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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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가운데 마음을 움직이는 꽃은 목련이다. (12쪽)

 

가을이 시작되었고 나는 봄꽃을 잊었다. 그랬던 내게 이 첫 문장은 아득한 시간을 선물하는 것만 같았다. 목련이 환하게 피었던 봄의 기억, 그 숱한 봄의 기억을 건네는 문장이다. 여기저기 꽃들이 핀다고 요란을 떨었던 마음, 그 봄은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목련나무 그 자리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시간들. 김종관의 에세이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는 이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 그 누군가와 그 무엇에 대한 생각과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책이다. 오랜 시간 한곳을 떠나지 않고 살면서 마주한 일상에 대한 보통의 기록은 그곳을 떠나고 나면 모든 것이 특별함으로 바뀌고 만다. 책 속에서 저자가 살아온 이문동의 골목들이 그렇듯 말이다. 나는 이문동의 골목을 알지 못하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그곳의 길고양이나 어떤 분위기를 상상한다. 한 장의 사진으로, 하나의 문장으로 그 골목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짧은 메모,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와 같은 글, 영화에 대한 애정과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면서 그 시간을 나도 지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가을이라는 계절 탓일 수도 있고 어느 시절 내가 몰두했던 무언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져 만들어지는 어떤 결과가 있기도 하니까. 결핍의 상태에서만 주어지는 긍정의 힘이라 핑계를 댄다. 후회와 미련은 언제나 부질없는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그 감정에 갇히고 만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당시의 고단함을 이겼던 힘은, 가지지 못한 그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지지 못한 위로야말로 때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으로 둔감하곤 하니까. (64쪽)

여행지에서 만나는 표정과 특유의 설렘을 소란하지 않고 담담하게 적은 문장이 오히려 이방인의 시선과 감정을 꾹꾹 담은 것 같다. 집중하고 있지만 그것을 들킬 새라 얼굴의 표정을 숨기는 모습이랄까. 김종관의 사진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낀다. 물론 나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조금은 어둡고 불투명한 사진을 오래 바라본다. 그 사진에 녹아든 어떤 감정을 상상하며, 그 공간에서 오고 갔을 말들의 깊이를 상상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의 영화가 탄생했을 거라는 나만의 추측까지. 그래서 그가 보내는 편지를 꼭 받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새긴다. 설사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라도 나는 그 편지의 수신인이 되고 싶다.

 

 

 

 

영화가 가끔 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읽히기를,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것. 그러한 목적이 살아 있을 때 영화는 살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고단한 여정에 아랑곳없이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되어, 무관심 속에 서서히 죽음을 맞기도 한다. (131쪽)

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의 꿈속 한 장면,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을 들려주는 사랑에 대한 아릿한 고백, 지하철 1호선의 풍경, 옛 동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점상의 기억, 사라졌거나 사라질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애틋하다. 영원할 거라 믿었던 시절, 단단하게 자리를 지킬 거라 믿었던 것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사라지기에 그것들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 쌓여 그가 만들 영화는 어떤 빛을 낼까. 조금은 우울하고 쓸쓸한 빛을 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빛을 기억하고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완벽한 빛이 될 것이다. 이 책이 그러하듯이.

 

완벽하게 좋은 순간, 그것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인지.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억은 스러져가는 환영을 잃어버리지 않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136쪽)

떠나온 곳으로 돌아온 삶을 살고 있지만 종종 그것을 잊는다. 작은 동네지만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자주 찾던 가게는 어느 순간 업종이 바뀌었다. 그래도 친구에게는 이곳은 내가 있는 곳이며 우리가 함께 보낸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 나의 울퉁불퉁한 마음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 그곳에 당신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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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9-20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 천천히 사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한주 한달 한해 휙 가 버려요 뭐 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이 늘 들고... 세상도 빨리 바뀌고 있겠지요 그것도 어쩌다 가끔 느끼기는 하는군요 날마다 생각하는 건 그대로인 듯도 한데, 그것도 조금씩 바뀌고 있겠습니다 며칠전에 어떤 말을 듣고 나중에 그렇게 바뀌면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아직 오지 않은 날인데...

명절이 갔군요 저는 다를 거 없었지만 편안하게 보내셨기를 바라고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19-09-24 10:0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어떤 시간은 빨리 흐르고 어떤 시간은 너무 천천히 흐르지요.
답글이 늦었어요. 일교차가 심하네요. 흐선 님, 감기 조심하세요^^*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 진심이 열리는 열두 번의 만남
이진순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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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 어제와 같은 듯 다른 하루를 살아간다. 누군가는 힘겹게 살아내고 누군가는 가뿐한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바라는 건 같다. 불운과 불행이 아니라 행운과 행복을 꿈꾸고 더 나은 성장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고단하다. 내게만 힘든 삶이 몰아치는 것 같고 세상은 자꾸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저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지키는 이들이 있어 더 나쁜 쪽으로는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진순의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속 인물들이 그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통해 미완의 삶을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이진순이 만난 12명의 사람들은 최고가 아닌 그냥 우리였다. 영화감독, 교육자, 소설가, 화가, 공무원, 의사라는 화려한 이력을 떠나 오늘을 살아가는 보통의 이들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대단한 삶이라는 틀에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인터뷰어 이진순이 인터뷰이를 선택한 기준은 끌림이었고 궁금함이었다. 사회의 이슈나 흐름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점이 이 책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삶이라는 점 말이다. 12명 모두가 담담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일상을 들려준다. 아픈 과거와 지독하게 힘든 현재, 그리고 다짐 같은 것들 말이다. 이진순과 그들의 대화를 읽노라면 어느 순간 가슴이 철렁하다가 웃음이 나고 속이 시원한 느낌과 놀람과 감동으로 이어진다. 12명 모두 저마다의 빛을 내고 있었지만 내게는 특히 영화감독 임순례, 작가 손아람, 다큐멘터리 감독 장혜영, 효담학원 이사장 채현국의 인터뷰에 마음이 흔들렸고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우리는 항상 좋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그 반대의 경우에 쉽게 절망한다.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그래서 임순례 감독의 이런 말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나의 삶을 혼내는 동시에 포근한 위로가 된다. 인생이라는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법칙 같다고나 할까.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다는 말을 꼭 붙잡고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잘 되는 것도 물거품 같은 거고, 못 되는 것도 다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을 해요. 좋은 일에도 마가 끼고, 나쁜 일에도 교훈이 있어요. 모든 일엔 다 이면이 있으니까요.(임순례, 104쪽)

그런가 하면 잘 몰랐던 인물에 대해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어 반가웠다. 손아람, 장혜영, 채현국이 그러했다. 손아람은 작가로 알고 있었지만 그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나 배경은 몰랐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그가 평등, 인권, 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경험 밖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한 경외감을 솔직하게 말하는 그의 신념 같은 게 전해졌다.

제가 겪어보지 못한 인생 경험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매혹되는 경향이 있어요. 삶의 낭떠러지에서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헤치고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동경이 있죠. 내가 못 살아본 삶. (손아람, 197쪽)

그와 다르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기에 급급해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뉴스나 언론을 통해 그들의 삶과 조우한다. 짧은 순간 탄식하거나 감탄한다. 장애시설에 살던 동생을 시설 밖으로 데리고 나와 함께 사는 장혜영의 일상은 그래서 처음엔 왜?라는 질문이 먼저 나왔다. 나의 편견이 들통나는 순간이었다. 반대로 왜 장애시설에 계속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울려서 함께 살아가고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세상이라 말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응원하기는커녕 인정하는 일도 어려워하는 건 아닐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를 쓰고 내달린다. 그러나 그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아서 신기루처럼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기약했던 ‘내일’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장혜영은 경쟁과 도태의 사이클을 거부한 대가로 학벌사회에서 명문대생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잃었지만,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오늘’을 벌었다. (222쪽) ​

이런 마음은 시대의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채현국의 말에 중심을 잡았다.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지켜보고 몸소 체험하면서 살아온 인생 선배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그동안 잘못된 삶의 원칙을 세우며 그것을 고집하며 살아온 것이다. 오직 성공만 바라보며 살아가느라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했다. 어디서 꽃이 피고 어디서 바람이 부는 지도 모르고 곁에서 피 흘리며 홀로 싸우는 이들을 외면하면서 말이다.

삶에는 원칙이 없어요. 우리가 원칙을 이룩해가는 거예요. 시대마다 최선을 다해서 원칙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있는 거지, 어느 역사에도 주어져 있는 원칙 같은 건 없어요. (채현국, 304쪽)

마지막 채현국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앞서 11명의 인물들이 겹쳐진다. 세월호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숨진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 막막하고 무기력할 때 동료의 이름과 사진을 본다는 이국종, 공무원의 충성 대상이 되는 것은 국민이라 말하는 노태강, 아무도 듣지 않는 노인들의 생애를 듣고 구술하는 최현숙, 아픈 베트남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구수정, 성소수자들에게 행복하라 말하는 엄마 이은재,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게 제일 우선이라는 윤석남, 글쓰기를 통해 자기 치유를 하고 극복한다는 황석영이 살아낸 삶의 순간들 말이다.

누구의 인생도 완벽하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 방은 있다. 삶의 어느 길목에선가 자신의 가장 선량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끄집어내 한순간 반짝 빛을 더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망하지 않고 굴러간다. 세상을 밝히는 건, 위대한 영웅들이 높이 치켜든 불멸의 횃불이 아니라 크리스마스트리의 점멸등처럼 잠깐씩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평범함 사람들의 짧고 단속적인 반짝임이라고 난 믿는다. (7쪽)

그들의 삶은 완벽하지 않았다. 때로 무너지고 좌절하며 절망했다. 아마도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단단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와 당신의 오늘은 어떤지 묻고 싶다. 지겹도록 힘들었는지 그래도 괜찮았는지 궁금하다. 이진순의 글처럼 항상 아름답게 반짝일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안에 빛의 존재를 믿는다면 어느 순간 반짝 일 것이다. 그 순간이 짧더라도 우리는 그 빛을 발견하고 간직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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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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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은 어른, 대학, 독립, 자유와 같은 단어였다. 적어도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스무 살이 되면 해야 할(할 수 있는) 일들의 목록을 작성하곤 했다. 그러나 스무 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성적에 맞춰 들어온 대학에서 공부는 재미가 없었고 연애는 달콤하지 않았다. 당시에 시들하게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입체적으로 살아나 내게로 달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은희경의 『빛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를 추억한다거나 그리워한다는 말이 아니다. 잊고 있던 잊고 싶었던 그 시절과 소설 속 그 시절이 하나로 합쳐진 것 같다고 할까.

 

1977년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의 한 여자 대학교 입학한 화자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한 대학 생활과 동기, 선배들의 이야기로 함축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대상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숙사의 내부 사정도 흥미롭다. 귀가 시간과 점호가 있다거나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과정이나 외출증을 끊는 일은 마치 군대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거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단순한 구성은 아니다. 1977년과 2017년을 오가며 화자인 ‘김유경’과 같은 대학 기숙사 동기이자 소설가인 ‘김희진’의 시선으로 다루기에 서로 다른 기억으로 서술된다.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 있다.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281쪽)

 

어쩌면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흐려지고 왜곡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소설에서 소설가 김희진의 소설 속에 그려진 1977년 기숙사의 모습은 소설가의 시선으로 재편집되었고 ‘나’는 그것이 때로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4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을 꼬집어 판가름을 내고 싶지 않다. ‘나’는 과거의 자신이 품었던 생각과 의지대로 현재를 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일부는 그 과거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건 인정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기대했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고 아쉬워할 수도 있다. 소설 속 그녀들과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살았다면 당시 서울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유신정권의 시대, 대학생의 정치적 의식과 활동에 대해 은희경이 날카롭게 파고들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 학보사 기자인 화자의 시선으로 스케치를 하듯 보여준다. 다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의 미팅과 연애, 결혼에 대해서도 기숙사 구성원 각각의 목소리를 빌려 들려준다. 한 방에 네 명씩 생활하는 여대생은 다양한 사회 계층을 의미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 계층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런 구성이 가장 매력적이고 탁월하다. 여자 대학교의 기숙사란 특정 공간에서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가장 정확하고 내밀한 그녀들의 의견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들의 곁에서 그들의 수다, 때로는 논쟁을 가만히 듣고 있는 듯 착각에 빠지는 이유다. 40년이 지난 지금의 목소리는 어떤가 생각도 해본다.

 

‘나’가 친구인 김희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똑같이 작동한다. 소설 속 그들과 같은 세대가 아니더라도 잊고 있던 어떤 시절을 불러오는 기능을 한다. 동시에 소설가 은희경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나에게는 지워진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선명하게 살아날 때 한 편으로는 당혹스럽지만 한 편으로는 반갑고 신기하다. 은희경의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그런 기분을 안겨줄 것이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337쪽)

 

오랜만에 만난 은희경의 장편을 읽으면서 정미경, 공지영의 소설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었던 나를 되찾고 싶어졌다. 이처럼 소설은 때로 잊었던 나를 불러오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이런 소설이 있어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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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고, 친애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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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엄마가 언제 웃었을까? 어린 동생을 앞에 두고 나와 함께 동네 어귀에서 찍은 사진에서 엄마는 웃고 있었다. 앳되고 수줍은 미소였다. 몇 장 남지 않는 사진을 보면서 엄마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았다. 돌아가신 엄마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어떻게 반응했을까?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여성 삼대의 이야기 백수린의 『친애하고, 친애하는』를 읽으면서 나는 엄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소설 속 어느 엄마와도 닮지 않는 엄마가 자꾸만 생각났다.

젖먹이를 떼어놓고 유학길에 오른 엄마 현옥 대신 인아를 키운 건 할머니였다. 인아에게 세상의 시작은 할머니였고 엄마는 조금 먼 거리에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룬 엄마에게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스물두 살의 휴학생 인아는 할 일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엄마의 전화 한 통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두 계절을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건 당연했다.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할머니와 친구분들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은 즐겁기만 하다. 지방대 교수인 엄마 현옥이 주말마다 할머니를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이상할 뿐이다. 할머니가 폐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아는 알지 못했고 그래서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은 채로 하루하루 보통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인아는 잘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 엄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고 상상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사랑했던 마음과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대했던 사랑이 달랐다는 것, 할머니가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고 힘들어했다는 사실, 할아버지와 할머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유학을 선택한 엄마, 그러면서도 엄마 현옥과 할머니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애증 같은 것에 대해 인아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현옥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여성의 삶이 남성의 울타리 안에 있었던 할머니와 할머니와는 다른 세상을 향해 나갔던 당당하면서도 모질었던 엄마 현옥. 그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딸이었던 인아는 언제나 엄마가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인아의 여린 마음을 할머니는 가장 먼저 알아보고 가만히 안아주었다. 소설에서 할머니와 인아가 빈대떡을 부치는 장면을 읽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포옹의 온기가 전해진다.

“세상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부서지는 것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녹두처럼 끈기가 없어서 잘 부서지는 걸 다룰 땐 이렇게, 이렇게 귀중한 것을 만지듯이 다독거리며 부쳐주기만 하면 돼.” (99쪽)

혼전 임신으로 어린 나이에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혼을 선택했을 때 현옥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인아에게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도 좋은 삶이라 말하는 엄마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인아를 키우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 아니라 인생의 선택지는 많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테니까. 같은 여자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인아가 아이를 키우고 안정이 된 후 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말했을 때 서른셋의 나이가 젊고 예쁘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 엄마 현옥이었던 것처럼.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엄마라는 걸 우리가 늦게 아는 것처럼 인아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로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다. 일하는 엄마, 전업주부인 엄마, 엄마라 불리는 모든 존재의 삶은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까지 쉽게 인정을 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인아가 엄마 현옥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다. 아픈 할머니를 보러 주말마다 오는 현옥이 할머니에게 엄마라 부르는 모습이 친근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렇다. 엄마는 언제나 엄마로만 존재했을 것 같은 어리석음, 내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모진 외침이 소설 속에서 돌고 돈다. 

기존의 여성 서사를 다룬 소설과 다르게 백수린의 소설이 특별한 건 남녀의 대립이나 갈등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삼대 모녀를 통해 그들에게 이어진 섬세한 감성으로 어루만진다는 점이다. 여성의 결혼과 일, 그리고 육아에 대해 저마다의 다른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어진다. 할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화자인 인아에게 온 생명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듯 말이다. 인아 역시 생명을 품고 키우고 세상에 내놓고서야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더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까. 연약하지만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타인인 아이를 향한 엄마의 마음. 그 사랑이 행간에서 느껴진다.

그러니 내가 그때 할머니의 상태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어쩌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역에서 환승하기 위해 계단을 바삐 올라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뒤통수를 보거나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가 바뀌어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파를 보다가 가끔씩, 나는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26쪽)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완벽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지만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경험만 봐도 다르다. 엄마라서 무조건 믿어주고 지지하고 이해해주는 건 아니다. 엄마와 나의 사고가 다를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백수 린이 소설에서 할머니 세대의 엄마들이 무시와 폭력을 참고 희생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해할 수 없듯 현옥이 자신의 딸 인아의 삶을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감정을 알 것 같은 시기와 맞나는 것이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사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때로 다투고, 미워하고, 애틋해하면서 말이다.

낡은 사진 속에서 젊고 어린 엄마가 웃고 있다. 엄마에게 기댄 나는 그때 엄마의 나이를 지났다. 깜짝깜짝 놀랄 일에 절로 나오는 ‘엄마’란 외침을 빼놓고는 엄마를 부르는 일이 없다. 엄마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한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어도 괜찮다고 여겼던 엄마의 자리를 채우는 건 그리움뿐이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사이가 되지 못한 채 서둘러 나와 이별을 한 엄마가 보고 싶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나의 엄마. 당신의 이름을 가만히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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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8-30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이 지나가는 8월 말 입니다.
많이 더웠던 8월 잘 보내셨나요.
자목련님, 기분 좋은 주말 되세요.^^

자목련 2019-08-31 11:46   좋아요 1 | URL
네, 아침 저녁으로 이제는 가을이구나 느껴요.
이럴 때 감기랑 친해지면 큰일이니 조심하시고요^^*

hnine 2019-08-31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대 모녀의 삶을 한 소설에서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이 소설 궁금해지네요. 여성의 결혼과 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서사를 지어낸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고요.
읽으시면서 어머님 생각 많이 하셨겠어요.

자목련 2019-08-31 11:4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백수린 작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제가 느낀 것과 작가가 의도한 것은 다르겠지만 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와 함께 지금 이 순간을 보낼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더위가 물러가고 제법 서늘합니다.평온한 주말 보내세요.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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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사랑을 생각하면 부모님이 자식을 향한 사랑으로 연결된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모습 말이다. 과거에는 ‘사랑의 매’도 그런 사랑에 속했었다. 아마도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속 십 대 소녀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도 사랑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학교 시험에서 2등을 했다고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이니 말이다. 1등을 한 아이가 누구인지 묻고 “저 애도 머리가 하니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유진은 자수성가로 일가를 이뤘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표대로 생활해야 했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모범생인 오빠와 다정한 어머니,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를 둔 캄빌리의 가족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아버지 유진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모든 일에 감사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자유를 향한 목소리를 내고 가난한 이들을 볼보며 누가 봐도 좋은 아버지이며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니 캄빌리는 아버지가 행하는 폭력을 고스란히 흡수한다. 어머니와 오빠 자자도 마찬가지였다.

 

캄빌리가 계속 이렇게 살아아가는 건 아닐까, 나는 조바심이 났다. 단 한 번도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눈치만 보면서 자라면 안 될 텐데.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와의 만남에도 제약을 두는 아버지라니. 캄빌리와 자자에게 세상은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캄빌리가 다른 세상과 교류할 기회는 오직 고모를 만날 때 뿐이었다. 소설에서 고모 이페오마는 가장 주체적인 삶을 보여준다.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아버지 유진을 설득하고 폭력의 희생자인 어머니를 위로하면서도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주고 이끄는 사람이다. 방학 동안 남매는 나이지리아 대학교의 교수인 고모 이페오마 집에서 세 명의 사촌과 생활하게 된다. 자동차에 넣을 기름이 없고 사용할 물이 충분하지 않고 먹을 음식도 없는데 그들의 생활은 캄빌리가 살아온 그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모든 게 자유로웠다. 캄빌리가 상상한 적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아마디 신부를 통해서도 캄빌리의 마음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마디 신부를 대할 때 설레고 떨리는 캄빌리야말로 진짜 십 대의 소녀라는 게 느껴진다.

엄마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통해 그 애들이 뛰어넘어야 할 목표를 점점 더 높였다. 아이들이 반드시 막대를 넘으리라 믿으면서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274쪽)

성장이란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캄빌리는 그 과정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제까지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믿었던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과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가득했다.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이전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니까. 그러면서도 그 세계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는 사실. 사촌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이페오마 고모가 그곳에서 적응하면서 나이지리아를 그리워하는 마음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오빠 자자가 영성체를 거부하고 “그럼 죽을게요.” “그럼 죽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에서 전해지는 결연한 의지처럼. 미세하게 시작된 마음의 움직임은 용기를 데려오고 행동으로 이끈다.

그래서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혹독한 성장소설로 여겨진다. 하지만 단순히 성장소설로만 볼 수 없다.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한 사회, 문화, 정치, 제도의 이야기이자 우리가 겪는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가부장 제도, 군부가 장악한 사회, 고모가 재직한 대학교의 시위 현장은 우리의 과거였고 현재에서도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캄빌리처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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