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사막 - 이문재)

 

 내가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고 믿는 한 사람,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당신은 어떻게 느끼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래된 일이에요. (62~63쪽)

 

 책장을 전부 시집으로 채우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시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한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허울뿐인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알리고 더 많이 지켜봐 주어야 하는 사랑임을 안다. 최근 SNS를 시작으로 #문단_내_성폭력에 대한 진실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소장한 시집, 밑줄 긋고 옮겨 적은 시가 있었다. 시에 대한 애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시를 알고 싶었던 때, 시인이 시를 통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던 때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흐트러진 애정을 응집시켜야 한다. 부서진 사랑을 모아야 한다. 깨어진 사랑에 베일지라도 말이다. 안부가 슬픔을 깨운다는 김소연 시인의 시처럼.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그래서 - 김소연, 72쪽)

 

 그래도 시, 시를 읽는다. 시인이 고른 시, 시인이 속삭이는 시를 듣는다. 『시시하다』는 진은영 시인이 고른 92편의 시와 함께 시인의 짧은 감상(해설)을 만날 수 있다. 좋아하는 시도 있고 처음 만나는 시도 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외국 시인의 이름도 있다. 짧은 시도 있고 아주 긴 시도 있다. 詩時하다를, 시가 있는 시간이라고 읽는다.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있어 좋은 시간도 괜찮겠다. 한 편의 시를 읽는 시간은 길지 않으니 잠깐의 여유 혹은 잠깐의 바람이 통하는 시간이라도 할까. 가만히 시를 읽는 동안엔 시와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다. 천천히 시를 읽는 동안에는 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도 좋다.

 

 검은 옷의 사람들 밀려 나온다. 볼펜을 쥔 손으로 나는 무력하다. 순간들 박히는 이 거룩함. 점점 어두워지는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들, 날아오르네. 어둠은 깊어가고 우리가 밤이라고 읽는 것들이 빛나갈 때. 어디로 갔는지.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금요일 - 유희경)

 

 너무 아파서 혼자만 깨어 있는 밤, 거울을 보면 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찡그린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게 문득 우스워지곤 했어요. 그게 위로가 되었어요. (112~113쪽)

 

 유희경의 시는 금요일에 읽지 않아도 혼자 깊은 밤을 견디는 이라면 진은영의 감상처럼 충분히 위로가 될 것이다. 무리에 속하지 않고 ​밤의 무리에 스며드는 시간, 더 이상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겠지. 불안한 세상, 어디에서도 소소한 기쁨과 작은 위안을 얻지 못하는 우리에게 불어오는 날카롭고 시린 바람을 막아줄지도 모른다. 때로는 우연히 만난 한 편의 시가 전하는 뜨거운 온기가 오랫동안 우리를 데워주기도 하니까.

 

 마치 죽음이 끝장을 낼 수나 있는 거처럼. 마치 삶이 승리할 수나 있는 것처럼. 마치 긍지가 응수가 되는 것처럼. 마치 사랑이 원군이나 되는 것처럼. 마치 실패가 무슨 허락이나 되는 것처럼. 마치 산사나무가 무슨 예언이나 되는 것처럼. 마치 신들이 우리를 사랑이나 했던 것처럼. (마치 뭐나 되는 것처럼 - 앙드레 프레노, 182쪽)

 

 최근에는 그림과 함께 읽는 시, 사진과 함께 읽는 시, 테마가 있는 시가 많다. 어떤 시를 읽어야 할까, 어떤 시가 좋을까. 92편의 시 가운데 맴도는 시가 나는 좋은 시라 생각한다. 어딘가 기록하고 싶은 시, 좋은 이에게 이런 시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 시. 뭔가 내 마음을 더하고 싶은 시. 그냥 끌리는 대로 읽는다. 슈퍼문의 밤이 지나고 단단한 얼음처럼 곧게 뻗은 밤, 당신의 지친 영혼에 시가 내려앉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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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6-11-15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성폭력,성추행 사건을 접한 이후로 시집을 넘긴다는 것이 꺼림칙해졌고 괜한 결벽증?이 생겨 시집을 읽는다는 행위가 두렵단 생각이 들더군요
어서 떨쳐버려야 할텐데~~~읽을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빨리 생기길 바랄뿐입니다^^

자목련 2016-11-16 10:34   좋아요 1 | URL
저 역시 그랬어요. 사건의 가해자인 시인의 시집을 모두 과감하게 정리했어요. 좋아했던 시인, 작가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나니 이제는 여류 시인의 시집만 읽어야 하나, 생각까지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