처음 이 책을 거리에서 보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나는 잠시 착각한 줄 알았다. 하지만 벤치에 앉은 나이 든 남성이 손에 이 책이 진짜 들려 있었고, 남자는 책을 읽는 동안 재미있는지 혼자 미소를 지었는데 자신의 실존을 두고 의심에 사로잡힌 게 분명했다. 나는 몸을 숙여 파란 단색 겉표지를 쳐다보았고, 남자가 불안하게 고개를 드는 바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86쪽)

 

 

 어떤 하루는 아주 더디게 지나고 어떤 하루는 정신없이 흐른다. 그런 하루가 모인 사월은 아프게 지나갈 것이다. 하루를 산다는 건 삶을 사는 것이고 하루를 산다는 건 죽음을 견디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산다는 건 위대한 일이다. 정현종 님의 시로 당신과 나의 하루의 안부를 대신한다.

 

 

 오늘 일들은 다 잘 됐는지.

 또 하루가 지났지.

 하루가 지나가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어떤 문답, 전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 정원 -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혜영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몽환적이고 비밀스런 공간 ‘노관’을 상상하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훗날 훗사람 문학동네 시인선 39
이사라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은 시간이라는 약을 처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