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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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의 휴대폰을 해지했다. 정지 상태로 유지되었던 언니의 번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휴대폰으로 11개의 번호를 꾹꾹 누르자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나왔다. 휴대폰에 담겼던 이름과 연락처는 이제 사라진 것일까. 지난 일, 지난 삶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것일까. 간직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일까. 어쩌다 보니 기억과 시간에 대한 소설을 읽고 계속 그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나는 두 편의 소설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미 다른 곳에서 만난 소설이다. 

 

소설은 종종 기억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나를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 지금이 아닌 그때로 데려다 놓는다. 후회라기보다는 아쉬움 같은 그런 감정을 불러온다. 소설 속 화자의 감정을 빌려 그리워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고나 할까.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은 파리에서 만난 언니나 화자 ‘나’가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시간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감정을 고스란히 마주할 수 있다.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원했던 ‘나’와 파리 주재원인 언니가 보낸 시간들, 하나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어디서부턴지 어긋나버리는 관계. 아니, 그 어긋남을 포착했지만 모른 척했을지도 모를 그 시절의 미묘한 감정의 파장.

 

 

 

 

그 모든 일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우리는 그 일을 이야기하며 같이 웃었다. (「시간의 궤적」)

 

잿빛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짙푸른 물결이 이쪽으로 다가오다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황금색으로 빛나던 장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파라솔의 몸체가 흔들렸고 이제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고 옅은 슬픔 같은 것이 가슴 안에서 서서히 퍼졌다. (「시간의 궤적」)

 

지나간 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누군가와 다시는 그 일을 꺼내볼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건 울적한 일이다. 완벽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부질없는 것일까. 헤어짐의 순간이 그를 기억하는 장면이 되는 건 아니지만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는 건 아니다. 나를 기억하는 당신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과 같을까. 여전히 이 구절에 마음이 머문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니 과거를 새로 살아내는 것과 같으니까. (「우리들」)

 

당신과 나 사이의 시간은 그 어딘가에 정지되었음을 느낀다. 다시 그 시간은 흘러갈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 걸 안다. 용기는 아직 채워지지 않았고 나는 내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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