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 빨강머리 앤 : 초록지붕 집 이야기 (오디오북) 오디오북 빨강머리 앤 시리즈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엄진현 옮김, 이지혜 읽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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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은 제목만 들어도 환한 빛이 퍼진다. 그 책이 주는 의미, 그 책과 마주했을 대 느꼈던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겐 『빨강 머리 앤』이 그렇다. 너무 익숙해서, 주인공 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만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만화영화로 본 마르고 당근색의 머리칼을 지닌 한 소녀, 엉뚱하고 귀여운 상상으로 모두를 웃게 만드는 아이.


 앤을 만나는 방법은 그림책, 동화, 소설로 다양하다. 최근에는 빨강머리 앤을 테마로 한 산문도 나왔으니. 우리에게 앤은 정말 친근한 캐릭터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오디오북으로 빨강머리 앤을 읽는다. 소리로 읽는 문학, 이미지가 아닌 온전히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일, 그래서 더 앤에게 집중한다. 빨강머리 앤의 오디오북 첫 번째 『초록지붕 집 이야기』를 배우 이지혜의 목소리로 읽는다.

 

 어디서나 간편하게 소장할 수 있어 용이하다. 사용법도 간단하다. USB를 컴퓨터에 연결하고 복사한 후 스마트폰으로 옮길 수 있으니 독자의 상황에 따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다. 나는 라디오처럼 간편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다. 모두 41개의 파일로 38권까지는 소설을 들려주고 나머지 3개의 파일엔 저자인 루시 몽고메리의 일기와 번역자, 읽은 이에 대한 소개가 있다. 파일마다 다르긴 하지만 25분 내외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앤의 등장은 너무도 반가웠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니까 앤이 매슈를 만나 마차를 타고 초록지붕의 집으로 오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는 부분을 말이다. 만약 종이책이라면 내가 이 부분을 반복해서 읽었을까. 아니,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디오북이라서 가능했다. 그 뒤로도 반복해서 듣는 부분이 있었다. 모두 앤의 엉뚱한 일상을 들려주는 부분이었다. 소설을 들으면서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문장들. 목소리로 듣고 책을 펼쳐 내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는다. 마치 내가 앤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성장하기 시작하면 깊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도 많아져요. 그래서 항상 뭔가 옳은지 생각하고 결정하느라 너무 바빠요. 성장한다는 건 참 중요한 일이에요, 안 그래요, 마릴라? 하지만 아주머니나 매슈 아저씨나 앨런 사모님이나 스테이시 선생님 같은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으니 전 결국 성공적으로 성장하게 되겠지요. 잘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온전히 저한테만 있을 거예요. 그리고 기회는 한 번뿐이니 책임감이 막중해요. 이번에 제대로 잘 성장하지 못하면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거니까요.” (454~455쪽)

 

 한 사람의 목소리로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인물의 특징을 살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전문적인 성우가 읽어주는 건 유명 배우나 연예인이 읽어주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유명인의 경우 소설의 이야기보다는 특정 목소리에 집중할 것 같아서다. 막상 들어보면 다를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은 그렇다.

 

 빨강머리 앤을 읽는 읽은 언제나 즐겁다. 끝에 e가 들어간 앤, 그리고 영혼의 친구 다이애나. 그리고 길버트까지. 그 아이들의 성장과 우정은 예쁘고 아름답다. 소리로 읽는 빨강머리 앤은 특별했다. 소설에 대한 부분도 훌륭하지만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일기(1시간 분량)를 통해 빨강머리 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들려주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차례대로 듣는 것도 좋겠지만 이 부분을 먼저 읽고 소설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앞으로 나머지 시리즈가 계속 출간될 예정이니 빨강머리 앤의 마니아라면 즐거운 기다림이 남았다.

 

 바쁜 현대인에게 오디오북은 새로운 독서 바람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책 읽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에게도 신선한 접근이 될 수 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가볍게 산책을 하면서, 집안일을 하며서, 운동을 하면서 들을 수 있는 문학이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더라도 귀로 읽는 문학이 갖는 매력은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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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2-0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군요. 운전할 때 들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구요.^^

자목련 2018-12-07 15:27   좋아요 0 | URL
벚꽃의 계절에 드라이브를 하면서 소설의 처음을 들으면 정말 낭만적일 듯해^^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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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로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 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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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번의 생사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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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모토 테루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을 떠올리면 쓸쓸하고 불운한 생이 펼쳐진다.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생의 고단함 같은 것 말이다. 소설집『오천 번의 생사』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어둡고 외로운 생이 있었다. 내가 만났던 이전의 소설과 다른 점은 소설 속 화자가 모두 남성이며 몇 편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있다는 점이다.

 

 아홉 개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눈썹 그리는 먹」이다. 화자인 ‘나’는 요양을 위해 어머니와 고모를 모시고 가루이자와에서 몇 달 생활하기로 한다. 그곳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어머니와 고모는 어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렇지 않게 농담처럼 그때 자신의 심정을 들려주는 어머니. 불운했던 유년시절과 다정하지 않았던 남편과의 결혼생활,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가루이자와에서 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는다. 어머니에게 사실을 숨기며 두려워하는 아들의 표정에서 진실을 읽은 어머니는 담담하게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아들을 위로한다. 그리고 깊은 밤 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를 보며 즐거워한다. 매일 밤 하얗게 세어버린 눈썹을 어떤 의식처럼 정성스레 검은 먹으로 그리는 어머니. 요양을 온 아들의 식사를 챙겨주기 위해 따라온 여정에서 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어떤 생을 살아야 죽음에 의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불꽃놀이는 돌연 끝났다가 별안간 다시 불꽃이 올랐다. 휴우 하는 소리가 난 뒤에 묵직하게 작열하는 소리가 들리면 둑이 터진 듯이 무수한 색이 피어났다. 언제까지 계속되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까만 하늘이 조용히 펼쳐져 이제 돌아갈까 하고 일어서려고 하자 다시 커다란 꽃송이가 한없이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의 조그마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어머니의 말이 가슴속 가득히 퍼져나갔다.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머니가 한 그 말을 가슴속에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눈물이 나와 불꽃이 번져 보였다. (71쪽, 「눈썹 그리는 먹」)

 

 어떤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비밀이 된다. 하얀 머리칼은 염색을 하지 않고 낮에도 흰 눈썹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밤마다 검은색으로 눈썹을 그리는 어머니처럼 이 단편집에는 조금 독특한 비밀을 간직한 이가 있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공사 현장에서 차량의 통제를 아르바이트를 하는 「토마토 이야기」속 ‘나’ 가 만난 병자는 그토록 원했던 토마토를 먹지도 않고 살포시 어루만지기만 한다. 피를 토하고 죽은 후 남긴 편지를 부탁받았지만 ‘나’는 공사 현장에서 편지를 잃어버려 그 후로 토마토를 먹지 못한다. 표제작 「오천 번의 생사」에서 생활비를 위해 아버지의 유품을 친구에게 팔려고 친구를 찾았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길에 ‘나’가 만난 자전거를 타는 남자도 그러하다. 마치 귀신처럼 나타나 집으로 가는 길까지 자전거로 태워주겠는 남자는 엉뚱한 말을 계속 이어간다.

 

 “오천 번 정도가 아니야. 오만 번, 오십만 번, 아니 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는 죽어왔어. 맹렬하게 살고 싶어진 순간 그걸 확실히 알 수 있지. 그 대신 죽고 싶을 때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아. 수십만 번이나 다시 태어난 것을 알 수 없게 되는 거지.” (111쪽, 「오천 번의 생사」)

 

 

 

 

 

 죽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순간을 마주하지만 정말로 죽고 싶은 이는 없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죽어왔다는 말에는 절실하고 절박한 생의 의지가 담긴 건 아닐까. 추운 겨울밤, 집으로 돌아갈 차비도 없는 화자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감당해야 할 빚 때문에 힘든 이에게, 공황장애를 숨기며 영업을 해야 하는 가장에게, 죽음을 앞둔 어린 시절 친구를 마주할 용기는 없는 이에게도 간절한 생의 의지. 『오천 번의 생사』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이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네 생은 그것들을 피할 수 없고 통과해야만 하지 않냐고 말하는 듯하다. 어둡고 깊은 밤이 지나야만 새벽이 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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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걷는 문장들 - 불면의 시간, 불안한 상념으로부터 나를 지켜내기 위하여
한귀은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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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일이 녹록지 않다. 세상은 어둡기만 하다. 그런데 눈을 씻고 다시 보면 그 어둠에도 채도가 있다. 더 짙은 어둠, 더 맑은 어둠으로 걸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다. (서문.「더 맑은 어둠 속으로」, 중에서)

 

 어느 시절엔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새벽에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판을 두드리곤 했다. 뭔가 대단한 글을 쓰는 게 아니었다. 비공개 카테고리에 속상한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분노나 좌절, 혹은 미움을 토해냈다. 고백하자면 어찌할 줄 모르는 나를 달래는 방법이었고 그건 확실하게 도움이 되었다. 때로는 책에서 발견한 문장을 옮기기도 했고 읽은 책에 대한 짧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블로그 활동이 지금에까지 이어졌다. 쓴다는 건 감정을 배설하는 것이고, 쓴다는 건 감정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한귀은의 『밤을 걷는 문장들』은 그 시절의 나와 불러왔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견디던 밤과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밤이 교차되어 내게로 달려들었다. 내가 지나온 그 밤들이 이 책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밤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글이 있었다. 하지만 한귀은의 이 책은 나의 밤이 아닌 그녀의 밤이었고 그녀의 이야기였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조금 아쉽고 뭔가 서운했다. 이전에 만났던 그녀의 이야기와는 살짝 결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아포리즘 에세이 같다고 하면 맞을까.

 

 상대에게 매료되는 것은 그가 한 말의 내용보다, 말의 태도 때문이다. 대화는 대화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소조와도 같다. 함께 만든 그 소조가 마음에 들 때 우리는 통한다고 느낀다. (70쪽. 「말의 태도」, 전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글, 혼자만 꺼내보는 비밀들, 일기에 써놓은 다짐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분명 살아가는 이야기는 맞다. 딸, 엄마, 여자로 살아가며 겪는 수많은 감정들, 후회와 다짐, 그리고 조언까지. 아이였던 아이가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점점 멀어지는 게 아쉽고 늙고 병든 부모에게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데 부모는 시간을 주지 않는 보통의 일상이 있었다. 아니, 그 보통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시간이 있었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그녀만의 고통이 곳곳에서 전해졌다. 다만 그녀도 많이 힘들었겠구나, 누구나 자기만의 방이 있고 자기만의 비밀이 있듯 말이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코끝이 찡해졌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울고 싶을 때는 뭘 해도 울게 된다. 가장 냉정한 뉴스를 봐야지 하다가 대통령이 나와서 살짝 웃어도 울게 되고, 잔혹한 범죄를 보도하는 장면이 나와도 울게 된다. 아무것도 안 해도, 가만히 있어도 울게 된다. 울음을 참기 위한 모든 선택이, 울음의 자극이 된다. (36쪽.다만 우는 것, 중에서)

 

 우리는 때로 울음을 참고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소모해야 할 만큼의 울음을 껴앉고 사는 건 위태롭다. 실컷 울어야 하고 때때로 같이 울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느 시절의 나는 혼자서 다 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 같다. 휴대폰의 전화번호 목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 밤에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자판을 두드렸다. 그녀에게 일상을 잠시 잊고 집중할 것이 영화였던 것처럼 내게는 책이 있었다. 사람이 아니어도 그런 대상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밤을 혼자 견디는 이에게 어떤 문장, 어떤 음악, 어떤 그림은 가장 절대적인 친구가 될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밤이 다가오고 견딜 수 없는 슬픔에 홀로 울고 싶다면 울어도 좋다고 말이다.

 

 밤은 얼마나 오묘한가? 수많은 생각들이 달려들고 후회와 미련이 쌓인다. 밤에 쓰는 편지는 부칠 수 없는 것처럼 망설이며 문자를 전송하지 못하기도 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발견하고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을 자꾸만 바꾸고 싶어 어쩔 줄 모른다. 하루를 정리하는 밤, 온전하게 잘 했다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마는 그런 밤의 반복을 피하는 일은 중요하다.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자기 확신으로 채워지는 밤이 늘어나면 외롭고 고독한 밤이 아니라 반짝이는 밤이 될 것이다. 그런 밤을 쉽게 마주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최선을 다하고 기력을 소진한 사람이 결과를 담담히 기다리고 또 받아들인다. 최선을 다한 사람이 텅 비어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어떤 일을 끝낸 사람이 마지막 해야 할 일 또 다른 일은 최선을 다한 그 시간을 떠나보내는 일이다. 어떤 일을 붙잡고 있었기에, 이제 놓아줘야 하기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그때의 자신과 천천히 이별해야 하는 것이다. (174쪽. 「최선을 다한 사람」, 전문)

 

 한귀은의 『밤의 걷는 문장들』속 어떤 문장은 누군가의 밤을 지켜주는 그것이 될 것이다. 아니, 문장을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마음만으로도 힘이 나고 위로가 된다. 이 책에서 나만의 문장으로 기억하여 꺼내보고 싶은 문장을 발견했다. 어떤 슬픔은 너무 고요해서 깨트리지 말아야 한다 란 문장, 침묵만이 슬픔을 위로할 것 같았다. 고요의 고요라고 할까. 글이란 건 참으로 신비롭다. 구구절절 자신의 인생을 말하지 않아도 하나의 문장으로도 그 인생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알 것 같으니. 살아가면서 나만의 문장을 수집하고 나만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부드러운 곡선처럼 유연한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면.

 

 이모 앞에서 울 만큼 이모와는 나는 친하지 않다. 아마 영영 못 친해질 것이다. 슬퍼서 그렇다. 이모가 내 슬픔을 알아서 그렇다. 내가 이모의 슬픔을 알아서 그렇다. 젊은 이모가 결핵에 걸렸을 때, 마루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걸 나는 기억한다. 그때, 어떤 슬픔은 너무 고요해서 깨트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101쪽. 「슬픔을 알아보는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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