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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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가운데 마음을 움직이는 꽃은 목련이다. (12쪽)

 

가을이 시작되었고 나는 봄꽃을 잊었다. 그랬던 내게 이 첫 문장은 아득한 시간을 선물하는 것만 같았다. 목련이 환하게 피었던 봄의 기억, 그 숱한 봄의 기억을 건네는 문장이다. 여기저기 꽃들이 핀다고 요란을 떨었던 마음, 그 봄은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목련나무 그 자리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시간들. 김종관의 에세이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는 이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 그 누군가와 그 무엇에 대한 생각과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책이다. 오랜 시간 한곳을 떠나지 않고 살면서 마주한 일상에 대한 보통의 기록은 그곳을 떠나고 나면 모든 것이 특별함으로 바뀌고 만다. 책 속에서 저자가 살아온 이문동의 골목들이 그렇듯 말이다. 나는 이문동의 골목을 알지 못하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그곳의 길고양이나 어떤 분위기를 상상한다. 한 장의 사진으로, 하나의 문장으로 그 골목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짧은 메모,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와 같은 글, 영화에 대한 애정과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면서 그 시간을 나도 지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가을이라는 계절 탓일 수도 있고 어느 시절 내가 몰두했던 무언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져 만들어지는 어떤 결과가 있기도 하니까. 결핍의 상태에서만 주어지는 긍정의 힘이라 핑계를 댄다. 후회와 미련은 언제나 부질없는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그 감정에 갇히고 만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당시의 고단함을 이겼던 힘은, 가지지 못한 그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지지 못한 위로야말로 때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으로 둔감하곤 하니까. (64쪽)

여행지에서 만나는 표정과 특유의 설렘을 소란하지 않고 담담하게 적은 문장이 오히려 이방인의 시선과 감정을 꾹꾹 담은 것 같다. 집중하고 있지만 그것을 들킬 새라 얼굴의 표정을 숨기는 모습이랄까. 김종관의 사진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낀다. 물론 나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조금은 어둡고 불투명한 사진을 오래 바라본다. 그 사진에 녹아든 어떤 감정을 상상하며, 그 공간에서 오고 갔을 말들의 깊이를 상상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의 영화가 탄생했을 거라는 나만의 추측까지. 그래서 그가 보내는 편지를 꼭 받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새긴다. 설사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라도 나는 그 편지의 수신인이 되고 싶다.

 

 

 

 

영화가 가끔 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읽히기를,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것. 그러한 목적이 살아 있을 때 영화는 살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고단한 여정에 아랑곳없이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되어, 무관심 속에 서서히 죽음을 맞기도 한다. (131쪽)

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의 꿈속 한 장면,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을 들려주는 사랑에 대한 아릿한 고백, 지하철 1호선의 풍경, 옛 동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점상의 기억, 사라졌거나 사라질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애틋하다. 영원할 거라 믿었던 시절, 단단하게 자리를 지킬 거라 믿었던 것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사라지기에 그것들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 쌓여 그가 만들 영화는 어떤 빛을 낼까. 조금은 우울하고 쓸쓸한 빛을 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빛을 기억하고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완벽한 빛이 될 것이다. 이 책이 그러하듯이.

 

완벽하게 좋은 순간, 그것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인지.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억은 스러져가는 환영을 잃어버리지 않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136쪽)

떠나온 곳으로 돌아온 삶을 살고 있지만 종종 그것을 잊는다. 작은 동네지만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자주 찾던 가게는 어느 순간 업종이 바뀌었다. 그래도 친구에게는 이곳은 내가 있는 곳이며 우리가 함께 보낸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 나의 울퉁불퉁한 마음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 그곳에 당신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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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9-20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 천천히 사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한주 한달 한해 휙 가 버려요 뭐 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이 늘 들고... 세상도 빨리 바뀌고 있겠지요 그것도 어쩌다 가끔 느끼기는 하는군요 날마다 생각하는 건 그대로인 듯도 한데, 그것도 조금씩 바뀌고 있겠습니다 며칠전에 어떤 말을 듣고 나중에 그렇게 바뀌면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아직 오지 않은 날인데...

명절이 갔군요 저는 다를 거 없었지만 편안하게 보내셨기를 바라고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19-09-24 10:0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어떤 시간은 빨리 흐르고 어떤 시간은 너무 천천히 흐르지요.
답글이 늦었어요. 일교차가 심하네요. 흐선 님,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