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의 나날이다. 감자를 쪄서 먹고, 감자를 볶아 먹고, 감자로 찌개를 해 먹고, 노란 카레를 해 먹는다. 찐 감자를 주스와 함께 먹고, 찐 감자를 커피와 함께 먹고, 찐 감자를 시원한 물과 함께 먹는다. 밭에서 직접 감자를 깨고 싶다, 흙을 만지고 싶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하기 싫었던 일이 그리워지다니. 늙고 있다. ㅎ

 

 더위는 도둑처럼 일상을 훔친다. 밤마다 잠을 설친다.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한다. 작년에도 이랬던가, 아닌 것 같은데. 곧 사라질 더위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밀어낼 수밖에 없는 나날이다.

 

 이런 날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를 곁에 두고 뒤적인다. 좋아하는 시인을 생각하고, 아끼는 시를 찾는다. 시집으로 책장을 채우고 싶었던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겨우겨우 책장 한편에 놓인 시집이 전부다. 이름도 낯선 시인과 그의 시를 읽은 일은 묘한 떨림을 몰고 온다.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나는 그의 시집을 소장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시인의 이런 시 말이다. 최하림, 어디서 들었던 이름일까. 아니면 들었다고 착각하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다른 시인의 같은 제목의 시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저녁, 눈빨 뿌리는 소리가 들려

유리창으로 갔더니 비봉산 소나무들이

어둡게 손을 흔들고 강물 소리도 숨을 죽인다

나도 숨을 죽이고 본다 검은 새들이

강심에서 올라와 북쪽으로 날아가고

한두 마리는 처져 두리번거리다가

빈집을 찾아 들어간다 마을에는

빈집들이 늘어서 있다 올해도 벌써

몇 번째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집들이 지붕이 기울고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검은 새들은 지붕으로 곳간으로 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새들은 빈집에서

꿈을 꾸었다 검은 새들은 어떤

시간을 보았다 새들은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들어갔다

새들은 은빛 가지 위에 앉고

가지 위로 날아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들며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울었다

아아 해빙기 같은 소리 들으며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다

검은 새들이 은빛 가지 위에서 날고

눈이 내리고 달도 별도 멀어져간다

밤이 숨 쉬는 소리만이 눈발처럼 크게

울린다 「빈집」, 전문

 

 

 눈발을 뿌리는 소리를 상상해본다. 나는 그 소리를 짐작할 수 없다. 그 밤을 상상할 뿐이다. 기념 시선이 좋은 건 언제나 내가 모르는 시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잊고 있었던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은 65명의 시인들의 시를 두 편 씩 수록한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을 넘기면서 정현종의 시와 나희덕의 시와 문태준의 시를 그렇게 읽었다. 정현종의 시는 언제나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어떤 잘못을 해도 그 시안에서는 질책이 아닌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따뜻한 품처럼. 문태준의 「가재미」를  <낭독의 발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가슴을 타고 올라오던 무언가를 기억한다. 낭독의 발견 같은 프로그램이 다시 생겼으면 좋겠다. 요즘은 서점이나 북카페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는 행사지만 나는 아쉽다.

 

 시를 읽는 건 잠시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아닐까. 여기 있는 나를 접어두고 첫눈처럼 순수한 시간, 단풍처럼 화려한 시간, 새벽처럼 고요하고 정갈한 시간으로의 초대 말이다. 우리는 시를 통해 사랑을 마주하기도 하고, 혁명의 순간을 접하기도 하고, 세상을 읽기도 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시를 만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를 잃고 싶지 않다. 시를 잊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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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7-28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읽을 때는 주로 카페나 침대에서 읽는터라 감자를 먹으며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가끔 김밥이라던가 하는 작품을 읽을 때면 김밥을 먹으며 다시 읽어볼까 싶을때가 있긴하지만요^^;; 무덥다기 보다 습한 여름, 눈발을 뿌리는 소리를 상상하신다는 글귀에서 갑자기 ‘청량감‘이 느껴지는게 시가 아닌 이런 리뷰도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자목련 2017-07-31 18:21   좋아요 0 | URL
더운 여름이라서 겨울의 이미지를 마주하는 시에 눈이 갖는지도 모르겠어요. 리제 님의 댓글이 제게는 큰 도움을 주네요. 남은 여름 시원하게 보내세요^^

잠자냥 2017-07-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안 읽은지 꽤 오래 되었는데, 자목련 님의 이 글을 읽으니 문득 시가 읽고 싶어지는군요.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7-07-31 18:22   좋아요 0 | URL
시를 향한 열망이 사그라들고는 있지만 그래도 시집을 붙잡고 있어요. ㅎ
 

 

 초복이었던 어제는 삼계탕을 끓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모가 끓여서 보내준 냉동 삼계탕을 데워 먹었다. 삼계탕을 먹는 내내 땀을 흘렸다. 여름이, 여름이, 이렇게 나를 지배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인공적인 바람을 피하게 된다. 나이가 드는 거라고, 늙는 거라고 친구와 지인에게 말했다. 타국에 계신 선생님의 문자도 받았다. 초복이라서 닭에 대한 유머를 보내셨다. 선생님이 계신 곳은 이곳보다 더 습하고 더운 날이 많다. 이 더위를 건강하게 보내자고 선생님과 다짐 비슷한 인사를 나눴다. 병원에 다녀온 일은 정기적으로 의사를 만나는 일로 결론이 났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를 오간 날들이 지나간 것이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정상은 무엇이며 비정상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는 게 병이라는 말과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 중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저울질하기도 했다. 역시나 이런 일도 늙는 과정이구나 혼자 결론을 내었다. 늙는다는 말이 슬프다고 서럽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나는 점점 그 말에 친근함을 느낀다. 젊어질 수는 없으니까.

 

 매일 조금씩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데, 오랜만에 통화한 분과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은 이 포스팅은 그 말씀 때문이다. 기쁘고 감사하게 살고 있다는 말씀이다. 감사하다는 말은 습관처럼(때로 진정성이 없을 때도 있다는 말이다) 하는데 기쁘다는 게 단짝처럼 붙으니 전혀 다른 메시지로 전해졌다. 그러니까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좋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할까. 그냥 묘하게 그 말이 계속 생각난다. 기쁘고 감사하게, 즐겁고 감사하게, 건강하고 감사하게!

 

 책을 좋아하는 동생과 통화를 하면서는 이런저런 책 이야기를 하게 된다. 엊그제는 리커버 한정판 시집에 대해 말했다. 구매를 하느냐, 마느냐 그런 이야기다. 소장하고 있는데 예쁘니까 사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 시집은 이렇다. 박 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은규의 『다정한 호칭, 장석남의 『고요는 도망하지 말아라이미 곁에 둔 시집인데 한정판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야 할까? ㅎ

 동생이 추천해 준 책과 관심 있는 책을 검색하다 보니, 같은 출판사라 괜히 신기했다. 『마음을 흔드는 글쓰기』,『라틴어 수업』과 함께 리스트를 작성하는 책은 시집이라는 이유로, 문학과 지성 시인선 500선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나저나 신철규 시집은 언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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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도예배를 하루로 지정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각각 드리고 부모님만 그렇게 정했다. 아버지의 기일이 먼저라 그날에 예배를 드렸다. 그러니 엄마의 기일은 알람만 울리고 말았다. 바쁜 농번기라서 논일을 마친 가족과 짧은 예배를 드리고 저녁을 먹었다. 그 즈음에 작은아버지의 입원 소식이 들렸고 뒤를 이어 작은언니가 입원을 했다. 건강은 자신할 수 없다고 하지만 가족의 입원 소식은 소나기처럼 쉽게 그치지 않았다.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다. 그때를 몰라서 그때를 알고도 미루고 싶은 심경이다. 점점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산다. 하여 어느 날엔 모든 게 공포다. 매일 전해지는 사고 소식에도 혹 그 사고에 내가 아는 이의 이름이 있을까, 노파심이 생길 정도다. 하루하루를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그런 생각마저 하고 만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투병, 누군가의 사고 소식에 가슴이 쪼그라드는 일. 죽음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일까. 하여 이런 소설을 읽을 때 마음이 복잡하다.

 

 마동수(馬東守)는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18번지에서 죽었다.’ (7쪽)

 

 때때로 소설은 현실과 한 몸으로 포개진다. 꾸며낸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 어떤 소설 속 인물의 삶은 우리네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기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단문의 힘이 아름다운 김훈의 소설 『공터에서』를 읽으면서 내 아버지, 어머니가 떠오른 건 나만이 아닐 터.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지독한 현실을 담담히 써 내려간 김훈의 마음에 자리한 삶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확한 시각과 장소, 아마도 독자는 저마다 그 죽음을 상상할 것이다. 친절하게도 김훈은 마동수의 투병 과정을 상세히 전달한다. 손 닿는 곳에 죽음을 두고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는 듯 묘사한다. 늙고 병든 우리네 아버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죽음을 마주한 삶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쓸쓸하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아내 이도순은 고관절에 금이 가 병원에 있었고 휴가 나온 둘째 아들 마차세도 자리를 비웠다. 가족도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한 마동수. 고독사 아닌 고독사였다. 죽는 순간까지 용서는커녕 화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어디에나 있다. 괌에서 사업을 하는 큰아들 마장세 없이 마차세 홀로 장례식을 치른다. 잘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조문을 왔고 하춘파 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내 아버지 세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고 전쟁을 겪었고 잘 살겠다고 하루를 이틀처럼 살았던 세대.

 

 한 사람의 생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생은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시대가 원하는 삶기에는 역부족했고 시대를 이끄는 삶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마동수, 마장세, 마차세. 세 부자의 생을 해 만나는 현대사는 쓸쓸하고 고된 삶을 증명하는 듯하다. 아버지의 부재는 아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마장세의 삶을 보면 그의 가슴에 맺힌 아버지의 상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다시 괌으로 떠나 멋진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의 감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버지가 있는 땅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 부유하다 결국엔 돌아오는 인생,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소설을 이끄는 마차세와 그의 아내 박상희는 가장 현실적인 역할이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지금, 먹고사는 문제가 전부는 아니지만 여전히 생을 지속하는 게 가장 힘들다. 그럼에도 그의 아내 박상희는 마차세를 위로하고 미래를 꿈꾸도록 도와준다. 멀리 외국에 있는 마장세와 연락을 취하는 일도 그녀다. 점점 죽은 아버지와 서로를 닮아가는 형제. 『공무도하』, 『내 젊은 날의 숲』에서 이미 만났던 공허한 생을 김훈은 들려준다. 거창하게 삶의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 아닌 살고 있다는 게 삶을 증명하는 이들의 이야기. 아름다운 문장으로 채워진 『내 젊은 날의 숲』에서도 이혼을 한 안요한과 자폐성향의 아들, 그들은 세상과 단절한 듯 사는 아버지와 부자가 등장한다. 감옥에 다녀온 아버지와 꽃을 그리는 딸과의 관계.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과 딸로 태어났지만 반드시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마동수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좀 더 보여주었더라면 그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갔을까. 아버지의 삶이 이렇게 힘들었다고, 아버지가 산 시대는 그랬다고.

 

 ‘마음의 일은 말하기 어렵다. 마음의 나라는 멀고 멀어서 자욱하다.’, 저절로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일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다.’ (『내 젊은 날의 숲』중에서)

 

 그래서 우리는 미련하고 미련하여 아버지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지 못한 나이를 살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냈는지 실감하게 된다. 모든 삶이 그렇게 대물림되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를 살든 말이다. 아무리 달아나려 해도 제자리걸음이다. 산다는 건 참 힘겨운 일, 나보다 훨씬 고달픈 시대를 살았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운 날들이다.

 

‘아버지는 삶에 부딪혀서 비틀거리는 것인지 삶을 피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마장세는 알 수 없었지만, 부딪히거나 피하거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늘 피를 흘리는 듯했지만, 그 피 흘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삶의 안쪽으로도 진입하지 못하고 생활의 외곽을 겉돌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노새나 말, 낙타처럼 먼 길을 가는 짐승 한 마리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얼씬거리다가 그 너머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이 세상이 다시는 지분덕거릴 수 없는 자리로 건너갔다는 것은 어쨌든 아버지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막상 죽음의 소식을 받고 보니 아버지가 건너간 자리는 아주 가까워서 아버지는 가지 않고 다시 이쪽으로 건너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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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10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딱히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어찌어찌하여
계속 읽게 되네요.

다른 건 몰라도,
흡입력 있는 서사 하나만큼은 인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자목련 2017-07-10 17:05   좋아요 0 | URL
저도 어느 순간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해요, ㅎ
그래도 읽고 지나가야 하는 작가로 남았어요.
화장, 폐경, 이런 소설을 특히 좋아하면서도 말이에요.

얄라알라 2017-07-10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공터에서 새벽까지 너무 뜨거운 마음으로 읽었네요 자목련님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7-07-13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북사랑 님, 반갑습니다. 누군가의 생을 읽는다는 거, 소설이지만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어요.
더위, 시원하게 보내세요^^
 

 

 게으름이 장마처럼 쏟아졌다. 7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날 새벽 기도에서 목사님의 말씀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믿음과 기도에 관한 것이었지만 일상생활에 더 적용할 수 있는 있었다. 착실하게 쌓아둔 내실이 있어야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것.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결국 10일 지나서야 기록한다.

 

 기다렸던 장마는 조금 더디게 왔다. 그나마도 이곳엔 많은 비가 내리지 않아 걱정이다. 부족한 곳에는 비가 부족하게 내리고 넘치는 곳에는 더 넘치게 내리는 비라니. 비와 함께 찾아온 습기와의 전쟁에서 나는 패했다. 제습기를 돌리고 보일러를 켜도 내 몸 어딘가에 불필요한 습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여름을 좋아하는 나인데, 올여름이 살짝 미워진다.

 작은언니는 퇴원을 했고 복직을 했다. 다 나은 게 아니라 힘든 일과를 보내고 있다. ​주말마다 치료를 받으러 서울로 향하고 목 디스크와 함께 살아간다. 올해는 튼튼해지는 해일까. 작은언니와 마찬가지로 다른 이유로 병원을 찾은 나와 작지 않은 접촉사고로 병원 신세를 진 동생까지. 훗날 올여름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충분할 터.

 

 습기, 더위, 장마를 핑계로 나의 산책은 멈춤이다. 하여 이런 자귀나무를(하루 이틀 미뤘더니 결국 이 꼴이다) 담았다. 올해의 자귀나무. 눈꽃처럼 흩날리던 자귀나무 꽃이 아니다. 나무그늘 아래에는 자전거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옆에는 작은 벤치도 있어 평온한 일상처럼 보인다.

 

 

 

 

 그래도 게으른 책읽기는 이어졌다. 곧 개봉할 영화 <군함도>와 동명의 소설인 한수산의 『군함도』를 읽었고 김애란의 단편집도 읽었다. 기다리는 신철규의 시집은 아직이고, 기다리지 않은 하루키의 소설『기사단장 죽이기』는 예판 중이다. 최진영의 소설『해가 지는 곳으로』는 어떨까? 『구의 증명』과 같은 맥락처럼 여기지도 하는데. 읽어야만 알겠지. 남은 7월의 계획은 여유가 없다. 이미 게으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곧 장마는 끝이 날 것이고, 반짝반짝 더위가 오겠지. 능동적인 여름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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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10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읽기의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중입니다.
비가 오니 더더욱 책을 읽지 않을 핑계가 생긴
다고나 할까요.


자목련 2017-07-10 17:05   좋아요 0 | URL
앗, 레삭매냐 님도 비를 핑계로 게으름을 부리시다니. 동지를 만난 듯 반가운 기운이 넘쳐요^^

나와같다면 2017-07-10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초록 가득한 나무처럼 생명력 가득하시기를..

언니분도, 동생분도, 그리고 자목련님도

자목련 2017-07-10 17:06   좋아요 0 | URL
아, 나와같다면 님의 댓글로 튼튼해지고 건강해지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 님도 더운 여름 시원하게 보내세요!!
 

 

 전등 스위치가 고장 났다. 미리 신호를 보낸 건 아니다. 아니 내가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제멋대로 불이 켜지고 리모컨은 먹통이 되었다. 건전지를 새것으로 바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관리사무소 직원이 다녀갔다. 리모컨이 아닌 일반 스위치로 교체했다. 낮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잠들기 직전이 가장 불편하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바로 리모컨으로 불을 끌 수 없으니 일어나서 벽까지 걸어가서 불을 끄고 돌아와야 한다. 다시 불을 켜야 할 일이 생기면 다시 어둠을 헤엄쳐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벽까지 걸어간다. 그동안 편하게 지냈던 것.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만 아직은 그 과정에 있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불을 켤까 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생겼다.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이다. 짧거나 조금 긴 시간, 나는 어둠에 스며든다. 휴대전화로 시각을 확인하고 불빛이 사라진 후 혼자 깨어있다는 생각과 함께 묘한 감정이 발생한다. 가만히 누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과 친해진 시간을 만난다. 그런 밤이 계속되면 조금은 외로울 것 같다. 그런 밤이 깊어지면 적막과 슬픔을 느낄 것 같다. 그런 밤을 상상한다. 쓸쓸하면서도 오묘한 밤을 말이다.

 

 어린 시절에는 밤은 무조건 무섭기만 했다. 부모님이 외출을 하셔서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집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정말 무서웠다. 빨리 잠들기 바랐던 시절이다. 내일이 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학창시절, 연애시절에는 영원한 밤을 꿈꾸기도 했다. 이 밤이 사라진다는 게 아쉬워서, 낮보다 아름다운 밤의 끄트머리를 꼭 잡고 싶었다. 잠들고 싶어도 잠들지 못하는 밤은 괴롭다. 이런저런 이유로 잠과 멀어지는 밤. 이상하게도 그런 밤에는 책도 들어오지 않는다. 혼자 밤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혼자가 익숙한 이라도 밤은 묘하게 다가온다. 밤은 감정이 자라는 시간이며 공간이다. ​혼자 있어도 괜찮던 낮과 다르게 많은 생각이 몰려온다. 그 밤을 누군가의 곁에서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밤을 견뎌내는 일,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9쪽)

 

 『축복』의 작가 켄트 하루프의 유작인 『밤에 우리 영혼은』을 읽노라면 노란 빛이 퍼지는 밤을 상상하게 된다. 각자 아내와 남편을 잃은 두 노인이 함께 나누는 밤.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 남편과 사별한 애디가 이웃집 노인 루이스를 찾아가 밤을 함께 보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밤을 함께 보내는 일이다. 어떤 관계를 시작하자는 게 아니라, 침대에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일이다. 밤이 가장 힘들지 않냐는 애디의 말에 루이스는 잠옷과 칫솔을 가지고 밤마다 이웃집으로 온다. 서툴게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는 애디와 루이스. 처음에는 할 말이 없었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한다. 지나온 삶에 대한 깊은 슬픔, 단단하게 묶여진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놓으며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위로한다. 힘든 밤은 사라지고 충만한 밤이 시작된 것이다. 혼자가 아닌 둘이 맞이하는 밤이 겹쳐질수록 외로움이 사라진 자리에 기쁨이 채워진다.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 (102쪽)

 

 그저 어제와 오늘로 반복하던 하루가 특별한 하루가 되는 것이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내 목소리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삶을 충만해진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애디의 손자가 합류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집에 온 상처받은 어린 손자는 자연스럽게 애디와 루이스의 삶에 기쁨을 안겨준다. 손자를 차에 태우고 캠핑을 가고 개를 만나러 가고 둘에서 셋으로 즐거움이 확장된다. 그러나 애디와 루이스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만족하는 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녀들은 불쾌함을 토로한다. 손자를 맡긴 애디의 아들이 가장 크게 화를 냈고 결국 둘은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만다.

 

 어쩌면 애디와 루이스의 남은 생은 외로운 밤만 계속되는 건 아닐까. 환하게 빛나는 낮과 같았던 날들은 지나갔고 길고 긴 밤만이 지속되는 생. 그 밤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저무는 삶은 다른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 애디와 루이스는 원하는 대로 능동적으로 살려고 방향을 바꿨지만 자녀들로 인해 수동적인 삶으로 복귀했다. 누구나 늙고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애디와 루이스의 우정은 얼마나 고위한가. 사는 게 뭐라고, 당당하게 즐기며 살자고 말하는 사노 요코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243쪽)

 

 유방암에 걸렸다고 당장 식생활을 바꾸거나 의기소침하는 게 아니라 담배를 피우고 남들 시선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한국 드라마를 열렬히 시청하고 한국을 방문하며  DVD를 모은다. 사는 게 뭐라고 남들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할까. 사는 게 뭐라고 말이다. 그들이 나의 삶을 사는 게 아닌데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인데.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무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는 게 별거 아니니 즐겁게 신나게 살기를, 그것이 사오 요코의 인생철학인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참으로 멋진 인생이다.

 

 우리의 생은 점점 낮이 아닌 밤으로 채워진다. 낮보다 아름다운 밤을 위한 삶을 기대할 수 있다면 밤은 두렵지 않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밤. 그런 찬란한 밤에 우리 영혼은, 모든 것을 감싸는 웅장한 힘을 발휘한다. 당신과 연결되는 밤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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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6-2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오려나봐요. 날씨가 덥네요.
자목련님 시원하고 기분좋은 하루 되세요.^^

자목련 2017-06-29 11:49   좋아요 1 | URL
매일 비를 기다려요. ㅎ
서니데이 님도 청량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