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수영장 수박 수영장
안녕달 글.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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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쏟아지는 장맛비가 멈춰도 차오르는 습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더위 때문인지 입맛이 사라진다. 시원한 커피만 찾게 된다. 불쾌지수는 높아지고 숨겨졌던 화가 폭발할까 두려울 지경이다. 나 같은 증상으로 힘들다면 그림책을 추천한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기분에 날개가 달린 듯 나쁜 기분은 멀리 달아난다.



아이나 조카가 있다면 이미 만났을 것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꺼내는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바로 안녕달의 그림책 『수박 수영장』이다. 이런 그림책은 할 말이 없다. 그냥 보면 된다. 그냥 즐기면 된다. 그냥 시원한 수박 속으로 풍덩, 그러면 끝!여름이 시작된 시골 마을 모두가 기다리던 수박 수영장이 개장을 했다.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수박 수영장으로 모여든다. 너도 나도 신나게 수박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논다. 아, 이런 맛난 아이디어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수박을 먹다가 생각했을까. 걱정 근심 따위는 모두 잊고 놀기만 하면 된다. 유년 시절 고대하며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떠오른다. 시골 마을에서 변변한 놀 거리도 없었고 방학숙제만 가득했는데 방학은 왜 그렇게 기다렸을까.



맑고 투명한 수박 물에 첨벙거리며 놀 때 태양은 뜨거워지고 노는 아이들을 위한 구름 장수의 구름 우산과 먹구름 샤워가 등장한다. 솜사탕 같은 구름 우산과 먹구름 샤워(소나기)는 정말 예쁜 표현이다. 해가 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밖에서 놀았던 어린아이가 되어 그림책 속 아이들과 하나가 된다.



놀이는 언제나 아쉽다. 수박 수영장이 문을 닫는 게 아쉽다. 하지만 내년에도 수박 수영장이 문을 열릴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름 대표 과일 수박의 맛은 여름이 제일 맛나듯 시원하고 달콤한 그림책 수박 수영장은 요즘이 제 철이다. 입에 수박 한 조각 베어 물고 마음으로 수박 수영장에서 즐겁게 수영하는 시간, 여름이 좋은 이유가 아닐까. 아이들과 물놀이를 가거나 휴가를 떠날 때 이 책을 챙겨간다면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멋진 어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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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7-0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아요~ 진짜 이런 수영장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목련 2022-07-04 16:40   좋아요 1 | URL
네, 정말 예쁜 그림책이에요. 이 여름에 더위를 식혀주는 멋진 수박수영장을 상상해요!
 
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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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오래 하면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간보다는 정성과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전문가란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스스로 경지에 도달했다고 느낀다면 성공적이다. 각각의 분야에는 전문가가 있지만 각자의 삶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건 만족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네 인생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빨리 답을 알려주지 않으니까. 살면 살수록 삶을 비루하고 치사한 것들을 쌓아올린 허무한 성 같으니까.


김훈의 단편집 『저만치 혼자서』 속 인물들도 다르지 않았다. 단단해지기는커녕 허약하고 약한 존재라는 걸 확인할 뿐이다. 삶이란 소중한 누군가와 동행하는 게 아니라 결국엔 혼자라는 걸 말이다. 부조리함으로 둘러싼 사회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명태와 고래」 속 이춘개가 그러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물질로 살던 그가 조업 중에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명태를 잡으러 간 게 전부였다. 북에서 6개월 만에 돌아온 그는 여러 정보기관에서 조사와 심문을 받았다. 그게 끝이이어야 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명태를 잡으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춘개의 삶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6년 후 간첩죄로 수감되었다. 엉뚱하게 흐르는 삶을 이춘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휴전 상태로 남과 북이 대치한 땅에서 산다는 걸 때때로 잊는다. 나는 경험하지 않았기에, 겹겹이 쌓인 공포와 고통을 알지 못한다. 「명태와 고래」 와 결은 다르지만 전사자의 유해를 찾는 「48GOP」 를 통해 국가의 폭력과 전쟁의 비극을 느낀다. 그저 개인의 삶이라 치부할 수 없는 아픔이 전해진다. 김훈은 슬픔을 구체화하거나 절망을 극대화하지 않는다. 김훈의 인물은 조심스러울 정도로 감정을 절제한다. 그것으로 인해 삶의 참담함을 전할 뿐이다. 어떤 감정은 가만히 바라볼 때 확연하게 드러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안달복달한다고 원하는 쪽으로 나가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에도 과감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건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단했던 지난 생에 대한 연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굳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아도 서로를 알 것 같은 노년의 두 남자의 일상을 그린 「저녁 내기 장기」 와 퇴직을 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며 대장 내시경 검사를 미루는 남자의 이야기 「대장 내시경 검사」는 헛헛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치열하게 살았던 젊은 시절의 숱한 감정들이 모두 타버려서 재만 남은 게 괜히 서럽게 다가온다.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그 시간이 곧 도래할 것만 같다.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세월은 다시 세월을 풍화시킨다. (「대장 내시경 검사」 중에서)


간직할 만한 추억 하나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삶이란 추억보다는 상실이나 아픔으로 채워진다. 노량진 고시원에서 함께 공무원 공부를 하며 짧은 기간 동거했던 영자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는 「영자」 가 애틋한 이유다.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조금 서로의 영역에 침범했어도 괜찮았을 젊음인데 마음 한 자락 들어갈 여유가 없다.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게 젊음이라서 그럴까. 고만고만한 삶을 위로하며 격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돌이켜지지 않는 것들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저절로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었다. (「영자」 중에서)


결국엔 죽음으로 연결되는 삶이라는 걸 아는 게 인생일까. 사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죽는다는 건 어찌 알 수 있을까.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삶의 이치일까. 평생 신을 따르고 봉사하며 살았던 수녀들이 죽음을 앞두고 생활하는 ‘도라지수녀원’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는 젊은 신부의 이야기 「저만치 혼자서」 와 끔찍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재수생 연옥을 구조한 대원이 여자가 살려고 무얼 자꾸 잡으려 했다는 과정을 들려주는 「손」 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는 뭔가를 꽉 부여잡고 산다. 단 한 번 주어진 죽음은 혼자 감당할 몫이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갈무리는 『저만치 혼자서』 속 인물처럼 저만치 혼자서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후회와 아쉬움이 아니라 한 톨의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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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랏다 2022-07-1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우연히 들어와 읽는데 책리뷰들이 술술 읽히고 공감가고 재밌어요~~ 자주 올께요!!^^

자목련 2022-07-18 15:02   좋아요 0 | URL
살어리랏다 님, 반갑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시원한 오후 이어가세요^^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 신진 작가 9인의 SF 단편 앤솔러지 네오픽션 ON시리즈 1
신조하 외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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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누리호 2차 발사가 성공했다. 방송을 통해 높이 날아올라 저 멀리 우주 속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감동적이고 뿌듯했다. 이제 정말 우주의 시대가 펼쳐지는 것일까? 일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SF의 세계, 문학계에서도 SF는 더 넓고 다양해졌다. 네오픽션에서 출간한 신진 작가 9명의 SF 단편 앤솔러지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더 이상 상상이 아닌 미래의 어느 날을 보여준다. 우리를 도와주는 단순한 기능의 인공지능 AI가 아니라 일상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조금 무섭기도 하고 조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표제작 이세형의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제목 그대로 감정을 파는 이야기다. 미래의 어느 날 우리는 정말 감정을 팔게 되는 건 아닐까. 소설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여자와 색소폰 연주가인 남자는 역할 대행 아르바이트를 통해 만난다. 연인에게 이별을 전하는 역할로 둘 다 대신 나온 것이다. 그렇게 만난 둘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들은 어느 날 AI를 통해 감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의 연락을 받는다. 그동안 그들이 대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제 세상은 모든 분야에 AI가 장악한다. 심지어 상대와 화해를 할 경우에도 심리상태를 분석한 AI가 문자를 보낸다. 감정을 소모할 일이 없으니 불편한 일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데이터의 시작이 된 두 남녀는 경제적으로는 부족할 게 없었지만 결국 헤어졌고 남자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본다. 누군가에게 색소폰을 연주하며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일, 그때마다 남자는 다양한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자는 돈을 주고 감정을 체험한다.


감정적 체험이 시장을 통해 돈으로 거래되는 시대가 정말 올지도 모른다. 물질적 풍요로 인해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를 알지 못하는 시대,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려면 그 경험을 구매한 사람만이 가능한 시대. 소설 속 상상이라 할지라도 너무 두렵다. 인간 자체가 AI가 되는 시대라고 해야 할 테니까. 인간 고유의 감정, 인간 고유의 존엄을 잃어버린 미래를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클레이븐의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도덕을 구매하는 세상이라니, 정녕 도덕이라는 게 구매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주인공 정수는 택배 일을 하는데 도덕 베타 버전 4.0을 구매하지 못해 그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도덕은 신규 버전은 빠르게 출시되는 데 그걸 구매할 여력이 없다. 생계를 위해 누군가는 다른 이의 도덕을 훔치고 죄를 지는 이들은 화형에 처한다. 도덕을 규정하는 자, 누구인가. 정부 권력이겠지만 그런 잔혹한 미래는 상상으로도 별로다.


강윤정의 「대통령의 자장가」는 대통령 지수의 아이가 납치되면서 시작한다. 여기서 아이란 대통령의 인공자궁 속 아이를 말한다. 여성의 자궁이 아닌 남성의 자궁에서도 아이가 자랄 수 있는 시대란 설정이 흥미롭다. 그것도 어려운 이들에게는 인공자궁을 선택할 수 있다. 대통령이 인공자궁을, 그것도 특정한 브랜드를 선택했다는 게 정치적인 공격을 받는다. 소설은 대통령의 인공자궁을 무사히 구해해는 과정과 더불어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으로 추리소설의 재미를 안겨준다. 인간의 몸이 아닌 곳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는 일, 어쩌면 곧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성탄의 「정신의 작용」은 인간의 정신을 업로드해 사후에도 남긴다는 놀라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다. 이른바 영생 프로젝트. 죽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기를 바라는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할까. 그러나 연구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업로드한 뇌, 그러니까 디지털 자아가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휴머노이드와 가상세계의 AI가 가득한 세상에 누군가는 AI 우울증을 앓고 이도 있다. 영생 프로젝트의 연구자인 수연도 그렇다. 자신의 상황을 들려주는 수연에게 팀장 연경이 묻는 말은 현재의 우리네 모습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진짜 소통의 총량이 있는데, AI와 대화하면 그동안 쌓아둔 걸 오히려 갉아먹게 된다는 건가요?” (「정신의 작용」, 259쪽)


우리는 과연 진짜 소통을 하고 있는 걸까. 스마트폰을 통해 대면이 아닌 비대면으로 다양한 것들을 해결하는 시대에 적응하느라 진정한 소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모두 그쪽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끝내 감정까지 구매하고 소설처럼 도덕이나 규범, 문화까지 정부가 규제하는 사회가 온다면 그건 인간의 사회일까.


무뇌증이지만 인간의 뇌를 이식받아 변호사가 된 등장하는 신조하의 「인간의 대리인」처럼 언젠가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대결하게 된다면 그 들 중 누구를 선택할까. 가격적 경쟁력을 따진다면 인간 변호사와 인공지능 변호사 중 누가 더 높은 수임료를 받게 될까. 질문이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간을 돕는 존재로 등장한 휴머노이드를 소재로 한 지금까지의 소설은 인간과의 우정이나 인간에 대해 알아가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게 끝일까.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조종할 것이고 그들에게 선이 아닌 악을 택하게 할 수도 있다.


죄인을 돕는 건 죄가 없는 성자만이 가능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건 사람이 아닌 신의 아들이었듯이 인간을 변호할 수 있는 건 인간이 아닌 자일 것이다. 그래서 기계들의 은밀한 물음에 대해 나의 대답은 늘 같다. 나는 항상 인간의 변호사다. (「인간의 대리인」, 39쪽)


언제나 그렇듯 SF 소설은 놀라운 상상력과 다양한 세계로 이끈다.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작가의 이력이 다양한 만큼 소재 역시 그렇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소설이 현실로 실현되는 시대가 다가오니 가벼운 재미에서 멈출 수 없다.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서로를 인정하고 연대하는 그런 미래를 그리는 소설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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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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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여도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꾸준히 진화한다. 그들에게 퇴보란 없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고수하고 지키려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대체적으로 무능력한 남자들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시작하고 말았다. 러시아 작가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단편집 『티끌 같은 나』에서 만난 게 그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표제작 「티끌 같은 나」를 포함 5편의 단편에서 내가 집중한 건 그런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 반짝이고 눈부신 티끌 같은 이들이다.


반짝이고 눈부시면 뭐 하냐고, 티끌인데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티끌이 아니던가. 이 광대한 우주에서 반짝이는 티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아무튼 이 소설집, 너무 재밌다. 여성 작가의 소설이라 그런가, 적재적소에서 시원하고 통쾌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곧 소설 속 여성에게 빠져들고 만다. 표제작 「티끌 같은 나」의 주인공 ‘안젤라’는 한적한 시골 카자흐인 마을 마르트노프카에서 태어났다. 게으름의 표본인 아버지와 한때 교사였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현재는 소를 모는 어머니가 있다. 도시와는 동떨어진 삶, 그 안에서 안젤라는 자신의 꿈을 꾼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안젤라는 가수가 되기 위해 무작정, 말 그대로 무작정 모스크바로 온다.


모스크바에서 안젤라가 마주한 현실은 막막함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안젤라는 절대 굴하지 않고 가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선다. 그러던 중 운명 같은 ‘키라 세르게예브나’를 만난다. 그녀는 영화 판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많은 인맥을 지녔다. 키라 세르게예브나 집에서 살림을 도와주며 안젤라는 기회를 엿본다. 그 기회에 필수조건은 돈이었고 안젤라는 돈을 모으기 위해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안젤라는 70~80년대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수많은 우리의 안젤라를 떠올린다. 대부분의 그들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K- 장녀지만 안젤라는 오로지 가수가 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으니까.


젊고 예쁜 안젤라는 가사도우미를 하던 집의 주인 남자 ‘니콜라이’의 구애를 허락한다. 이게 중요하다. 안젤라가 유혹한 게 아니라 니콜라이의 적극적 구애. 언뜻 이제 안젤라는 모든 걸 다 가졌으니 그깟 꿈은 버리고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선택할 거려 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안젤라는 특별하다. 돈과 명예로 자신을 구속하려는 니콜라이와 살면서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아이가 생겼을 때 니콜라이는 안젤라가 당연히 아이를 선택할 거라 자신하지만 아니다. 이 소설집에서 단연 빛나는 문장은 바로 이 두 문장이다. 아, 나는 안젤라를 추앙할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먼저 나 스스로 다시 태어나야 해요.” (「티끌 같은 나」, 104쪽)

“나라는 나라이고 나는 나예요. 나는 내 집에서 기뻐하든 슬퍼하든 하고 싶어요.” (「티끌 같은 나」, 105쪽)


안젤라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나아간다. 그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가시밭길로 시련의 길이다. 때로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때로 좌절하지만 안젤라는 굴하지 않는다. 결코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운명에 발목 잡히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남들이 뭐라든 내 뜻대로 나의 꿈을 향해 살아가는 안젤라야 말로 눈부신 티끌이다.


「티끌 같은 나」의 안젤라와 다르게 「이유」의 주인공 ‘마리나’는 결혼한 여성이다. 그러나 곧 혼자가 된다. 남편이 아내인 마리나와 자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서로가 사랑해서 가정을 이뤘지만 삶이 행복하지가 않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양육에 버거운 마리나는 남편의 욕구를 거절하자 남편은 다른 여성에게로 떠났다. 아들과 딸을 키워야 하는 마리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녀에게 다시 ‘루스탐’이란 사랑이 찾아오지만 온전하게 자신의 몫이 아니다. 자신의 전부였단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들과 딸은 마리나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않았고 각자 결혼을 해서도 마리나의 짐이 될 뿐이다.


여성으로 어머니로의 삶을 보면 마리아의 생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 하지만 삶이란 쉽게 포기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티끌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면 삶은 다시 빛을 발한다. 마리나에게는 루스탐과 운명처럼 만난 ‘안나’가 있다. 마리아가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할 때 만난 안나, 둘은 서로를 돕는다. 생에 있어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마리나와 루스탐의 관계는 사랑 그 이상의 우정으로 지속된다.


루스탐은 마리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서 과거에 있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다름 아닌 젊음의 눈부심이었다. 대신 희미하나마 슬라브인 특유의 선이나 파란 눈은 여전했다. 루스탐은 서서히 그녀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삶은 그들을 찌그러뜨리는가 하면 포옹도 하고 버스에서 만난 집시들처럼 소중한 것들을 훔쳐 달아났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고 아픈 데도 없으며 몸 안에는 마트료시카처럼 옛 모습이 숨겨져 있었다. ( 「이유」, 317쪽)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삶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작가인 것 같다. 삶이라는 게 단순히 기쁘거나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다. 아,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다 아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소설 속 안젤라나, 마리나뿐만 아니라 다른 단편 속 인물들을 통해 그녀가 전하는 건 삶을 향해 달려드는 것들에 대해 절대로 지지 말라는 말 같다. 때로는 욕망이자 좌절, 때로는 운명 같은 사랑, 때로는 고독과 절망이다.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삶이다. 그래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티끌 같은 나여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꺼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런 삶에 둘러싸였음을 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나대로 살 거야라고 소리치는 안젤라처럼 당돌하면서도 당당하고 유쾌하게 삶을 살고 싶다. 뻔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우리네 생을 보여주는 『티끌 같은 나』는 괜찮은 소설집이다. 그러니 티끌 같은 존재여, 우리 힘들더라도 앞으로 뭐가 펼쳐질지 모르는 인생을 기대해 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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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6-24 1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짜 이 책 너무 좋죠 ㅋㅋㅋ (저 이걸로 유튜브도 만들었어요 ㅋㅋㅋ 속닥속닥 ㅋㅋㅋ) 우리는 명랑한 티끌 ^^ 티끌 처럼 살아가요~!

잠자냥 2022-06-24 15:18   좋아요 3 | URL
아 이 사람 여기서 자기 유튜브 광고하고 있네... 점점 다부장 닮아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2-06-27 17:49   좋아요 1 | URL
명랑 발랄한 티끌이 되어 이 습한 날들을 헤쳐나가고 싶습니다 ㅎ

mini74 2022-06-24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젤라 저도 추앙합니다 자목련님 ㅎㅎㅎ

자목련 2022-06-27 17:48   좋아요 1 | URL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만나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한 안젤라입니다^^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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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존재는 여전히 나다. 내면의 나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깊은 불안과 절망 같은 게 쌓였을지도 모른다. 그걸 눈치채는 이는 없다. 오직 나만 알 수 있는 변화다. 그런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온전히 나와 같은 나, 쌍둥이라 할 수 있는 나, 도플갱어가 아니라 진짜 나라면. 우주 속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는 나를 믿을 수 있을까. 분신이 있으면 좋겠다 농담처럼 말하는 일이 진짜 일어났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20 공쿠르상 수상작인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 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어딘가 다른 내가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이끄는 소설이다. 2021년 3월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난다. 탑승객들은 다양하다. 탑승 승객들은 그 순간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 경험이 누군가는 삶의 소중함으로 누군가의 허무로 남지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한다. 3개월 뒤 신기한 일이 발생한다. 2021년 6월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또 난기류를 만난다. 놀라운 건 3개월 전 탑승했던 승객 전부를 태운 비행기라는 사실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비행기를 공군기지에 착륙시킨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이 사건을 해결할 이들을 모아 대책을 강구한다. 과학자와 종교인이 우선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 가설 중에 하나의 실체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를 조종하는 누군가의 분신이거나 복사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처럼 말이다. 종교적인 관점은 더욱 치열하다. 신이 만든 유일한 피조물과 악마라는 격정적 토론.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하며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3월의 승객과 6월의 승객을 만나게 하는 일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는 사람은 없을 터. 직접 대면해야만 가능할 것이니까.


3월 비행기의 승객은 다양하다. 동일한 승무원과 암에 걸린 기장,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하는 청부 살인업자,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는 작가, 유명 건축가와 그가 사랑하는 연인, 동성애자란 사실을 숨기고 활동하는 뮤지션, 뛰어난 능력의 변호사, 베티란 이름의 개구리를 키우는 소녀까지 FBI 요원의 인도에 따라 모인다. 지난 3월의 비행기에 탄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6월 현재의 일상과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상담한다. 3월의 승객 중 작가는 없다. 그는 소설 「아노말리」 를 남기고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장은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좀 더 치열하게 살았다면 세상을 어느 해안으로 데려갔을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사라진들 세상의 흐름이 뭐가 바뀔까. 이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자갈들의 길을, 아무 데로도 데려가 주지 않는 길을 걷는다. 나는 삶고 죽음이 구분되지 않고 산 자의 가면이 죽은 자의 얼굴에서 안식을 찾는 하나의 점이 되어 간다. 오늘 아침, 청명한 날씨 속에서 나는 나를 본다. 나는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다.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헛되이, 마침내 나는 순간을 미루지 않을 마지막 문장을 쓴다. (38~39쪽)


그러니까 이 소설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3월의 존재와 6월의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며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진진하며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나와 나의 존재로만 끝난다면 그나마 괜찮다. 연인과 가족이 있는 경우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혼란스럽다. 한 명의 연인과 두 명의 나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노년의 건축가는 다른 건축가에게 젊은 연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동성애자 뮤지션은 어린 시절 슬픔을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를 쌍둥이로 만들어 활동한다. 암에 걸린 기장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두 번 경험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는 방송에 출현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토론한다.


현재 전 지구가 우리의 환상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진리에 직면했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표지가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생각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걸요. 아이러니한 것은, 가상의 존재라는 사실이 우리 이웃, 우리 지구에 대한 의무를 더욱 강화한다는 겁니다. 특히 집단으로서의 의무를요. (…) 시뮬레이션은 인류라는 종 전체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궁극의 구원자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해야 해요. (439~440쪽)


그 과정에서 어떤 진실은 왜곡되고 어떤 비밀은 추가되고 어떤 비밀은 밝혀진다. 소설에서 놀라운 건 아이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거리낌 없이 똑같은 나를 반기고 똑같은 어른이지만 다른 점을 찾아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이들의 고유한 유연성, 우리가 놓치는 건 이런 것일까.


소설은 묻는다.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나고. 이쪽의 내가 ‘분신’이라고 여겨야 할까, 저쪽의 내가 ‘분신’이라고 여길까.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살기를 선택하는 게 가장 현명할까. 비단 소설 속 이야기라 치부할 수 없기에 놀랍고 감탄한다. 끊임없는 아노말리(이상, 변칙, 모순)의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완벽에 가까운 성형수술을 떠나 유전자 복제가 가능하고 우주의 탐험이 가까워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나는 누구인가. 자아를 찾아가는 끝없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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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6-23 0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내용 속에서도 동명의 책 <아노말리>가 등장하는 거군요.
이 책 소개를 처음 들었을 때, 소재가 괜찮을 것 같았어요.
잘읽었습니다. 자목련님, 요즘 날씨가 덥고 습도가 높은 시기예요.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06-24 11:02   좋아요 3 | URL
네, 소설 속 작가의 유작 제목이 <아노말리>입니다.
흥미진진한 소설이었어요. 서니데이 님도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mini74 2022-07-08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7-11 17: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시원한 날들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2-07-08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7-11 17:59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산뜻한 여름 보내세요^^

새파랑 2022-07-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평범하지 않은 자목련님 당선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7-11 18:00   좋아요 1 | URL
새파팡 님, 감사합니다. 저도 축하드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