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강한 바람이 불었다. 16년 만에 수능 한파가 찾아온 것이다. 진짜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중얼거렸고 아침에는 쌀가루처럼 내리는 눈을 보며 첫눈이구나 생각했다. 내가 사는 소읍엔 수능이라 해도 출근을 늦추거나 등교 시간에 대한 변경이 없었다. 공무원이나 은행원들은 달랐겠지만 말이다. 주변에 고3이나 수능에 관련된 사람이 없다 보니 그저 춥다는 말이 지배한 하루였다.
저마다 11월 13일을 기억하는 방법은 달랐다. 누군가에게 오늘은 첫눈이 내린 날이며, 누군가에는 평범한 목요일이며, 누군가에게는 김장을 담근 날이며, 누군가에게는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는 날이다. 물론 내가 전태일 열사의 기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덕분에(부끄럽지만) 이런 책을 펼쳐보는 날이다.
‘머리채를 잘랐던 어머니는 흉한 머리를 감추기 위해여 한여름 내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일했다. 태일은 이른 새벽에는 여관을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고,낮이면 평화시장·남대문시장·중부시장 등에서 시다나 미싱보조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러 다녔다. 이렇게 하여 그해 가을 모자가 돈을 보태어 2,500원으로 헌 천막 하나를 샀다. 그 당시 남산 중턱에는 골격만 세워놓고 공사가 중단된 큰 아파트형의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건물 뼈대에다가 집 없는 사람들이 합판으로 각각 칸막이를 해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빈터라고는 옥상밖에 없었는데, 어머니와 태일은 옥상에다 천막을 쳤다. 밤이 되니 관리인이란 사람이 올라와서 철거하라고 하여 그날 밤만 사정사정하여 새우고, 그 다음날 새벽에 철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모자는 또다시 헤어져 돈을 조금 더 모아서 판잣집을 세내기로 하였다. 김장철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남산동 50번지의 한 판잣집을 사글세로 얻었고 오랜만에 어머니, 태일, 태삼 세 모자가 함께 살게 되었다.’ (87쪽)
그 시절을 몰랐던 혹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누군가의 삶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다가온다. 나 역사 다르지 않다. 이런 책을 통해서 그들의 시간을 불러올 뿐이다. 천막에서 살아야 하는 삶은 여전히 비닐하우스로 이어지고, 발끝이 닿지 않는 방 한 칸에서 살림을 사는 삶은 줄어들지 않았다. 진실이 아닌 것들이 진실로 보도되고, 권력과 부가 휘두르는 칼에 서민들은 깊고 큰 상처를 입는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어떤 것일까? 부자가 되는 것, 명예를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극소수가 바라는 삶이다. 아니 바란다고 될 수 있는 삶이라면 좋겠다. 그저 내 식구가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을 꿈꾼다. 아프면 참지 않고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는 세상, 잘못된 부분을 바로 인정하고 시정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맨 먼저 달려온 사람들은 늘 차별과 소외가 있는 곳에서 함께해온 헌신적인 사회단체 사람들과 고통받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랜드-뉴코아 여성 노동자들, 코스콤 비정규자들, 며칠 전 고공농성을 마친 GM대우 비정규직들, 재능교육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전국해고노동자투쟁위헌회 회원들, 그리고 시청 앞에서 성람재단 비리 해결을 위해 끈질기게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애우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의 권리를 넘어 전체 차별받는 이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이었다.’ (189쪽)
수능은 끝났고 출제경향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지 않을 시간이다. 시험을 치른 아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들 모두 특별한 하루가 된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멋진 꿈을 꾸며 잠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눈물을 삼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2014년 11월 13일을 기억하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분노나 절망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평범한 하루를 마치며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에 작은 감사와 평안의 조각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