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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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여도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꾸준히 진화한다. 그들에게 퇴보란 없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고수하고 지키려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대체적으로 무능력한 남자들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시작하고 말았다. 러시아 작가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단편집 『티끌 같은 나』에서 만난 게 그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표제작 「티끌 같은 나」를 포함 5편의 단편에서 내가 집중한 건 그런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 반짝이고 눈부신 티끌 같은 이들이다.


반짝이고 눈부시면 뭐 하냐고, 티끌인데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티끌이 아니던가. 이 광대한 우주에서 반짝이는 티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아무튼 이 소설집, 너무 재밌다. 여성 작가의 소설이라 그런가, 적재적소에서 시원하고 통쾌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곧 소설 속 여성에게 빠져들고 만다. 표제작 「티끌 같은 나」의 주인공 ‘안젤라’는 한적한 시골 카자흐인 마을 마르트노프카에서 태어났다. 게으름의 표본인 아버지와 한때 교사였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현재는 소를 모는 어머니가 있다. 도시와는 동떨어진 삶, 그 안에서 안젤라는 자신의 꿈을 꾼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안젤라는 가수가 되기 위해 무작정, 말 그대로 무작정 모스크바로 온다.


모스크바에서 안젤라가 마주한 현실은 막막함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안젤라는 절대 굴하지 않고 가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선다. 그러던 중 운명 같은 ‘키라 세르게예브나’를 만난다. 그녀는 영화 판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많은 인맥을 지녔다. 키라 세르게예브나 집에서 살림을 도와주며 안젤라는 기회를 엿본다. 그 기회에 필수조건은 돈이었고 안젤라는 돈을 모으기 위해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안젤라는 70~80년대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수많은 우리의 안젤라를 떠올린다. 대부분의 그들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K- 장녀지만 안젤라는 오로지 가수가 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으니까.


젊고 예쁜 안젤라는 가사도우미를 하던 집의 주인 남자 ‘니콜라이’의 구애를 허락한다. 이게 중요하다. 안젤라가 유혹한 게 아니라 니콜라이의 적극적 구애. 언뜻 이제 안젤라는 모든 걸 다 가졌으니 그깟 꿈은 버리고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선택할 거려 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안젤라는 특별하다. 돈과 명예로 자신을 구속하려는 니콜라이와 살면서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아이가 생겼을 때 니콜라이는 안젤라가 당연히 아이를 선택할 거라 자신하지만 아니다. 이 소설집에서 단연 빛나는 문장은 바로 이 두 문장이다. 아, 나는 안젤라를 추앙할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먼저 나 스스로 다시 태어나야 해요.” (「티끌 같은 나」, 104쪽)

“나라는 나라이고 나는 나예요. 나는 내 집에서 기뻐하든 슬퍼하든 하고 싶어요.” (「티끌 같은 나」, 105쪽)


안젤라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나아간다. 그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가시밭길로 시련의 길이다. 때로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때로 좌절하지만 안젤라는 굴하지 않는다. 결코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운명에 발목 잡히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남들이 뭐라든 내 뜻대로 나의 꿈을 향해 살아가는 안젤라야 말로 눈부신 티끌이다.


「티끌 같은 나」의 안젤라와 다르게 「이유」의 주인공 ‘마리나’는 결혼한 여성이다. 그러나 곧 혼자가 된다. 남편이 아내인 마리나와 자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서로가 사랑해서 가정을 이뤘지만 삶이 행복하지가 않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양육에 버거운 마리나는 남편의 욕구를 거절하자 남편은 다른 여성에게로 떠났다. 아들과 딸을 키워야 하는 마리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녀에게 다시 ‘루스탐’이란 사랑이 찾아오지만 온전하게 자신의 몫이 아니다. 자신의 전부였단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들과 딸은 마리나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않았고 각자 결혼을 해서도 마리나의 짐이 될 뿐이다.


여성으로 어머니로의 삶을 보면 마리아의 생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 하지만 삶이란 쉽게 포기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티끌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면 삶은 다시 빛을 발한다. 마리나에게는 루스탐과 운명처럼 만난 ‘안나’가 있다. 마리아가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할 때 만난 안나, 둘은 서로를 돕는다. 생에 있어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마리나와 루스탐의 관계는 사랑 그 이상의 우정으로 지속된다.


루스탐은 마리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서 과거에 있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다름 아닌 젊음의 눈부심이었다. 대신 희미하나마 슬라브인 특유의 선이나 파란 눈은 여전했다. 루스탐은 서서히 그녀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삶은 그들을 찌그러뜨리는가 하면 포옹도 하고 버스에서 만난 집시들처럼 소중한 것들을 훔쳐 달아났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고 아픈 데도 없으며 몸 안에는 마트료시카처럼 옛 모습이 숨겨져 있었다. ( 「이유」, 317쪽)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삶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작가인 것 같다. 삶이라는 게 단순히 기쁘거나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다. 아,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다 아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소설 속 안젤라나, 마리나뿐만 아니라 다른 단편 속 인물들을 통해 그녀가 전하는 건 삶을 향해 달려드는 것들에 대해 절대로 지지 말라는 말 같다. 때로는 욕망이자 좌절, 때로는 운명 같은 사랑, 때로는 고독과 절망이다.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삶이다. 그래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티끌 같은 나여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꺼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런 삶에 둘러싸였음을 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나대로 살 거야라고 소리치는 안젤라처럼 당돌하면서도 당당하고 유쾌하게 삶을 살고 싶다. 뻔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우리네 생을 보여주는 『티끌 같은 나』는 괜찮은 소설집이다. 그러니 티끌 같은 존재여, 우리 힘들더라도 앞으로 뭐가 펼쳐질지 모르는 인생을 기대해 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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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6-24 1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짜 이 책 너무 좋죠 ㅋㅋㅋ (저 이걸로 유튜브도 만들었어요 ㅋㅋㅋ 속닥속닥 ㅋㅋㅋ) 우리는 명랑한 티끌 ^^ 티끌 처럼 살아가요~!

잠자냥 2022-06-24 15:18   좋아요 3 | URL
아 이 사람 여기서 자기 유튜브 광고하고 있네... 점점 다부장 닮아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2-06-27 17:49   좋아요 1 | URL
명랑 발랄한 티끌이 되어 이 습한 날들을 헤쳐나가고 싶습니다 ㅎ

mini74 2022-06-24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젤라 저도 추앙합니다 자목련님 ㅎㅎㅎ

자목련 2022-06-27 17:48   좋아요 1 | URL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만나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한 안젤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