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열정이 다하고 쏜살 문고
비타 색빌웨스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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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들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할 때, 자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때, 생과 사의 순간을 경험할 때가 그렇다. 그러나 곧 잊고 만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며 주어진 일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울며 살아간다.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다 또 드는 생각, 사는 게 별거 아닌데 왜 나는 이렇게 사는가?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휩쓸리듯 사는 게 맞나 싶은 거다. 버지니아 울프와 20세기 영국 문단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는 비타 색빌웨스트(근데 나는 왜 처음 듣는 작가인가)의 『모든 열정이 다하고』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남은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소설을 읽는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소설 속 레이디 슬레인은 노년이지 않냐고, 아흔을 바라보는 사람이 그래선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자식들의 편에 설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냐고?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남편이 죽고 아들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 다른 지역에서 혼자 지내는 할머니 이야기다. 영국 총리까지 지낸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고 레이디 슬레인은 여섯 명의 자식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싱글은 케이와 이디스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어머니의 부양과 유산을 셈하며 서로 충돌하다.


레이디 슬레인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30년 전에 본 집과 중개인 이름까지 기억한다며 그 집으로 향한다. 원하던 집을 계약하고 하녀 제누와 단둘이 살기로 한다. 자식들의 방문도 최대한 금지했다. 거대한 저택과 자식들의 돌봄도 거부하는 할머니라니. 이상한 할머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주변을 의식하고 살아가니까. 총리의 아내였던 레이디 슬레인이라면 그 가족들에겐 얼마나 많은 시선이 따라오겠는가.


이제 레이디 슬레인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헌신적인 아내로 여섯 자녀의 어머니와 할머니, 증손자까지 둔 그녀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남편인 헨리 홀랜드는 좋은 사람이었다. 부모님도 그와 결혼을 원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인도, 중국 등 여러 곳을 다니며 만찬과 파티를 열고 사람들을 만났다. 남편이 사랑의 증표로 끼워주는 반지를 주렁주렁 달고서. 하지만 이제 아니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과 같이 사는 일도 총리의 부인으로 사는 일도 원하지 않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말이 통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살고 싶었다.


집은 자기만의 생을 지니고 있다. 마치 어디선가 불어온 화합의 숨결이 네모난 벽돌 상자 안으로 흘러들어, 감옥 같은 벽을 무너뜨리고 온 세상에 그 내부를 내보일 때까지 머무는 듯했다. 집이란 아주 사적인 것이었다. (66쪽)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숨겨진 탐욕은 진절머리가 났다. 그들을 떠나 런던이 아닌 나만의 집에서 레이디 슬레인이 아닌 ‘데버라’로 살기로 한다. 집주인 ‘벅트라우트’ 씨와 수리를 맡아준 ‘고셔론’ 씨의 방문 만으로 충분했다. 그들과 나누는 작은 대화, 농담은 편안했다. 언제나 자신과 모든 걸 같이하고 걱정하는 든든한 ‘제누’도 함께. 가만히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는 시간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인생은 호수야. 레이디 슬레인은 복숭아 향기가 풍기는 따뜻한 남쪽 벽 아래 앉아서 생각했다. 그 잔잔한 표면 위로 풍기는 따뜻한 벽 아래 앉아서 생각했다. 그 잔잔한 표면 위로 수많은 형체를 반사해 내는 호수, 태양이 금빛으로, 달이 은빛으로 물들이는 호수, 가끔 구름이 어둠을 드리우고 파동이 물결을 이루지만 결국에는 잔잔함을 되찾는 호수. 넘치지 않는 수면. 호수, 즉 인생은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지 않으며 단단하게 압축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질문하면서 삶을 압축해 버린다. (126쪽)


새로운 인물 ‘피츠’의 등장도 나쁘지 않았다. 아들 케이의 나이 많은 친구였던 그는 혼자 사는 수집가 노인으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레이디 슬레인은 처음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인도에서 만찬에서 본 사람이라는걸, 그때 둘 사이에 떨림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떠올렸다. 피츠는 레이디 슬레인이 아닌 ‘데버라’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이었다. 내면의 목소리,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 말이다. 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던 건 아니다. 은밀한 만남이나 연락조차 없었다. 헨리의 아내로 아이들의 어머니로 레이디 슬레인으로 살았던 시절은 끝났으니 노신사의 방문과 담소는 즐거웠다. 그 사실을 모르는 케이만이 피츠와의 약속이 줄어드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케이가 목도 피츠의 죽음. 놀라운 건 수많은 소장품을 박물관이 아닌 레이디 슬레인에게 남겼다는 것이다.


남편 헨리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시선과 자식들은 레이디 슬레인을 주목한다. 그 많은 유산을 어떻게 할지 말이다. 하녀 제누도 내심 기대한다. 그 돈이면 마님을 더 잘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이디 슬레인은 예술품을 국가에 기증했고 돈은 병원에 기부했다. 아,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멋진 결정. 피츠 역시 그랬을 거라 레이디 슬레인은 믿었다. 자식과 손주의 방문은 막았지만 증손녀의 소식은 기껍게 받아들였다. 파혼을 하고 자신을 찾아와 음악가가 될 거라는 증손녀와의 대화는 영혼이 통하는 것 같다고 할까. 증손녀도 같은 걸 느꼈다. 증손녀가 떠나고 맞이한 죽음.


100년 전 소설 속 모습이 현재 우리와 다르지 않아 새삼 놀란다. 그러니 『모든 열정이 다하고』는 단순히 노년의 이야기로 말할 수 없다. 인생이란 무엇이며 살아오면서 자신만의 방을 가졌는가 묻는다. 타인과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산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설령 너무 늦게 인식하더라도 그 순간을 느끼며 사는 게 인생이라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 독립적이야 할 관계를 생각한다. 성장한 자식의 독립을 인정하듯 부모의 그것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 속 레이디 슬레인의 말처럼 인생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인생은 “참 피곤하고, 단편적이고, 고루하고, 허무하지.” (200쪽)라는 걸 깨달으며 그 여정이 끝난다면 다행이다. 피곤하고, 고루하고, 재미없고 허무하지만 각자 인생의 주어진 몫만큼 열정을 다해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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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셸비 반 펠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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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식물에게 말을 건다. 오랜만에 본 화분 속 식물에게 말이다. “안녕, 잘 지냈어?” 그럼 잎사귀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만 같다. 사실 혼자만의 생각이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물을 주고 잎사귀를 매만지는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다. 셸비 반 펠트의 장편소설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을 읽으면서 그 식물들이 생각났다. 식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냐고? 전혀 아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수족관이 등장한다. 다양한 바다 생물, 그중에서도 똑똑한 문어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문어, 당신이 떠올리는 축구와 문어, 그 문어 말이다.


문어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과 세상, 그리고 상실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 뭔가 재미와 감동이 기대된다면 맞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처음부터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스포일러겠지만 뭐 당신이 읽지 않는 한 이 감동을 느낄 수 없으니 괜찮다. 그냥 이 소설에 대해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싶다. 소웰베이 아쿠아리움의 수조에 갇힌 문어 ‘마셀러스’, 그와 우정을 나누는 아쿠아리움의 70세 청소부 할머니 ‘토바’. 인간과 문어의 우정은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다고 본다. 식물과의 우정도. 참고로 나와 식물 사이의 우정은 조금 더 깊어져야 한다.


토바는 마셀러스가 수조를 탈출하는 걸 알면서 관장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시 수조로 들어가게 도와준다. 마셀러스가 수족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심심하고 답답하고, 호기심이 많아서다. 8개의 팔로 흥미로운 것들을 몰래 가져오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마셀러스는 수조 안에서 아쿠아리움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지만 그가 관심을 갖는 이는 오직 토바뿐이다.


바다가 깊숙이 간직한 비밀이란 이런 것들이다. 내가 다시는 탐험할 수 없는 것들.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스니커즈 밑창과 끈, 단추, 복제 열쇠를 모두 챙길 것이다. 전부 다 그녀에게 전해줄 것이다. 그녀의 상실에 위로를 전한다. 이 열쇠를 돌려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155쪽)


토바는 혼자다. 어린 시절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주 후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살고 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남편은 암에 걸려 죽었고 그보다 먼저 아들 에릭이 세상을 떠났다. 30년 전, 십 대의 아들 에릭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토바에게는 그랬다. 현재 토바의 삶에는 아무런 희망도 즐거움도 없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동네 친구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마음, 호의와 배려가 조금은 불편하다. 마트를 운영하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선도 마찬가지다. 아쿠아리움에서 청소를 하는 일, 어린 아들이 올라탔던 동상을 닦는 일, 바다 생물에게 인사를 건네는 반복된 일상을 살아낼 뿐이다.


그러니 하나뿐인 오빠의 죽음에도 충격을 받지 않는다. 오래전 교류가 끊겼고 물건을 챙기러 요양원에 방문할 뿐이다. 그런데 입소 신청서를 쓰고 집을 팔기로 결정한다. 아버지, 남편, 아들의 흔적이 가득한 집을 말이다. 청소를 하다가 팔을 다친 후 집 정리를 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결정한 일이다. 토마에게 더 이상 소웰베이엔 남은 게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토바의 인생에 캐머런이 등장하곤 달라졌다. 캘리포니아에서 생부를 찾아 소웰베이로 온 캐머런. 약물중독의 엄마 대신 이모가 캐머런을 키웠다. 엄마의 돌봄을 기대하기는커녕 연락도 되지 않았다. 서른이 되었지만 일자리도 살 곳도 없다. 여자 친구의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대책이라곤 이모에게 받은 엄마의 물건에서 발견한 패물과 졸업 반지와 사진으로 생부를 찾는 것이다. 그 모든 단서가 소웰베이로 오게 만들었다. 캐머런이 생부라 여기는 남자는 부동산 재벌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었지만 소웰베이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외부인에 대한 모든 걸 공유하는 이들이었다.


간신히 얻은 아쿠아리움의 일자리는 힘들고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준다는 마트 사장 이선은 간섭이 심하고 선배 청소부 할머니는 잔소리가 많다. 패들 숍을 운영하는 에이버리의 친절은 이상하다. 그 모든 게 자신을 향한 애정이라는 걸 캐머런은 알지 못한다. 이모 외에는 어떤 이에게도 그런 마음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아쿠아리움의 문어 때문에 토바 할머니와 자주 만나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문어를 대하는 토바 할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태도.


대체로 나는 구멍을 좋아한다. 내 수조 위에 있는 구멍이 내게 자유를 준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에 생긴 구멍은 싫다. 심장이 세 개인 나와 달리 그녀의 심장은 하나뿐이다. 토바의 심장. 그 구멍이 메워지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다. (368쪽)


마셀러스는 캐머런과 토바의 관계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 그 둘 사이를 자신이 연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쯤 되면 모두가 짐작했을 것이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네 인생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들이 많다. 그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되는 순간 삶은 충만해지는 게 아닐까. 너무 늦게 알아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비밀에 다가가는 일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 절망과 좌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은 그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따뜻한 소설이다. 명민한 화자는 따뜻함에 신선함과 재미를 더한다. 상실과 상처로 얼룩진 우리네 삶이 어떻게 치유되는지, 그 치유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우리의 대단한 화자 마셀러스는 이미 알고 있는 그것 말이다.


비밀은 어디에나 있다. 어떤 인간들은 비밀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폭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최악의 의사소통 능력, 그것이 인간이란 종의 특징인 듯하다. 다른 종이라고 훨씬 나은 건 아니지만, 청어조차 자신이 속한 무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며 그에 따라 헤엄쳐 나간다. 그런데 왜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지 서로에게 속 시원히 말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수백만 개의 단어를 사용할 수 없는 걸까? (80쪽)


문어를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최초의 소설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어디서든 문어를 보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인사를 전하게 될 것 같다. 그러니 한동안은 문어숙회의 맛은 잊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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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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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거창한 질문인가. 생각해 보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향하는 쪽의 끝에는 행복과 구원이 있다. 오롯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이에게 세상과 다른 사람의 삶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족, 이웃, 사회와 적당히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 사는 건 이렇게 어렵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에 등장하는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가 바라는 삶도 그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지만 일요일에 늦잠을 자고 목욕탕에 다녀오고 동네를 산책하는 일만으로 충분했다. 바느질하는 아내와 한가롭게 누워 잡지를 읽는 남편의 모습. 비 오는 출근길엔 남편 소스케의 구멍 난 구두를 보며 하나 장만해야 한다고 거드는 아내.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소스케의 일상은 단조롭다. 출근과 퇴근 후 오요네와 저녁 식사와 짧은 대화. 부족한 게 없는 듯 보이지만 허전함이 느껴진다. 주인집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허전함의 원인이 바로 아이였다는 걸 알았다. 소설 초반에 아이에 대한 계획이나 언급이 없어 혼자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복선처럼 깔리는 작은 집과의 문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소스케의 태도는 『산시로』와 『태풍』 속 등장인물과 비슷하다. 어떤 다급함이나 간절함은 찾기가 어렵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다르게 흘러가는 게 삶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고요한 풍경 같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부부에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소스케의 남동생 고로쿠의 거처였다. 고로쿠는 아버지의 죽음 후 숙부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집과 유산을 숙부가 관리했고 소스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숙부가 죽었고 숙모는 더 이상 고로쿠의 학비를 지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고로쿠는 형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기를 바랐지만 소스케는 차일피일 작은집 방문을 미루고 있었다. 고로쿠가 자신처럼 대학을 그만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딱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오요네도 다르지 않았다. 소스케를 채근하는 대신 남편의 의견에 동조할 뿐이다.


고로쿠는 오요네가 화장대를 놓고 쓰는 방으로 옮겼고 당분간 숙모가 학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자신의 공간이 사라졌지만 오요네는 불만을 말할 수 없다. 고로쿠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결석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일이 잦다. 그런 고로쿠에게 형과 형수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모습은 뭐랄까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인다. 지루하다 정도는 아니지만 평탄하게 흐르는 일상에 작은 변화가 찾아온다. 주인집에 든 도둑이 소스케의 집 뒤꼍에 서류함을 버리고 간 것이다. 물건을 돌려주는 일을 계기로 주인인 사카이와 교류가 잦아진다.


사카이의 풍족한 삶,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모습과 소스케와 오요네의 단출함을 비교하면서 그들 부부의 과거를 들려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부유한 대학생이었던 소스케, 친구의 누이로 만난 오요네. 둘은 점차 친밀해지고 친구가 병을 얻어 요양을 떠난 곳까지 소스케는 찾아간다. 그 이후 소스케는 친구를 배신하고 학교에서 퇴출당하고 부모를 버렸다. 짐작했겠지만 오요네는 누이가 아닌 아내였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유산과 아기의 죽음. 오요네는 그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 믿었다.


그들의 생활은 폭이 좁아질수록 더 깊어져갔다. 그들은 육 년 동안 세상과 산만한 교섭을 하지 않은 대신 육 년의 세월에 걸쳐서 서로의 가슴을 파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에까지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본다면 여전히 두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볼 적에는 도의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172쪽)


육 년이라는 시간을 둘만을 바라보며 하나로 살아온 그들에게 고로쿠의 미래와 사카이와의 교류는 뿌리를 흔들 정도의 어려움은 아니었다. 사카이의 입에서 몽골에서 온 동생과 동생의 친구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친구는 바로 오요네의 전 남편이자 소스케의 친구였다. 그들을 소개해 준다는 사카이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소스케는 전전긍긍한다. 관청 일도 집중할 수 없고 오요네에게 말할 수도 없다. 소스케는 병가를 내고 산사로 도망친다. 소스케의 행동은 비겁하다. 소세키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삶의 위기는 가능하다면 모면하는 게 좋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사에서 지내는 동안 소스케가 얻은 건 무엇이고 깨달은 건 무엇일까.


제목인 『문』이 의미하는 건 내면의 ‘문’이었다. 저마다 하나씩 간직한 자신만의 문. 그 문을 열 용기와 힘은 결국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누군가 문을 열고 지나갈 것이고 누군가 문을 외면할 수도 있다. 소스케처럼 처량하게 그 옆을 지킬 수도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264쪽)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달짝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265쪽)


『산시로』와 『태풍』보다는 좋았던 소설이다. 담담하고 슴슴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다. 가을의 풍경으로 시작하는 『문』은 가을에 읽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가을을 지나 겨울에 접어들어 새해를 맞이하고 봄을 기다리는 일의 반복이 인생이라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로 기뻐요. 이제 봄이 되어서” 오요네의 말에 “응, 그렇지만 또 겨울이 올 거야”라고 대답하는 소스케의 말은 묘한 여운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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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4-28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읽으면 좋을 소설!
기록해 둡니다^^

자목련 2023-04-28 09:05   좋아요 2 | URL
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읽어도 좋을 것같아요!
 
누구도 울지 않는 밤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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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닥이라고 이제 일어서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키며 살았다. 한 번에 온전하게 설 수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천천히 일어서다 넘어져도 괜찮다고. 툭툭 손을 털고 기지개를 켜면 될 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런 날들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절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시간이 나를 성장시켰고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도무지 모르겠다. 바닥이라 여겼던 시간은 바닥이 아니었고 곡선의 마음은 어디론가 튕겨나가기 일쑤다. 삶이 쉽지 않다는 건 오래전에 알았지만 사는 게 버거워 모든 걸 놓아버리고 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둘러보면 나의 삶은 오히려 평온한다는 게 어디론가 숨고 싶게 만든다.


김이설의 단편집 『누구도 울지 않는 밤』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나는 아직은 괜찮다고 그러니 푸념이나 절망은 잠시 넣어두라고 말이다. 물론 고통과 절망은 개인적이어서 평균을 찾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김이설의 소설 속 인물은 저마다 시련을 안고 살아아간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과 시련의 시작이 가족이라면 말이다.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원가족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사느라 바빠 자녀를 돌보기 어려운 경우, 주변의 도움을 받는다. 가까운 형제나 돌봄이 필요한 자녀 중 첫째. 이모나, 언니 누나가 그 대상이 된다. 「모면」의 ‘소영’도 엄마보다는 이모와 친했다. 이모가 된 지금 형부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육아에 지친 언니를 도와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봄의 주체가 돼버렸다. 부모인 언니와 형부 대신 퇴근 후 조카를 돌보며 이모와 엄마의 관계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당한 이모, 그 모습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투영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는 이유를 대며 모면하는 건 아닌지.


가족은 쉽게 끊어낼 수 없기에 더욱 힘들다. 그런 이유로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결속을 바라며 이별을 원하지 않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막상 가족의 형태를 갖추고 살아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답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내일의 징후」 속 동성 연인 ‘소혜’와 ‘성은’은 마주한 현실과 「가족의 일생」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은주’와 가족이 된 ‘정균’이 짊어진 가장의 무게는 너무 힘들었다. 이유 없이 가출을 하는 은주를 기다리는 정균 곁에는 딸 예령만이 남았다. 회피한 대화의 부족일까, 아니면 무엇이 가족을 해체하게 만들었을까.


처음엔 그랬다. 같이 살게 되면 같은 걸 꿈꿀 줄 알았다. 같이 있으면 같은 열망을 품을 줄 알았다. 같이 사는 것이 완결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의 징후」, 53쪽)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그게 가능한 사람인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 가정을 버리고 떠나 늙고 약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환기의 계절」 속 엄마를 자매는 납득할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엄마를 보면서 큰 딸인 ‘나’는 자신의 상황을 돌아본다. 외도를 당당하게 밝히고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 자신과 같은 처지로 딸을 키우고 싶지 않기에 부정하고 외면한다. 아버지의 정체성과 오랜 시간 친구로 지냈다는 엄마의 사정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족은 무엇일까.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형태만이 가족일까.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의 성장의 결핍이 큰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나’에게 닥친 시련은 쉽게 치유되지 않겠지만 ‘나’는 조금 더 유연해질 것이다. 계절은 순환하고 삶은 멈추지 않으므로.


이제는 예전의 일상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다음 계절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환기의 계절」, 154쪽)


이처럼 가족은 다양한 이유로 해체될 수 있다. 해체가 잘못도 부족도 아니다. 그 자리를 채울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삶이란 참 신기하다. 앞서 언급한 「모면」에서 엄마의 자리를 채워준 이모나, 「가족의 일생」과 「환기의 계절」에서는 자녀가 있다. 온전하게 영원할 수 없지만 내 곁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일이 삶이기도 하다. 자녀에게만 기대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원가족과 분리를 원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은 살아온 시간이 가져다준 경험 때문이다. 「긴 하루」에서 ‘유순’은 딸 ‘혜서’가 연극을 하는 남자를 사귀는 일이 그러했다. 집을 나간 혜서가 맞닥뜨릴 고단한 삶이 훤히 보인다. 자꾸만 어긋나는 딸과의 관계는 독립했던 딸이 자신의 모든 걸 정리하고 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계절이 바뀌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버섯농장을 하는 엄마 곁으로 돌아온 ‘유경’은 적응이 어렵다. 경찰이 된 동창생 ‘민수’가 도와주고 있지만 버섯을 키우는 일도 헤어진 연인에 대한 마음도 힘들다. 농장을 넘기라는 민수의 부모와 그러면서도 민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민수의 어머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지만 ‘유경’은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는 끝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었다. 아직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계절이 바뀌는 곳」, 219쪽)


『누구도 울지 않는 밤』 속 인물을 통해 김이설이 전하고 싶은 바람이 그렇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 절망의 순간도 지나갈 거라는 믿음을 심어준다고 할까. 「「반 뗀 라 지?」속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고모의 학대와 친족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임신까지 한 열여덟 ‘두연’이 다른 삶을 찾아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 그렇듯, 「치유정원에서」에서 ‘나’는 아무런 설명 없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동생과 그로 인해 정신을 놓아버린 엄마와 위로가 되었고 사랑했던 연인마저 떠나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지만 삶이 끝났지 않았다는 걸 안다.


나쁜 일을 잊을 수 있다면, 어둔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럴 수만 있다면,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든 나쁜 기억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두운 상처를 피하지 않는 일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끝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엄마가 온전치 않다고, 석우는 떠났다고, 나는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치유정원에서」, 177쪽)


모든 걸 삭제하고 리셋할 수 없는 게 삶이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거나 치유되지 않더라도 천천히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천천히 나아지려 노력하며 살아갈 뿐이다. 김이설은 가족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 돌봄, 희생, 폭력에 대해 말하지만 날카롭고 불편한 묘사를 통해 혹독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아닌 고달픈 삶을 어루만지는 연대의 손길과 마음을 들려준다. 실패, 좌절, 시련, 고통은 여전하더라도 말이다. 아직은 괜찮다는 다짐과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도 된다고. 그러면 조금 괜찮아지고 나아진다고. 누구도 울지 않는 밤이 찾아 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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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재미가 먼저다 - 나무 말고 숲을 보게 하는 과학 상식
장인수 지음 / 포르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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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떠올리면 지구과학, 물리, 화학으로 머리가 아팠던 수업 시간과 동시에 알코올램프 수업을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따라온다. 무조건 암기를 했던 시절, 시험만 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니 과학을 좋아하거나 어떤 원리를 이해하고 과학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었다. 과학이 우리 일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과학으로 우리가 어떤 이로움을 얻고 있는지 『과학, 재미가 먼저다』를 통해 배우고 알게 되었다.


저자 장인수는 12년 동안 EBS에서 강의를 해온 물리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잘 알려진 강사다. 그러니 이 책은 과학이 어렵다는 편견을 지닌 학생들에게 유용한 책이다. 학습용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이라는 과목을 좀 더 쉽고 좀 더 재미있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나무 말고 숲을 보게 하는 과학 상식’이라는 부제처럼 일반 상식을 채우기에도 적절하다. 나 같은 독자에게는 배움이라는 측면보다는 그렇구나 정도로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 사실 배워야 하는 공부라고 생각하면 뭐든 다 어렵지 않은가.


책은 인체의 과학, 일상 속의 과학, 길 위의 과학, 우주의 과학, 네 가지 주제로 과학을 알려준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고 그것의 원리를 알려주고 현재 어떻게 발전하여 우리 생활에 적용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설명에 있어 그림이나 표를 통해 빠른 이해를 돕는다. 빛의 반사와 굴절을 통해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를 배우고 하늘이 왜 파란색인지(사실,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을 알려준다.


귀가 아파서 고생한 기억 때문인지 소리에 대한 부분은 집중해서 읽었다. 소리를 듣는 귀의 구조를 보면서 귀지가 고막 쪽으로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그래서 자꾸 귀지를 파면 혼을 냈구나 싶었다. 현대 사회에서 소음은 피할 수 없지만 듣기 좋은 잡음인 백색소음이 인기를 끄는 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TV소리를 크게 듣게 되는 현상이 노화로 인한 달팽이관의 청세포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니 서글퍼지기도 했다. 10대 청소년이 들을 수 있는 음역대와 40대 어른들이 들을 수 있는 음역대가 다르다는 설명은 세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국의 쇼핑몰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불량 청소년을 내보내기 위해 40~50대를 위한 소리를 발생시켰다는 사례는 인상적이다. 혼을 내거나 꾸짖는 대신 연령대에 따라 가청 진동수가 다르다는 원리를 적용해 멋지게 해결했으니까.


일상 속의 과학은 훨씬 재미있고 흥미롭다. 에어컨이나 히터의 위치가 밀도와 연관되었다는 사실, 삼투압 현상을 이용해 김장을 담든 선조의 지혜와 물속에 오랜 시간 손을 담그면 쭈글쭈글해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그럼 바닷물에 사는 동물은 삼투 현상으로 배추처럼 절여질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호기심을 유발하고 재미를 불러오는 것, 그게 과학을 배우는 즐거움이라는걸.


게, 홍합, 해파리, 상어, 가오리 같은 동물들은 바닷물의 농도와 자기 몸의 농도를 같게 만든다. 몸과 바닷물의 농도가 같으면 물이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민물에 사는 물고기는 삼투 현상으로 물이 계속 몸으로 들어온다. 따라서 물을 거의 마시지 않고 많은 양의 오줌으로 물을 배출하면서 몸의 농도를 조절한다. 연어는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가서 생활하다가 산란기가 되면 다시 강으로 돌아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강에서 생활할 때와 바다에서 생활할 때 삼투 현상에 대비하도록 본능적으로 진화해 왔다. 삼투 현상을 대비하는 물고기에게서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99쪽)


무선 이어폰을 블루투스에 연결해 음악을 듣는 일상은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기파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저자는 하나의 원리를 먼저 설명하는 대신 일상 속 과학으로 접근해 관심을 유도한다. 이런 강의 형식이 인기의 요인이 아닐까 싶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당연하지만 자연과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중요하다. 환경친화적이라고 말하는 자원이 과연 그럴까. 이제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풍력 발전소의 설치, 그에 따른 소음으로 고통받는 주민,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했지만 나중에 폐기되는 패널은 중금속 덩어리로 남는 일은 대책이 필요하다. 버려지는 것 없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매일 마시는 커피를 활용한 사례는 많은 이들이 기억하면 좋겠다.


커피 한 잔을 내린 뒤 남은 원두 찌꺼기는 그대로 매장할 경우, 찌꺼기가 썩으며 온실가스의 일종인 메탄가스를 발생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지렁이를 비롯한 토양 생물들이 카페인에 중독되어 고통받는다. 이 원두 찌꺼기의 성분인 목질 섬유소를 버섯에 배양할 때 이용하면, 버섯이 그 섬유소를 먹고 자랄 뿐 아니라 커피 속 카페인에 자극을 받아 더 빨리 성장한다. 이렇게 자연 물질들의 특성을 알고 잘 활용한다면, 굳이 새로운 친환경 자원을 개발하지 않아도 환경친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165쪽)


과학이 무진장 어려운 것이었다면 이 책을 읽고 나면 한 결 쉽게 다가올 것이다. 무진장 쉬운 과학 이야기라고 감탄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어렵구나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이 무조건 복잡하고 재미없는 과목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배우고 공부하면 더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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