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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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의 휴대폰을 해지했다. 정지 상태로 유지되었던 언니의 번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휴대폰으로 11개의 번호를 꾹꾹 누르자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나왔다. 휴대폰에 담겼던 이름과 연락처는 이제 사라진 것일까. 지난 일, 지난 삶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것일까. 간직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일까. 어쩌다 보니 기억과 시간에 대한 소설을 읽고 계속 그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나는 두 편의 소설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미 다른 곳에서 만난 소설이다. 

 

소설은 종종 기억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나를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 지금이 아닌 그때로 데려다 놓는다. 후회라기보다는 아쉬움 같은 그런 감정을 불러온다. 소설 속 화자의 감정을 빌려 그리워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고나 할까.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은 파리에서 만난 언니나 화자 ‘나’가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시간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감정을 고스란히 마주할 수 있다.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원했던 ‘나’와 파리 주재원인 언니가 보낸 시간들, 하나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어디서부턴지 어긋나버리는 관계. 아니, 그 어긋남을 포착했지만 모른 척했을지도 모를 그 시절의 미묘한 감정의 파장.

 

 

 

 

그 모든 일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우리는 그 일을 이야기하며 같이 웃었다. (「시간의 궤적」)

 

잿빛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짙푸른 물결이 이쪽으로 다가오다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황금색으로 빛나던 장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파라솔의 몸체가 흔들렸고 이제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고 옅은 슬픔 같은 것이 가슴 안에서 서서히 퍼졌다. (「시간의 궤적」)

 

지나간 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누군가와 다시는 그 일을 꺼내볼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건 울적한 일이다. 완벽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부질없는 것일까. 헤어짐의 순간이 그를 기억하는 장면이 되는 건 아니지만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는 건 아니다. 나를 기억하는 당신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과 같을까. 여전히 이 구절에 마음이 머문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니 과거를 새로 살아내는 것과 같으니까. (「우리들」)

 

당신과 나 사이의 시간은 그 어딘가에 정지되었음을 느낀다. 다시 그 시간은 흘러갈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 걸 안다. 용기는 아직 채워지지 않았고 나는 내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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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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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얼마나 완벽할까. 나와 당신이 하나의 사건을 공유한다고 해도 둘의 기억이 완벽하게 포개어지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한 기억을 남겨두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영상으로 담아둔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양하게 해석된다. 기억과 기록이라는 건 현재가 아닌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설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 빛바랜 누군가의 삶을 복원하는 일,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말이다. 제발트의 소설이민자들은 그런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제발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소설은 제목이 말해주듯 이민자들에 대한 단편집으로 화자인 가 네 명의 이민자의 삶을 들려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지배했던 곳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예상할 수 있는 화자는 제발트로 볼 수 있다. 소설은 구체적인 관찰과 묘사로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어떤 이에게는 무척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지루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어떤 갈등이나 관계의 설정 같은 게 아니라 막이 끝날 때마다 주인공이 바뀌는 모노드라마이자 다큐멘터리 같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네 명은 모두 이민자로 살았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고향과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삶을 이어가지만 불행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첫 번째 가 만난 이민자는 헨리 쎌윈 박사로, ‘가 방을 얻은 집 주인의 남편이다. 의사로 퇴직한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영국으로 이민을 왔다. 영국에서 이름과 성을 바꾸고 의사로 성공했고 아내의 재력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민자의 향수병이 있었고 끝내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두 번째 만남은 의 초등학교 스승인 파울 베라이터로 고향에서 그의 부고를 접한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통해 어린 시절 가 몰랐던 스승의 다른 면을 마주한다. 파울의 마지막을 잘 아는 린다우 부인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와 앨범을 보게 된다.

 

앨범에는 그 당시뿐만 아니라 파울 베라이터의 거의 전 생애가, 몇몇 공백을 빼고는 전부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파울 자신이 사진 아래 기록해둔 메모들도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이 앨범을 앞에서 뒤로, 다시 뒤에서 앞으로 훑어보았고, 그 뒤로도 여러 번 다시 펼쳐보았다. 이 앨범에 담긴 사진들을 보다 보면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기도 했고, 우리가 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앨범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든다. (파울 베라이터, 61)

 

사진으로 남은 사람들을 보는 일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온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나의 부모와 형제를 떠올렸다. 소설 속 이민자들은 아니지만 우리는 대부분 고향을 떠나 살아가며 그곳을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이민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소설로 돌아가 의 여정을 따라 세 번째 만남인 어머니의 외삼촌인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네 번째 만남 화가 막스 페르버의 삶을 듣는다. 암브로스는 직장을 따라 이주한 경우로, 스위스에서 일본에 거쳐 미국으로 왔다. 뉴욕에서 영향력 있는 유대인 은행가 집안의 집사로 정착한다. 암브로스의 일은 그 집안의 아들인 코스모의 비서이자 여행 동반자였다. 이 단편은 의 파니 이모가 들려주는 외삼촌 이야기로 조금 더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외삼촌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린 회상들을 아주 느릿느릿 이야기했는데, 지극히 사소한 것들까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기억하게 있더구나. 외삼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외삼촌이 수많은 일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자기 자신과 연결 시켜주는 추억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점점 확실히 알게 되었어. 그래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외삼촌에게는 고통이기도 했고, 자신을 해방 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했지. 말하자면 구원이자 가차 없는 자기 파괴이기도 했던 거야.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126~127쪽)

 

코스모와 암브로스는 수직관계였지만 친구이자 연인처럼 가까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코스모와 암브로스가 여행을 다니면서 마주했던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몰락의 기억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죽음으로 향하게 만든다. 나는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없고 유대인으로의 삶도 알 수 없지만 어디든 함께 했던 코스모의 죽음으로 암브로스 할아버지가 느꼈을 삶의 허무와 절망이 어떤 것인지 조금을 알 것도 같다. 그가 남긴 글귀가 오래도록 나를 붙잡는 것처럼.

 

기억이란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의 비망록의 글귀, 185)

 

마지막 막스 페르버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도망친 유대인 화가인 그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루이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가 만난 페르버가 아닌 루이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가족에 대한 부분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생에 대해 알려면 그의 가족, 그의 뿌리부터 시작되어야 하니까.

 

그들의 삶에 다가갈 수 있을까? 책 속에 수록된 흑백 사진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칠 뿐이다. 그들을 만나 취재하고 기록하고 탐방한 제발트도 마찬가지다. 제발트가 그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곳을 찾았을 때 그가 마주한 풍경은 아름답고 어떤 곳은 상처라고는 찾을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하듯 기억은 퇴색되어 형체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을 기록함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의 형태를 매만지는 제발트의 노력은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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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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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함은 열망을 부추긴다. 그리고 우리가 열망하는 것들은 대체로 불온하다. 그것을 선택했을 경우 주변의 시선을 생각하면 그렇다. 보편적이지 않거나 상식이라 말하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것들. 어떤 이는 가슴속 타오르는 열망을 꾹꾹 누른 채 살아가고 어떤 이는 과감하게 저지르며 살아간다. 소심한 심장을 지닌 나 같은 보통의 사람들은 둘 사이를 오가는 상상을 하거나 소설이나 영화를 통한 대리만족으로 대신한다. 간절함과 용기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다. 안전하고도 안정된 궤도를 이탈하면서 느낄 속도가 두려워서, 혹은 잠시나마 불온함을 열망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 궤도를 벗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열망하기를 그만둔다. 단편집인데도 연작 소설이나 장편소설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거지 소녀를 통해 내 안의 갈증과 마주했다. 그것은 역시나 불온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내 현재의 삶에서는 응원받을 수 없는 욕망이었고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삶들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앨리스 먼로의 소설 속 인물(여성)의 무모하면서 맹랑한 선택을 지지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앨리스 먼로는 여성의 내면과 심리를 다루는데 탁월하다. 마치 그녀들을 상담하며 조언하는 상담사 같다. 그런데도 소설은 지겹거나 따분하지 않다. 나라면 할 수 없는 행동과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로즈와 그녀의 계모인 플로의 인생을 담은 성장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대한다. 로즈의 딸 애나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말이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애나의 삶은 그녀의 것이니 로즈와 플로의 살아온 인생을 들여다보자. 어린 로즈에게 플로는 다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심지어 로즈의 버릇을 고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남편을 거들며 부추긴다. 놀라운 건 로즈는 이 모든 걸 알고 그 결과를 예측한다.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아버지의 장엄한 매질, 어디까지나 그들에게는 장엄한 매질이 끝난 후 플로가 가져다줄 달콤한 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어서, 시골에서 작은 상점을 하며 상점 뒤의 헛간에서 가구를 고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다정함은 사치였다. 교양이나 품격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삶이었다.

 

플로는 로즈의 삶이 부러웠던 건 아닐까?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는 로즈가 말이다. 자신이 지나온 삶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로즈였으니까. 로즈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만큼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고민이 무엇인지 자신이 관여할 수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 가능성이 로즈에게 생기는 거였다. 다시 말해 로즈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는 두 여인은 다른 시간대를 사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여인은 결코 포개어질 수 시간을 만들어가며 서로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 소설 속 그들이 사는 시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여자에 대한 편견과 무시는 일상이었다. 로즈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애정은커녕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으면 더더욱. 그래서 로즈는 잔망스럽게 되바라진 소녀가 되었다. 하지만 독자로서 내가 바라보기에 그 모습은 로즈가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인생은 무심히 흘러갔다. 무서운 아버지는 병들고 플로는 늙었다. 로즈도 더는 소녀가 아니다. 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딸에게 의지하고 만다. 과거라는 이름으로 추하고 지저분하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억은 어떻게 꺼냈을 때 추억이 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말의 문제라기보다 타이밍의 문제에 가깝다. 언제 어느 때 기억을 꺼냈는가에 따라 그 기억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잊혀야 할 불행한 과거가 되기도 한다. 불온함에 열망의 부추김을 당하는 로즈에게 새엄마의 지난 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두 사람의 어긋난 과거만 재확인해줬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남자를 조심하라던 플로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말은 불필요한 조언이기도 했다. 추억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진심은 공허한 말이 되어 상대에게 닿지 못한다. 플로가 기억을 꺼낼수록 로즈는 그녀로부터 더 멀리, 기억을 떨쳐내듯 멀어질 것이다. 한편으론 플로의 기억 꺼내기는 로즈의 과감성을 추동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로즈.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로즈. 이런 로즈의 성향은 앨리스 먼로의 소설 속 인물의 특징이다. 위험을 감수하며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불운이었을지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는 과감한 여성.

 

호기심 그 어떤 욕망보다 더 줄기차고 긴급한 것. 그 자체로 욕망인 것.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물러나 지나치게 오래 기다리면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게 이끄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야생 백조, 118~119)

 

이런 행동은 로즈의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거지 소녀장난질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가난한 대학생인 로즈와 부유한 집안의 아들 패트릭의 만남은 결말을 예상하게 했다. 로즈가 가난해서 좋다는 어이없는 패트릭의 고백. 극명하게 다른 환경은 서로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로즈도 패트릭을 선택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충만함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로즈에게 결혼은 완성이 아니었다는 걸. 로즈에겐 다양한 삶의 경험이 필요했다. 로즈에게 결혼이란,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같은 것이었다. 로즈는 그런 강렬하면서도 뜨거운 것을 경험하고 싶었을 뿐이다.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 그녀가 그간 남들에게 해왔던 다른 모든 얘기들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상한 것 같은데, 그녀는 정당화를 할 수가 없다. 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벽지를 바르고 휴가를 떠나고 식사를 함께하고 쇼핑을 하고 아픈 아이를 걱정하는 길고 분주한 기간처럼 완벽하게 평범하고 견딜 만한 시간도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로는 이유도 조짐도 없이 행복이, 행복의 가능성이 나타나 그들을 놀라게 하고 했다는 의미다. (거지 소녀, 177)

 

친구의 남편과의 연애를 다룬 장난질의 제목이 암시하듯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이 아니라 어떤 탈출구 같은 걸 원했던 것이다. 그 후의 삶에 대해 두려움 따윈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로즈는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그 감정이 불러올 어떤 파국에 대해서도 로즈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다, 파국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 이혼이라는 결말이 온전히 비극적인 건 아니므로. 패트릭과의 사랑과 결혼은 누군가에게는 완벽함 그 자체였겠지만 로즈에게는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패트릭을 사랑한 건 맞다. 둘 사이엔 애나도 있으므로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던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로즈에겐 로즈만의 공간, 로즈만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는 거다.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았지만 포개지지 않는 새엄마와의 삶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바로 이거 하나였다. 애나를 데리고 로즈가 길을 떠나는 과정의 이 장면은 분명 다른 장면인데도 어떤 기시감이 느껴졌던 건 이 때문이었다. 로즈가 만든 로즈의 세계로 나가는 시작이었으므로.

 

밤에 애나가 잠든 사이 로즈는 창문을 통해 충격적일 정도로 높이 쌓여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기차는 눈사태가 무서운 듯 천천히 기어갔다. 로즈는 겁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어두운 칸막이 안에 갇힌 채로 거친 객차용 담요를 덮고 그런 무자비한 풍경을 지나 어디론가 실려 간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제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차의 진행은 항상 안전하고 적절하게 느껴졌다. 반면 비행기는 언제라도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닫고 질겁하여 외마디 저항도 못하고 바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섭리, 251)

 

애나가 엄마인 로즈를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하다. 패트릭은 괜찮은 아빠였고 부모님의 이혼은 애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플로는 늙었고 양로원에서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으며 살아간다. 로즈는 누군가가 알아보는 배우로 학교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면서 사랑을 꿈꾸고 열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플로, 로즈, 애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무엇이 되기를 바랐던 소녀는 결국 자신의 원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교사였던 미스 해티가 했던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질문이 그녀를 붙잡는다. 그 순간에도 불온함은 그녀를 열망하게 만든다. 무엇으로부터? 삶으로부터 말이다.

 

우리는 로즈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다. 로즈의 인생뿐 아니라 그 누구의 인생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격이 없다. 로즈가 살아온 인생이 꽃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로즈밖에 없다. 로즈이거나 로즈가 아닌 나는 그것에 대비(對比)하며 내 안의 로즈와 책 속 로즈를 가만 들여다볼 뿐이다. 저마다의 삶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므로. 앨리스 먼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산다는 건 고역이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살아가는 동안 삶에 대한 확신을 1%도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지속되더라도 기꺼이 삶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불온한 갈망의 싹을 품어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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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8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를 봐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이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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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은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들고, 감정들은 처음엔 항상 미친 듯이 날뛰죠. 하지만 그 사랑이 현실이 되었을 땐 꽉 붙잡아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진정한 사랑이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만한 나이니까요.” (255쪽)

 

뻔한 결말은 흥미롭지 않다. 그러나 뻔한 결말임을 알면서도 그 과정이 뻔하지 않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운명적인 만남, 처음부터 둘 사이에는 뭔가 기류가 흐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니콜라스 스파크스의 소설 『나를 봐』속 주인공 콜린과 마리아의 만남이 그랬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한적한 길에서 타이어 교체로 어려움을 당한 마리아 앞에 나타난 콜린의 얼굴엔 폭력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냥 이 남자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남자의 호의는 단순했다. 도움을 필요한 상황이니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둘은 곧 만날 것이고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

 

소설은 예상한 그대로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다. 콜린과 마리아의 시선를 교차하며 상대에 대한 솔직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묘사한다. 우연처럼 다시 만난 콜린과 마리아가 천천히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다가간다. 서로에게 전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다면 이 연애소설이 뭐가 특별한 것일까? 콜린과 마리아의 상황이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콜린은 과거 감정 조절 장애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로 인해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고 보호관찰 중이다. 현재도 격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운동과 달리기를 한다. 조심성아 많고 소심한 마리아는 검사실에서 일하다 법률회사의 변호사로 일하며 일 중독에 빠져 지낸다. 실패한 연애로 남자친구에 대한 확신이 없다. 콜린의 성격 때문에 걱정하면서도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둘은 하루하루 사랑을 쌓아간다. 그러다 마리아에게 익명의 누군가가 보낸 꽃이 배달되고 스토킹이 시작된다.

 

콜린은 마리아를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마리아 주변을 탐색하고 감시한다. 그런 콜린은 마치 시한폭탄 같아서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마리아는 그를 신뢰한다. 이제 소설은 연애가 아닌 스릴러가 된다. 누가 마리아를 스토킹하는 것일까? 문제는 마리아뿐 아니라 전체로 확대된다는 점이다. 콜린은 학업과 일을 접고 모든 신경을 마리아에게 쏟고 자신을 보호관찰하는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고 함께 범인을 잡고자 한다. 분명 결말은 뻔하다. 범인을 검거하는데 콜린의 역할이 크고 그로 인해 둘 사이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질 테니까.

 

콜린에게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 준 마리아,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견디며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콜린의 모습은 통해 마리아는 자신도 변화를 꿈꾸고 있음을 발견한다. 달달한 로맨스를 원하는 이에게도 제격인 소설이다. 거기다 범인을 특정하는 과정과 심리를 파악하고 움직이는 콜린의 활약도 한몫 거든다. ‘숨 막히게 강렬하고 아름다운 서스펜스 로맨스’란 광고 카피는 거품이 아니었다. 지루한 일상에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이 소설을 펼쳐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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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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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든다. 이는 자기 자리의 안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음을 의미이다. 이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났을 때 발생하는 위험의 변수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영원한 자리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 그 안위의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자기를 지키는 것, 공간을 점유하는 것, 그것은 생존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 자리를 부여하는 이가 누구인지,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중요성은 내버려 두고서라도. 그래서 때로 연대의 필요성을 느낀다.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반갑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허울 좋은 구실을 핑계 삼아 우리는 연대했다고 강조한다. 연대의 이면에는 저마다의 욕망이 꽉 차 있는데 우리는 그 진실을 외면한다.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속 치안판사를 비롯한 모든 인물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건 자신의 자리였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무척 재밌다고 생각했다. 지인이 어땠냐고 물었을 때도 재미있게 읽고 있다고 답했을 정도다.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세계의 빠져들었고 예측할 수 없는 행보에 조바심이 났으니까.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소설을 생각할 때 쿳시가 만든 허구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어딘가, 아니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타인의 자리를 공격하고 그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는 일 말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법망을 이용해 교묘하게 제국을 형성하는 일, 대의란 명분으로 소소한 일상을 망가뜨리는 뻔뻔함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들의 제국을 반드시 완성 시키는 데 필요했던 야만인은 누구인가? 정말 야만인은 존재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건, 야만인이란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용납하려 하는 비열하고 비겁한 자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야만인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소설 속에서 그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아니, 변명한다. 제국의 변두리에서 관리자로 사는 치안판사는 곧 다가올 은퇴를 생각하면 여유로운 일상을 보낸다. 이를 위해 그는 지금 이대로 그 자리만 지키기만 하면 됐다. 선글라스를 낀 졸 대령이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졸 대령의 선글라스는 사물의 색을 명확하게 볼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며 그것은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상징처럼 보인다. 그는 제국의 변두리, 국경의 야만인을 잡아 들여 그들을 퇴출하고 제국을 보호하는 임무를 지녔다. 야만인은 위험한 존재이고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치안판사는 그의 뜻을 반대한다. 야만인은 유목인이며 이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치안판사에게 야만인은 적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졸 대령이 그냥 잠깐 순찰만 하고 돌아가기를 바랐다. 졸 대령은 그런 치안판사를 증오한다. 판사라는 위치에서 자기 자리의 안위만 생각할 뿐 위대한 제국의 명예와 안전은 저버린 탐욕스럽고 음흉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졸 대령은 자신의 본분을 다해 야만인을 체포했고 그들을 고문하고 문초한다. 야만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그저 평범한 부족이며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눈앞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딸은 그 과정에서 눈이 먼 상태가 되고 다리를 다쳐서 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러니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돼 버린 것이다. 그녀 앞에 늙은 남자가 나타난다. 상처를 치료해주고 잠잘 곳을 제공하고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녀에게 고향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성과 친절을 베푸는 그는 좋은 사람일까? 어쩌면 치안판사는 기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눈먼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그녀의 약함을 이용해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켰고 그녀를 부족에게 데려다주는 것으로 치안판사의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보여주려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야만인의 실체를 졸 대령에게 증명하고 싶은 계획된 행동이었다. 부족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열악했다. 마실 물은 없고 날카로운 바람에 말조차 나가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가야 한다. 치안판사는 명분을 저버릴 수 없었고 눈먼 여인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그곳이므로. 치안판사는 눈먼 여인이 자신에게 감사할 거라 여겼던 것 같다. 미련하고도 미련한 늙은이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야만인이라 부르며 자신을 끌고 온 그들과 자신이 같은 편이라는 걸 잊은 것 같다. 눈먼 여인의 부족에게는 치안판사나 제3국의 졸 대령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네들이야말로 야만인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고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일은 오직 야만인만이 그럴 수 있기에 그렇게 불리는 게 마땅하다.

 

치안판사가 돌아오니 자신의 자리는 사라졌다.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이유였다. 3국의 병사들이 자신을 심문하고 감옥에 가둔다. 그런데 놀라운 건 치안판사의 당당함이다. 세상에나 그는 스스로 제국주의의 반대편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자신을 투쟁자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도 새로운 유형의 야만인들이라고 꼬집어 말하는 부분은 공감한다. ‘야만인치안판사에게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새로운 야만인이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내가 우쭐한 이유를 안다. 제국의 수호자들과 연대는 이제 끝났다. 나는 반대편에 서게 됐다. 유대관계가 깨졌다. 나는 자유인이다. 누군들 웃지 않으랴? 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기쁨인가! 구원을 받는 게 그렇게 쉬워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내가 반대편이 된 일의 이면에 무슨 원칙이라도 있는가? 내 책상을 강탈하고 내 서류들을 함부로 건드리는 새로운 유형의 야만인들 중 하나를 보고 감정이 격해져 그랬단 건 아닐까? 내가 지금 버리려고 하는 자유는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130)

 

모두 자리를 잃었다. 눈먼 여인만 잃었던 자리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회복된 건 아니었다. 누군가의 자리를 약탈하고 문명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며 제국주의는 성장했다. 그들은 분명 야만인들에게 죄를 지었지만,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야만인들에겐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있다.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방랑과 자유로움이 있다.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야만인이 아니었다. 서구의 진정한 야만인들이 침략하기 전까지 이들은 자유인이었고 야만인들이 침략한 이후에도 그들은 그 자유의 자리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그들에겐 그들의 자리가 있다. 그 자유의 자리를 침해할 권리를 가진 자, 누구인가?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이다. 나는 그 말을 하며, 그가 내 입술에서 그걸 읽는 모습을 지켜본다.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나는 얘기한다. 나는 그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거듭 끄덕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내 가슴과 그의 가슴을 가리키며 그 말을 반복한다. (241)

 

수많은 수탈의 역사를 생각한다. 반복된 전쟁과 상처로 인해 사라진 야만인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던 그들의 삶의 터전을 떠올린다. 누가 그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용서를 빌 것인가. 나의 자리가 중요하고 나의 삶이 존중받아야 하듯 타인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무섭고도 잔혹한 소설이다. 잔혹함을 이겨내는 아름다운 문체에 반했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통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파괴된 제국의 변두리에서 마주한 치안판사와 졸 대령, 소설의 화자인 치안판사의 마지막 남은 양심의 한 조각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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