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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스무 살은 어른, 대학, 독립, 자유와 같은 단어였다. 적어도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스무 살이 되면 해야 할(할 수 있는) 일들의 목록을 작성하곤 했다. 그러나 스무 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성적에 맞춰 들어온 대학에서 공부는 재미가 없었고 연애는 달콤하지 않았다. 당시에 시들하게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입체적으로 살아나 내게로 달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은희경의 『빛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를 추억한다거나 그리워한다는 말이 아니다. 잊고 있던 잊고 싶었던 그 시절과 소설 속 그 시절이 하나로 합쳐진 것 같다고 할까.
1977년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의 한 여자 대학교 입학한 화자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한 대학 생활과 동기, 선배들의 이야기로 함축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대상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숙사의 내부 사정도 흥미롭다. 귀가 시간과 점호가 있다거나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과정이나 외출증을 끊는 일은 마치 군대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거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단순한 구성은 아니다. 1977년과 2017년을 오가며 화자인 ‘김유경’과 같은 대학 기숙사 동기이자 소설가인 ‘김희진’의 시선으로 다루기에 서로 다른 기억으로 서술된다.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 있다.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281쪽)
어쩌면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흐려지고 왜곡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소설에서 소설가 김희진의 소설 속에 그려진 1977년 기숙사의 모습은 소설가의 시선으로 재편집되었고 ‘나’는 그것이 때로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4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을 꼬집어 판가름을 내고 싶지 않다. ‘나’는 과거의 자신이 품었던 생각과 의지대로 현재를 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일부는 그 과거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건 인정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기대했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고 아쉬워할 수도 있다. 소설 속 그녀들과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살았다면 당시 서울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유신정권의 시대, 대학생의 정치적 의식과 활동에 대해 은희경이 날카롭게 파고들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 학보사 기자인 화자의 시선으로 스케치를 하듯 보여준다. 다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의 미팅과 연애, 결혼에 대해서도 기숙사 구성원 각각의 목소리를 빌려 들려준다. 한 방에 네 명씩 생활하는 여대생은 다양한 사회 계층을 의미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 계층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런 구성이 가장 매력적이고 탁월하다. 여자 대학교의 기숙사란 특정 공간에서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가장 정확하고 내밀한 그녀들의 의견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들의 곁에서 그들의 수다, 때로는 논쟁을 가만히 듣고 있는 듯 착각에 빠지는 이유다. 40년이 지난 지금의 목소리는 어떤가 생각도 해본다.
‘나’가 친구인 김희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똑같이 작동한다. 소설 속 그들과 같은 세대가 아니더라도 잊고 있던 어떤 시절을 불러오는 기능을 한다. 동시에 소설가 은희경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나에게는 지워진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선명하게 살아날 때 한 편으로는 당혹스럽지만 한 편으로는 반갑고 신기하다. 은희경의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그런 기분을 안겨줄 것이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337쪽)
오랜만에 만난 은희경의 장편을 읽으면서 정미경, 공지영의 소설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었던 나를 되찾고 싶어졌다. 이처럼 소설은 때로 잊었던 나를 불러오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이런 소설이 있어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