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다 버리고 싶어도 내 인생
하수연 지음 / 턴어라운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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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인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 날 때도 있다.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고 말이다. 남들은 다 잘 살고 있는 건  같은데 말이다. 내 고민이 제일 크고, 내 상처가 제일 깊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말해 뭐 할까,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를 키우고 누군가 저마다의 삶을 살아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걸 잊고 산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목도하고서야 비로소 내 삶의 안위에 감사한다. 큰언니의 죽음 후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감사함을 말하곤 했다. 어느 순간 그 감사는 사라지고 불평은 늘어난다. 내가 원하는 삶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닌데 왜 이 모양으로 사는지 우울해진다. 그러다 또 정신을 차린다. 둘러보면 감사할 일이 넘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수연의 갖다 버리고 싶어도 내 인생』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는 나를 혼내는 것 같았다.

 

어떤 책은 읽기 힘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면에서는 이 책도 일정 부분 그렇다.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낸 책,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는 하루하루의 기록, 감당할 수 없는 통증으로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마음, 그것들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지켜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까지 담겼다. 졸업작품 전시회로 바쁜 미대생, 졸업을 하면 어떤 일상이 펼쳐질까. 그 기대만으로도 삶이 충만했을 것이다. 그저 피곤함이라 여겼던 증상들이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니.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제주도에서 서울로 달려와 치료에 매달렸다. 빠른 진로를 찾기 위해 검정고시를 선택했고 15살에 대학생이 되었다. 스물도 되기 전에 6개월 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은 어떻게 들렸을까?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고 투병이 아닌 재생불량성 빈혈을 친구로 생각하기로 했지만 쏟아지는 울음을 참을 수 있었을까. 수혈을 위해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마주한 위급한 상황에 저자의 마음은 우리를 모두 그곳으로 이끈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바로 곁에 생사를 오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분명 나도 죽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한 사람을 눈앞에서 보니 내가 한때 바랐던 죽음을 잠시나마 들여다본 느낌이어서 마음이 걷잡을 수없이 흔들렸다.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단지 내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일이 엉켰다고, 조금 힘들다고 죽고 싶다는 말을 쉽게 입에 올렸던 지난날의 내가 부끄러웠다. (120쪽)

 

빈혈은 흔한 질병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재생불량성이다. 수혈을 받아야 하고 복용하는 약은 몸을 이전과 다른 몸으로 이끈다. 구토, 설사, 열, 동반할 수 있는 모든 증상이 발생한다. 골수이식을 위한 길도 멀다. 공여자를 찾기도 어렵고 찾는다 해도 기증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사실, 드라마나 방송을 통해 잠깐 보고 들은 게 전부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재생불량성 빈혈’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다. 항생제 부작용에도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항암과 골수이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책은 이처럼 ‘재생불량성 빈혈’에 대한 아주 자세한 정보(증상, 단계, 치료)를 알려준다. 누군가는 ‘재생불량성 빈혈’ 투병기, 병상일기로 생각할 수도 있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봐도 좋다. 골수 이식의 과정과 입원 생활, 그 밖에 필요한 정보를 접할 수 있으니까. 더불어 저자가 완치 판정을 받을 때가지의 겪었던 수많은 감정, 그로 인해 성장하는 모습을 들려준다.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일, 도움을 받지 않고 내 의지대로 걸을 수 있는 일, 퇴원 후 일상으로의 복귀에서 겪는 어려움까지 말이다.

 

누가 내 옆에 남아있건 떠나건,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는 걸 뼈에 새기듯 깨달았다. 상대에게 크고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상대를 향한 모든 감정은 결국 내 몫에 지나지 않는다. (…) 타인을 마주하는 일은 어쩌면 좀 더 성숙한 나를 만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235쪽)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상대가 나에게 가시를 쥐여준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잡지 말기를. 내가 받지 않으면 그 가시는 상대가 계속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262쪽)

 

6년의 기록을 읽었지만 그 시간을 모른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울었을까. 너무도 어린 나이에 단단해진 저자가 안쓰럽다가도 대단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속상해서 화가 나서 때려치우고 싶은 생이라고 말했던 우리에게 삶을 보듬게 만든다. 갖다 버리고 싶은 내 인생’이 아니라 꼭 안아주고 싶은 내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버티는 일, 견디는 일, 힘들겠지만 그래도 내 인생이니까, 포기하지 말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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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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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게 어른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그 나이가 되면, 대학에만 가면 모든 게 내 뜻대로 풀릴 거라 생각했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큰언니가 그랬다. 내게는 당당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스물은 아주 큰 산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의 나이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고 늙음이라는 단어는 나와 아주 먼 곳에 있다고 느꼈다. 알다시피 우리는 금세 그 나이를 지나고 가까운 곳에 도달한다. 그리고 체감한다. 인생이 아주 길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수시로 우리를 파도처럼 덮친다는 걸 말이다. 조카에게는 대학 입시가 첫 파도였을 것이다. 울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에게 물었다. 조카의 말을 들어주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인생은 아주 길어.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 그 말은 종종 나에게 화살처럼 돌아온다.

인생이라는 여행은 때로 지루하고 재미없다. 그늘막 하나 없이 뜨거운 길을 걸어야 하고 쓰고 있는 우산마저 빼앗는 비바람과 싸워야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본다. 자신의 좁은 우산 속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만 가면 괜찮다고 힘을 내자고 손을 내미는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소심하면서도 긍정적이고 유쾌한 유머를 가진 남자 ‘레스’의 여행기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참 괜찮은 삶을 살았구나 생각했다. 사실, 그가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한 건 연인의 결혼 소식 때문이었다. 마흔아홉 레스의 동성 연인 프레디는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 9년을 살았는데 결혼은 딴 남자랑 한다니. 그리고 잔인하게 결혼식에 초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쿨한 척을 해도 그곳에 갈 수 없다. 레스는 참석할 수 있는 모든 해외 일정을 체크하고 여행을 떠난다. 

우리의 주인공 레스는 작가로 강의와 강연을 하고 수상식에도 참여하고 원고를 써야 한다. 엉망으로 흘러가는 소설도 정리를 해야 한다. 뉴욕을 시작으로 멕시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모로코, 인도,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면 된다. 그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면 괜찮아질 거라 여겼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랐다. 여행을 끝낸 레스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여행은 레스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일정은 조금씩 틈을 보였고 말이 통하지 않는 가이드, 발을 다치고 발목이 부러져 수술을 하고 가방은 사라졌고 레스가 좋아하는 정장도 엉망이 된다. 거기다 더울 레스를 슬프게 만드는 건 여행지에서는 어김없이 연인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미리 알려둘 게 있다. 레스에게는 프레디 말고도 과거의 애인이 있다. 그러니까 레스가 청년이었을 때 만난 사람 로버트 말이다. 유명한 시인으로 로버트는 여전히 레스에게 좋은 친구고 정신적인 지주다. 지금은 일흔다섯의 노인으로 병원에 있다. 문학계에서 그들의 관계는 잘 알려졌고 현재 레스의 상태도 그렇다. 프레디가 다른 남자랑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레스의 정신없는 여행에 동행하는 일은 조금은 우울하고 걱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레스의 여행이 더 길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프레디 따위 잊어버리고 여행지에서 만난 멋진 연인과 사랑에 빠지고 완벽하게 소설도 끝내기를 응원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오랜 친구처럼 어울리는 레스의 사교성에 감탄한다. 레스의 슬픔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다 점차 레스의 감정에 동화된다. 나도 곧 그와 같은 나이가 될 것이고, 그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쉰 살의 생일을 맞이하고 로버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 일은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일상이라는 걸 알기에.

​“빌어먹을 인생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는 거야. 쉰 살은 아무것도 아니야. 난 쉰 살 때를 돌아보면, 씨말 월 그렇게 걱정했던 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 지금의 날 봐. 나는 저승에 있어 가서 즐겨.” (297쪽) 

젊은 애인에게 쉰이라는 자신의 나이는 너무 늙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랑에 주저하는 레스에게 로버트가 하는 말은 정말 감동적이고 훌륭하다. 아니, 내게 필요한 말이다. 입시에 실패했다고 속상해하던 조카에게 괜찮다고, 인생은 길다고 말했던 나에게 지금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내가 앞으로 속할 수 있는 삶은 젊음이 아닌 늙음의 세상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그곳은 인생이라는 여행 중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또 읽는다. 인생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만들고 그로 인해 특별해진다. 그리하여 남은 삶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그들이 삶의 모든 것을 겪고도, 굴욕과 실망과 상심과 놓쳐버린 기회, 형편없는 아빠와 형편없는 직업과 형편없는 마약, 인생의 모든 여행과 실수와 실족을 겪고도 살아남아 쉰 살이 되었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215쪽)

레스는 자신의 여행을 오래도록 회자할 것이다. 남은 여행에 동행할 든든한 연인과 함께 말이다. 그가 누구든 상관없다.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유쾌한 연애소설로 분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좀 부족하다.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만난 든든한 이정표라고 말하고 싶다. 힘든 여정에 화나고 지칠 때마다 파란색 정장에 흰색 셔츠를 입은 레스를 떠올린다면 절로 미소가 번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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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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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괜찮을까. 존재의 이유를 찾아 헤매다 끝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죽는 게 아닐까. 어떤 이는 매일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말하면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죽음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다룬 소설을 읽고 나면 의례 드는 생각이다.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후의 삶은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이도 있겠지만 대체로 전혀 다른 삶을 살기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이렇게 웃고 떠들어도 되는가.

 

권여선의 레몬』​은 독하고도 아프다. 아니, 잘 모르겠다. 단편으로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읽었고 다시 읽었는데도 모르겠다.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건 아닐까. 나는 소설 속 그 누구의 입장이 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으니까. 여고생 해언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추리소설로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도무지 그렇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삶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헤아리고 그 삶에 개입할 수 있겠는가.

 

2002년 고등학교 3학년 해언은 죽었다. 살해당했다. 용의자는 신정준, 한만우, 두 명으로 좁혀졌지만 사건은 미결로 남았다. 언니를 잃은 다언은 엄마와 삶의 터전을 옮겼다. 다언에게 밝고 명랑함은 사라졌고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해언의 얼굴로 멍한 눈빛으로 살아간다. 17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시간을 살며 사건이 진실에 접근한다. 권여선은 세 명의 화자를 통해 사건 그 후의 삶을 보여준다. 사건에 관련된 주요 인물을 만나 그날을 복기하는 다언, 어쩌면 진범일지도 모르는 불안한 태림, 당사자가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언의 선배 상희.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시간이 흘렀으니 그만 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들은 여전히 그 시간을 살고 있다. 그날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해언의 얼굴로 살아가는 다언이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을 향한 복수가 성공하기를 바랐다. 다언은 태림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신정준 차에 탄 언니를 봤다고 증언한 목격자이자 용의자인 한만우를 찾아간다. 그를 통해 그날의 진실을 듣고 남루하게 살아가는 그의 생활을 마주하고 그 삶에 스며든다. 내일을 어떻게 살아갈까 두렵지만 하루하루를 버티며 그 안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일상에 말이다. 그날 이후 다언이 잃어버린 보통의 삶을 발견한다. 태림은 상담을 받고 기도를 하고 시를 쓰며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우리는 누구에게 죄를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할까.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179)

 

돌이킬 수 없다. 죽음은 그런 것이다. 다언이 상희에게 하는 말처럼 죽음은 우리를 뭉개버린다. 뭉개버린 삶은 복구가 가능할 것일까. 산다는 것, 살아 있음의 숭고함을 잘 알지만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통곡하고 절망한다. 살아갈수록 사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커진다. 그리고 묻게 된다. 산다는 건 뭘까.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것일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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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18 소설 보다
박민정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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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리하다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고 내용은 애틋했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그녀만의 언어였다.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녀와의 연락은 끊어졌다. 어떤 서운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그 메모를 바라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알게 되었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속상한 일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을까. 한때는 영원을 약속했던 사이였지만 서로의 현재를 모르는 사이로 전락하기도 하는 이상한 관계. 함께 한 시간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는 영화 속 울부짖음처럼 묻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 안에서도 소설 밖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 당당하고 모두의 부러움을 샀던 아이돌로 활동했던 사촌의 만나 그녀가 프리터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박민정의 나의 사촌 리사, 낯선 프랑스에서 만난 인연에 대해 그들이 보낸 시간과 그 안의 내밀한 감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 처음에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지만 그 문장에 빠져들고 있다는 걸 고백할 수밖에 없는 서이제의 미신迷信, 딸아이를 사고로 잃고 그 상실로 인해 점차 무너진 가족의 현재를 마주하는 정용준의 사라지는 것들

 

이별과 상실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주어지는 것일까. 네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헤어진 누군가, 사라진 존재를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 자주 연락을 하고 만남을 이어갈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안부만 전하는 사이로 변하는 사람들. 가족이란 울타리에 속하지만 그런 사이가 아니라 자신할 수 없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의 절망감을 백수린은 감각적인 표현으로 전달한다.

 

잿빛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짙푸른 물결이 이쪽으로 다가오다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황금색으로 빛나던 장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파라솔의 몸체가 흔들렸고 이제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고 옅은 슬픔 같은 것이 가슴 안에서 서서히 퍼졌다. (시간의 궤적중에서)

 

어찌할 수 없는 죽음 그 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서이제의 미신迷信과 정용준의 사라지는 것들에서는 소중한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참혹한 일상을 느낀다. 왜 그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나. 정용준의 소설에서 어린 딸의 죽음에 대한 부분은 특히 그러하다. 아이를 돌봐주던 어머니가 왜 그때 그랬을까. 아주 작은 실수였고, 불운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가족은 조금씩 와해된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죽기로 결심했고 그 사실을 아들에게 전한다. 정용준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할까 봐 내내 불안했다. 아들과의 불편한 여행, 그 짧은 시간 나누는 대화는 외롭고 쓸쓸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할까. 모르는 것 투성이인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때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아는 게 없다. 아무도 누구도 모르겠다.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애써 상상하면 떠오르는 건 온통 절망스럽고 나쁜 일들뿐이다. (사라지는 것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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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
필립 스테드 지음, 에린 스테드 그림, 김경주 옮김, 마크 트웨인 원작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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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를 들을 때 반짝인다. 똑같은 이야기도 상관없다. 깊은 밤 잠자기 전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 오직 아빠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를 기다린다. 클래라와 수지가 기다리는 아빠는 바로 마크 트웨인이다. 『올레오 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이란 유난스러운 동화는 마크 트웨인의 아이들에게 들려준 16쪽의 미완성 원고가 그 시작이다. 긴 시간 잠들어 있던 기록이 칼데콧상 수상 작가 필립 스테드와 삽화가 에린 스테드에 의해 완성되었다. 어쩌면 이 책에 대한 기​대는 바로 마크 트웨인이 아닐까 싶다.

​동화 속 주인공 ‘조니’는 외로운 소년이다. 할아버지가 계시지만 가난하고 괴팍하다. 그런 조니에게 친구는 ‘전염병과 기근’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닭 한 마리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닭을 팔아서 먹을거리를 사 오라고 시킨다. 유일한 친구를 팔아야 하는 운명이라니. 시장에서 조니는 한 노파를 만나 그녀에게 ‘전염병과 기근’을 부탁하고 씨앗을 받는다.

 

 

“이 씨앗은 엄청 힘든 상황이 왔을 때에만 심어야 해요. 심고 나서는 확신을 갖고 결과를 기다려요. 봄에 씨앗을 심고, 동이 틀 때와 밤 12시 정각에 물을 줘요. 항상 씨앗을 돌봐주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요. 불평하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꽃이 피면, 그 꽃을 먹어요. 그 꽃이 당신을 배부르게 해 줄 거고, 당신은 두 번 다시 허기를 느끼지 않을 거예요.” (59쪽) 

 

짐작했겠지만 할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고 조니가 ​받아온 씨앗을 먹고 그만 죽음을 맞는다. 조니는 노파의 말대로 열심히 씨앗을 키우고 그 꽃을 먹고 신비한 능력을 갖는다. 동물들과 대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조니의 유일한 친구가 닭이었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은 아닐까.

 

인류를 세상 온갖 부질없는 다툼으로부터 구원해 낼 절호의 한마디를, 인간들이 어쩌다 한 번만이라도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니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와서 기뻐.”(88쪽)

 

 

조니는 동물들과 함께 지내면서 도난당한 왕자를 찾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각자의 능력을 발휘한 동물들과 왕자를 찾는다. 행복한 결말이라고 해야 할까. 흥미로운 건 필자인 필립 스테드와 마크 트웨인이 동화를 이끌어가기 위해 나누는 대화다. 그리고 이곳(현실)과 그곳(동화 속 세상)에 대한 구분이다. 그건 마치 어른과 아이의 세상에 대한 것과 같게 느껴진다. 상상력도 사라지고 친구의 소중함도 잃어버린 어른. 조니로 대표되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아이의 모습.왕자를 구하고 그곳에서 만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조니. 그들은 왕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혼자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다르다는 건 인정하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이다.  

 

이곳에서는 조니 나이의 소년이 돈을 다발로 모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뭐든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곳, 조니가 살고 있는 땅에서는 아무리 돈을 벌어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딱 한 가지만은 살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진정한 친구이다. (…) 끊임없이 어리석은 폭력에 휘말리는 인간을 구원해 낼 절호의 말을. 인간들이 어쩌다 한 번만이라도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니는 말했다. “여러분을 알게 돼서 정말 기뻐요.” (152쪽) 

 

짧은 동화에서 두 딸을 위해 매일 이야기를 만들었을 아빠 마크 트웨인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 사랑에 필립 스테드의 상상력과 아름다운 그림이 더해진 동화는 세상의 많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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