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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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든다. 이는 자기 자리의 안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음을 의미이다. 이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났을 때 발생하는 위험의 변수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영원한 자리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 그 안위의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자기를 지키는 것, 공간을 점유하는 것, 그것은 생존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 자리를 부여하는 이가 누구인지,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중요성은 내버려 두고서라도. 그래서 때로 연대의 필요성을 느낀다.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반갑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허울 좋은 구실을 핑계 삼아 우리는 연대했다고 강조한다. 연대의 이면에는 저마다의 욕망이 꽉 차 있는데 우리는 그 진실을 외면한다.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속 치안판사를 비롯한 모든 인물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건 자신의 자리였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무척 재밌다고 생각했다. 지인이 어땠냐고 물었을 때도 재미있게 읽고 있다고 답했을 정도다.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세계의 빠져들었고 예측할 수 없는 행보에 조바심이 났으니까.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소설을 생각할 때 쿳시가 만든 허구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어딘가, 아니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타인의 자리를 공격하고 그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는 일 말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법망을 이용해 교묘하게 제국을 형성하는 일, 대의란 명분으로 소소한 일상을 망가뜨리는 뻔뻔함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들의 제국을 반드시 완성 시키는 데 필요했던 야만인은 누구인가? 정말 야만인은 존재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건, 야만인이란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용납하려 하는 비열하고 비겁한 자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야만인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소설 속에서 그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아니, 변명한다. 제국의 변두리에서 관리자로 사는 치안판사는 곧 다가올 은퇴를 생각하면 여유로운 일상을 보낸다. 이를 위해 그는 지금 이대로 그 자리만 지키기만 하면 됐다. 선글라스를 낀 졸 대령이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졸 대령의 선글라스는 사물의 색을 명확하게 볼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며 그것은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상징처럼 보인다. 그는 제국의 변두리, 국경의 야만인을 잡아 들여 그들을 퇴출하고 제국을 보호하는 임무를 지녔다. 야만인은 위험한 존재이고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치안판사는 그의 뜻을 반대한다. 야만인은 유목인이며 이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치안판사에게 야만인은 적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졸 대령이 그냥 잠깐 순찰만 하고 돌아가기를 바랐다. 졸 대령은 그런 치안판사를 증오한다. 판사라는 위치에서 자기 자리의 안위만 생각할 뿐 위대한 제국의 명예와 안전은 저버린 탐욕스럽고 음흉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졸 대령은 자신의 본분을 다해 야만인을 체포했고 그들을 고문하고 문초한다. 야만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그저 평범한 부족이며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눈앞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딸은 그 과정에서 눈이 먼 상태가 되고 다리를 다쳐서 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러니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돼 버린 것이다. 그녀 앞에 늙은 남자가 나타난다. 상처를 치료해주고 잠잘 곳을 제공하고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녀에게 고향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성과 친절을 베푸는 그는 좋은 사람일까? 어쩌면 치안판사는 기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눈먼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그녀의 약함을 이용해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켰고 그녀를 부족에게 데려다주는 것으로 치안판사의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보여주려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야만인의 실체를 졸 대령에게 증명하고 싶은 계획된 행동이었다. 부족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열악했다. 마실 물은 없고 날카로운 바람에 말조차 나가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가야 한다. 치안판사는 명분을 저버릴 수 없었고 눈먼 여인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그곳이므로. 치안판사는 눈먼 여인이 자신에게 감사할 거라 여겼던 것 같다. 미련하고도 미련한 늙은이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야만인이라 부르며 자신을 끌고 온 그들과 자신이 같은 편이라는 걸 잊은 것 같다. 눈먼 여인의 부족에게는 치안판사나 제3국의 졸 대령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네들이야말로 야만인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고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일은 오직 야만인만이 그럴 수 있기에 그렇게 불리는 게 마땅하다.

 

치안판사가 돌아오니 자신의 자리는 사라졌다.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이유였다. 3국의 병사들이 자신을 심문하고 감옥에 가둔다. 그런데 놀라운 건 치안판사의 당당함이다. 세상에나 그는 스스로 제국주의의 반대편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자신을 투쟁자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도 새로운 유형의 야만인들이라고 꼬집어 말하는 부분은 공감한다. ‘야만인치안판사에게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새로운 야만인이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내가 우쭐한 이유를 안다. 제국의 수호자들과 연대는 이제 끝났다. 나는 반대편에 서게 됐다. 유대관계가 깨졌다. 나는 자유인이다. 누군들 웃지 않으랴? 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기쁨인가! 구원을 받는 게 그렇게 쉬워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내가 반대편이 된 일의 이면에 무슨 원칙이라도 있는가? 내 책상을 강탈하고 내 서류들을 함부로 건드리는 새로운 유형의 야만인들 중 하나를 보고 감정이 격해져 그랬단 건 아닐까? 내가 지금 버리려고 하는 자유는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130)

 

모두 자리를 잃었다. 눈먼 여인만 잃었던 자리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회복된 건 아니었다. 누군가의 자리를 약탈하고 문명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며 제국주의는 성장했다. 그들은 분명 야만인들에게 죄를 지었지만,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야만인들에겐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있다.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방랑과 자유로움이 있다.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야만인이 아니었다. 서구의 진정한 야만인들이 침략하기 전까지 이들은 자유인이었고 야만인들이 침략한 이후에도 그들은 그 자유의 자리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그들에겐 그들의 자리가 있다. 그 자유의 자리를 침해할 권리를 가진 자, 누구인가?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이다. 나는 그 말을 하며, 그가 내 입술에서 그걸 읽는 모습을 지켜본다.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나는 얘기한다. 나는 그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거듭 끄덕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내 가슴과 그의 가슴을 가리키며 그 말을 반복한다. (241)

 

수많은 수탈의 역사를 생각한다. 반복된 전쟁과 상처로 인해 사라진 야만인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던 그들의 삶의 터전을 떠올린다. 누가 그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용서를 빌 것인가. 나의 자리가 중요하고 나의 삶이 존중받아야 하듯 타인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무섭고도 잔혹한 소설이다. 잔혹함을 이겨내는 아름다운 문체에 반했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통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파괴된 제국의 변두리에서 마주한 치안판사와 졸 대령, 소설의 화자인 치안판사의 마지막 남은 양심의 한 조각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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