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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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존재는 여전히 나다. 내면의 나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깊은 불안과 절망 같은 게 쌓였을지도 모른다. 그걸 눈치채는 이는 없다. 오직 나만 알 수 있는 변화다. 그런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온전히 나와 같은 나, 쌍둥이라 할 수 있는 나, 도플갱어가 아니라 진짜 나라면. 우주 속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는 나를 믿을 수 있을까. 분신이 있으면 좋겠다 농담처럼 말하는 일이 진짜 일어났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20 공쿠르상 수상작인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 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어딘가 다른 내가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이끄는 소설이다. 2021년 3월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난다. 탑승객들은 다양하다. 탑승 승객들은 그 순간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 경험이 누군가는 삶의 소중함으로 누군가의 허무로 남지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한다. 3개월 뒤 신기한 일이 발생한다. 2021년 6월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또 난기류를 만난다. 놀라운 건 3개월 전 탑승했던 승객 전부를 태운 비행기라는 사실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비행기를 공군기지에 착륙시킨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이 사건을 해결할 이들을 모아 대책을 강구한다. 과학자와 종교인이 우선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 가설 중에 하나의 실체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를 조종하는 누군가의 분신이거나 복사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처럼 말이다. 종교적인 관점은 더욱 치열하다. 신이 만든 유일한 피조물과 악마라는 격정적 토론.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하며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3월의 승객과 6월의 승객을 만나게 하는 일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는 사람은 없을 터. 직접 대면해야만 가능할 것이니까.


3월 비행기의 승객은 다양하다. 동일한 승무원과 암에 걸린 기장,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하는 청부 살인업자,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는 작가, 유명 건축가와 그가 사랑하는 연인, 동성애자란 사실을 숨기고 활동하는 뮤지션, 뛰어난 능력의 변호사, 베티란 이름의 개구리를 키우는 소녀까지 FBI 요원의 인도에 따라 모인다. 지난 3월의 비행기에 탄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6월 현재의 일상과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상담한다. 3월의 승객 중 작가는 없다. 그는 소설 「아노말리」 를 남기고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장은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좀 더 치열하게 살았다면 세상을 어느 해안으로 데려갔을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사라진들 세상의 흐름이 뭐가 바뀔까. 이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자갈들의 길을, 아무 데로도 데려가 주지 않는 길을 걷는다. 나는 삶고 죽음이 구분되지 않고 산 자의 가면이 죽은 자의 얼굴에서 안식을 찾는 하나의 점이 되어 간다. 오늘 아침, 청명한 날씨 속에서 나는 나를 본다. 나는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다.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헛되이, 마침내 나는 순간을 미루지 않을 마지막 문장을 쓴다. (38~39쪽)


그러니까 이 소설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3월의 존재와 6월의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며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진진하며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나와 나의 존재로만 끝난다면 그나마 괜찮다. 연인과 가족이 있는 경우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혼란스럽다. 한 명의 연인과 두 명의 나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노년의 건축가는 다른 건축가에게 젊은 연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동성애자 뮤지션은 어린 시절 슬픔을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를 쌍둥이로 만들어 활동한다. 암에 걸린 기장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두 번 경험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는 방송에 출현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토론한다.


현재 전 지구가 우리의 환상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진리에 직면했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표지가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생각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걸요. 아이러니한 것은, 가상의 존재라는 사실이 우리 이웃, 우리 지구에 대한 의무를 더욱 강화한다는 겁니다. 특히 집단으로서의 의무를요. (…) 시뮬레이션은 인류라는 종 전체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궁극의 구원자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해야 해요. (439~440쪽)


그 과정에서 어떤 진실은 왜곡되고 어떤 비밀은 추가되고 어떤 비밀은 밝혀진다. 소설에서 놀라운 건 아이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거리낌 없이 똑같은 나를 반기고 똑같은 어른이지만 다른 점을 찾아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이들의 고유한 유연성, 우리가 놓치는 건 이런 것일까.


소설은 묻는다.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나고. 이쪽의 내가 ‘분신’이라고 여겨야 할까, 저쪽의 내가 ‘분신’이라고 여길까.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살기를 선택하는 게 가장 현명할까. 비단 소설 속 이야기라 치부할 수 없기에 놀랍고 감탄한다. 끊임없는 아노말리(이상, 변칙, 모순)의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완벽에 가까운 성형수술을 떠나 유전자 복제가 가능하고 우주의 탐험이 가까워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나는 누구인가. 자아를 찾아가는 끝없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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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6-23 0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내용 속에서도 동명의 책 <아노말리>가 등장하는 거군요.
이 책 소개를 처음 들었을 때, 소재가 괜찮을 것 같았어요.
잘읽었습니다. 자목련님, 요즘 날씨가 덥고 습도가 높은 시기예요.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06-24 11:02   좋아요 3 | URL
네, 소설 속 작가의 유작 제목이 <아노말리>입니다.
흥미진진한 소설이었어요. 서니데이 님도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mini74 2022-07-08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7-11 17: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시원한 날들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2-07-08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7-11 17:59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산뜻한 여름 보내세요^^

새파랑 2022-07-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평범하지 않은 자목련님 당선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7-11 18:00   좋아요 1 | URL
새파팡 님, 감사합니다. 저도 축하드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