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얼마나 완벽할까.
나와 당신이 하나의
사건을 공유한다고 해도 둘의 기억이 완벽하게 포개어지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한
기억을 남겨두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영상으로 담아둔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양하게 해석된다.
기억과 기록이라는 건
현재가 아닌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설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
빛바랜 누군가의 삶을
복원하는 일,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말이다.
제발트의
소설『이민자들』은 그런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제발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소설은 제목이 말해주듯 이민자들에 대한
단편집으로 화자인 ‘나’가 네 명의 이민자의 삶을
들려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지배했던 곳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예상할 수 있는 화자는
제발트로 볼 수 있다.
소설은 구체적인 관찰과
묘사로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어떤 이에게는 무척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지루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어떤 갈등이나 관계의 설정 같은 게 아니라 막이 끝날 때마다 주인공이 바뀌는 모노드라마이자 다큐멘터리 같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네 명은 모두 이민자로
살았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고향과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삶을 이어가지만 불행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첫 번째
‘나’가 만난 이민자는 헨리 쎌윈
박사로,
‘나’가 방을 얻은 집 주인의
남편이다.
의사로 퇴직한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영국으로 이민을 왔다.
영국에서 이름과 성을
바꾸고 의사로 성공했고 아내의 재력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민자의 향수병이 있었고 끝내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두 번째 만남은
‘나’의 초등학교 스승인 파울 베라이터로 고향에서
그의 부고를 접한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통해 어린 시절 ‘나’가 몰랐던 스승의 다른 면을
마주한다.
파울의 마지막을 잘
아는 린다우 부인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와 앨범을 보게 된다.
앨범에는 그 당시뿐만 아니라 파울 베라이터의
거의 전 생애가,
몇몇 공백을 빼고는
전부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파울 자신이 사진
아래 기록해둔 메모들도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이
앨범을 앞에서 뒤로,
다시 뒤에서 앞으로
훑어보았고,
그 뒤로도 여러 번
다시 펼쳐보았다.
이 앨범에 담긴
사진들을 보다 보면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기도 했고,
우리가 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앨범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든다.
(「파울 베라이터」,
61쪽)
사진으로 남은 사람들을 보는 일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온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나의 부모와 형제를 떠올렸다.
소설 속 이민자들은
아니지만 우리는 대부분 고향을 떠나 살아가며 그곳을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이민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소설로 돌아가
‘나’의 여정을 따라 세 번째 만남인 어머니의
외삼촌인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네 번째 만남 화가 막스 페르버의 삶을 듣는다.
암브로스는 직장을 따라
이주한 경우로,
스위스에서 일본에 거쳐
미국으로 왔다.
뉴욕에서 영향력 있는
유대인 은행가 집안의 집사로 정착한다.
암브로스의 일은 그
집안의 아들인 코스모의 비서이자 여행 동반자였다.
이 단편은
‘나’의 파니 이모가 들려주는 외삼촌 이야기로 조금
더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외삼촌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린 회상들을 아주 느릿느릿 이야기했는데,
지극히 사소한
것들까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기억하게 있더구나.
외삼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외삼촌이 수많은 일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자기
자신과 연결 시켜주는 추억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점점 확실히 알게 되었어.
그래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외삼촌에게는 고통이기도 했고,
자신을 해방 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했지.
말하자면 구원이자
가차 없는 자기 파괴이기도 했던 거야.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126~127쪽)
코스모와 암브로스는 수직관계였지만 친구이자
연인처럼 가까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코스모와 암브로스가
여행을 다니면서 마주했던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몰락의 기억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죽음으로 향하게 만든다.
나는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없고 유대인으로의 삶도 알 수 없지만 어디든 함께 했던 코스모의 죽음으로 암브로스 할아버지가 느꼈을 삶의 허무와 절망이 어떤 것인지 조금을
알 것도 같다.
그가 남긴 글귀가
오래도록 나를 붙잡는 것처럼.
기억이란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의 비망록의 글귀,
185쪽)
마지막 막스 페르버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도망친 유대인 화가인 그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루이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나’가 만난 페르버가 아닌 루이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가족에 대한 부분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생에 대해
알려면 그의 가족,
그의 뿌리부터
시작되어야 하니까.
그들의 삶에 다가갈 수
있을까?
책 속에 수록된 흑백
사진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칠 뿐이다.
그들을 만나 취재하고
기록하고 탐방한 제발트도 마찬가지다.
제발트가 그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곳을 찾았을 때 그가 마주한 풍경은 아름답고 어떤 곳은
상처라고는 찾을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하듯 기억은 퇴색되어 형체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을
기록함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의 형태를 매만지는 제발트의 노력은 숭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