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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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몇 권 읽으면서 점차 환해지는 기분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내게 흐릿한 막 같았다. 막은 걷힐 것 같으면서도 쉽게 걷어 내기가 어려웠다. 소설마다 등장하는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의 비슷한 성격이 그러했고 결말 또한 선명했던 또렷한 기억이 없다. 다시 읽으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그렇다. 그랬던 마음이 『마음』을 읽으면서 이전보다는 선명해졌고 그의 소설이 더 좋아졌다.


사실 이 소설의 단순하다. 화자인 ‘나’가 만난 ‘선생님’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은 아니다. 이름 대신 선생님일 뿐, 인생 선배 정도도 무방하다. 어쨌든 나는 우연하게 만난 선생님과 친해진다. 물론 이건 나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나에게 곁을 내주는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다. 선생님을 찾아가는 나를 내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할까. 그런 무심함에 끌렸던 것일까.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고 좋아하는 데 딱히 이유를 찾기 어려운 일이니까.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을 손을 벌려 안아줄 수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선생님이었다. (29쪽)


선생님은 비밀스러운 사람이다. 사모님이 있고 하녀가 있지만 일은 하지 않는다. (소세키의 소설에 이런 인물은 자주 등장한다.) 도쿄에서 대학에 다니는 나는 선생님이 찾는 묘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고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그러나 선생님은 선뜻 자신의 과거나 생각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철학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세계에 속하는 사람 같다. 한 번씩 그가 던지는 말의 진의를 나는 알아차릴 수 없다. 도대체 선생님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토록 거리를 두고 벽을 쌓아두는 것일까.


“아무튼 날 너무 믿으면 안 되네. 곧 후회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속은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건 또 무슨 뜻이지요?”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50쪽)


나뿐만 아니라 독자는 더욱 그가 살아온 시간을 들여다보고 싶다. 물론 이제 독자인 나는 선생님의 사연을 다 앍게 되었지만 선뜻 말하기가 어렵다. 그가 그토록 조심하며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 그 복잡한 마음에 대해 나는 함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그의 것이고, 그러므로 그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그건 착각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이지만 나조차 알 수 없는 것,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릇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옅어지기도 하고 단단해지기도 하는 그런 것.


“나쁜 사람이라는 부류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그렇게 틀에 박은 듯한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평소에는 다들 착한 사람들이네. 다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 거네. 그래서 방심할 수 없는 거지.” (83쪽)


그런 소세키의 진의를 단 번에 알아차리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렇게 보면 소설 속 선생님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건 소세키를 이해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소설은 선생님의 유서를 통해 그 모든 걸 알려준다. 그러나 선생님의 유서를 읽고서도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자신과 동시에 아내를 사랑했던 친구 K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을 끝내는 결단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거다. 어려운 처지에 있던 친구 K를 자신의 하숙으로 데려오면서 묘하게 발생한 삼각관계. 선의를 베푼 행동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에 선생님의 마음을 복잡하다. 하숙집 딸(선생님의 아내)을 향한 K의 마음을 들은 선생님의 마음, 두 마음은 충돌한다. K의 고백을 들은 후 자신의 마음을 말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나는 내 과거의 선과 악 모두를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제공할 생각이네. 하지만 아내만은 단 하사람의 예외라고 생각해주게. 나는 아내에게 아무것도 알리고 싶지 않아. 아내가 내 과거에 대해 가진 기억을 되도록 순백의 상태로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니 내가 죽은 뒤에도 아내가 살아 있는 이상은 자네에게만 털어놓은 내 비밀로 모든 것을 가슴에 묻어두게. (274쪽)


어쩌면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마음을 나를 만나 털어놓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니까. 나의 모든 걸 아는 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그런 마음 말이다. 마음을 말하는 일, 마음을 살피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분명 내 마음인데 주변 인물이나 상황 때문에 우리는 진짜가 아닌 가짜 마음을 내보인다. 소설 속 나의 대학 졸업을 기뻐하고 기대하는 부모님에게 진짜 마음을 보여줄 수 없는 이유다. 자리 보존하고 누운 아버지를 대하는 가족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이기에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그 마음을 끝내 말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보여 준 선생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그토록 알고 싶었던 그 마음을 모르고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끝내 알지 못한 것이다. 유서를 통해 마음의 일부는 알았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마음을 아는 일, 그 마음 주인인 인간을 아는 일, 평생을 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 알고자 하고 닿고자 애쓰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고 훌륭한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낳은 내 과거는 인간 경험의 한 부분으로서 나 이외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거짓 없이 써서 남기는데 내 노력은 자네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인간을 아는 일에 헛수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네. (273쪽)


『마음』 을 읽는 동안 여러 모양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 마음속에 어지러운 내 마음이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을 다 담고 싶고 알고 싶은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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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7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걸 읽긴 했는데요....?! 완전완전 독서 초보 시절에 읽어서 기억이 하나도 안나네요. 그리고 그땐 소설 읽으면서 뭔가 느낄 줄 몰라서 감흥도 별로 없었던 듯.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입니다! 처음 읽는 책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ㅋㅋㅋ

자목련 2023-07-28 09:26   좋아요 2 | URL
은오 님은 일찍 만나셨군요. 저는 이제야 읽었습니다. 소세키 소설은 뭔가 밍밍하면서도 담백한, 그런데 자꾸 중독되는 그런 맛이 있는 듯해요. 다시 읽어보는 일, 슬그머니 추천해요!
무지 덥습니다. 시원하게 보내시고요^^

blanca 2023-07-28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은 저와 독서 취향이 정말 같아요...신기해요. 저도 <마음> 정말정말 좋았거든요. 별 다섯 개 완전 공감합니다.

자목련 2023-07-31 08:53   좋아요 2 | URL
마음을 읽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요. 소세키의 소설이 진짜 좋구나 느끼게 된 소설이었어요!

새파랑 2023-07-2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세키 작품중에 마음이 가장 좋더라구요. 저는 두번 읽었습니다 ㅋ

정말 마음이란 뭘까 궁금할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어느정도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ㅋ

자목련 2023-07-31 08:54   좋아요 2 | URL
두 번 읽는 마음!
마음이 뭘까, 마음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소설이 아닌가 싶어요^^

잠자냥 2023-07-31 1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 진짜 좋죠. 읽고 또 읽어도 좋은 작품입니다. 제가 소설을 재독하는 경우는 드문데 소세키의 몇몇 작품은 그게 가능해요. 참 신기하죠!

자목련 2023-08-02 08:38   좋아요 0 | URL
소세키는 책장에 있는 책들만 읽고 끝내려고 했는데 <마음>은 구매하길 잘 했다고 생각해요. 더 욕심이 나지만 남은 3권만 읽고 참으려고요. ㅎ

그레이스 2023-07-3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았던 작품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것만 같은 순간이 있고, 도무지 모르겠는 순간이 있죠.
동일한 죄의식과 회환을 안고 있는 두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게 마음이란 생각도!

자목련 2023-08-02 08:38   좋아요 0 | URL
아, 마음이 이렇게 어려운 건가 생각했어요. ㅎ
같은 마음이라고 여겼던 마음도 한 순간 다르게 흘러가는 게 마음이구나 싶고요!
 
소름이 돋는다 - 사랑스러운 겁쟁이들을 위한 호러 예찬
배예람 지음 / 참새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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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끈적한 여름, 서늘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바야흐로 공포를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다. 일상 곳곳에 도사리는 공포를 피하는 대신 그걸 즐기며 소화한다. 공포, 스릴러, 호러는 더위를 날리는 여름에 국한된 장르가 아니라 인기 장르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러 에세이 『소름이 돋는다』는 기발하고 신선하다. 어린 시절 귀신을 본 경험이나 담력 공포 체험은 익숙하다. 귀신의 실체 유무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할까.


호러를 좋아하는 겁쟁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배예람의 『소름이 돋는다』는 밤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귀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영화, 책, 게임을 통해 공포와 호러를 일상과 접목시켜 들려준다. 귀신을 본 어린아이는 귀신이 무섭지 않아서 가만히 옆에 앉아보았다고 한다. 귀신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은 어린아이가 결국엔 이런 에세이까지 쓰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름이면 생각나는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 속 귀신이나 흥행 소재로 등장한 좀비, 괴물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입체적으로 살아나지만 그 이야기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귀신의 경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영혼이 많고 좀비는 영생을 꿈꾸며 부활을 준비하는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대표로 괴물이라 칭하는 존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확인물체가 아닐까.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은 대부분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귀신에 대한 생각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아랑 설화를 시작으로 영화 <아랑>과 드라마 <아랑 사또전>으로 이어지는 글은 처녀 귀신을 통해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잘 그려낸다. 억울했던 사연의 주인공에서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으로 시대에 따른 인식의 변화를 설명한다.


귀신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곧 현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뜻이다. 귀신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들이 결국 현실의 부조리함에 대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억압과 차별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의 이야기는 곧 사회적 약자, 소수자 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이야기가 단순한 재미를 뛰어넘어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과 슬픔을 안겨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73쪽)


괴물을 현실 밀착형(돌연변이, 인간의 욕심으로 등장하는 괴물), 의심 유발형(어느 순간 괴물로 변하는 인간) 코스믹 호러형(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존재)로 분류하여 설명해 주는 부분은 나처럼 호러와 공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에게도 흥미롭고 유익하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으니까.


공포의 소재로 등장하는 집, 우주, 물을 소재로 한 영화는 직접 보지 않아도 공포를 어떻게 다루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꿈이었던 우주여행이 현실이 되었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우주는 공포의 공간이라는 것, 더 이상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닌 집, 이렇게 쓰고 베란다 창고 속에서 뭔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무섭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스치고 지나는 사람들, 인사를 나누는 이웃들, 친근한 공간에서 그들이 때로 무서운 존재로 돌변하는 일은 뉴스 속에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층간 소음, 주차 문제, 헤어진 연인이 스토커가 되어 괴롭히는 일. 사소하고 민감한 것 같지만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돌변하는 일. 우리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공포다.


이상적이라는 건 알지만, 나는 그 모든 범죄와 사건이 그저 괴담으로 남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세상에서,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모두가 안전한 가운데 괴담을 읽으며 소름이 돋는 감각을 즐기고 싶다. (165쪽)


책을 읽으면서 귀신들의 눈에만 보이는 호텔 이야기 <호텔 델루나>,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시키는 좀비를 만나는 김중혁의 소설 <좀비들>, 최근 가장 즐겁게 시청하는 <악귀>가 떠올랐다. 호러를 좋아한다면, 괴담 게시판을 찾는 이라면 『소름이 돋는다』 란 친절한 호러 안내서가 더욱 반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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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6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사람이 제일 무서운 현실. 밤에 그것이 알고싶다 본 날엔 발을 이불 밖으로 못 내밀고 잡니다....😥

자목련 2023-07-27 10:50   좋아요 0 | URL
요즘 뉴스에 나오는 사건, 너무 무서워요. 독극물이 든 우편물, 묻지마 살인, 예고 살인.
그럼에도 의지하고 사랑할 존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는 삶...

잠자냥 2023-07-31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언젠가 자전거 여행 중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해가 지고 나서 어두운 길을 달려야만 했던 때가 있었는데요. 귀신은 차라리 낫다, 제발 사람만 나오지 마라 하면서 페달을 열심히 밟았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ㅎ

자목련 2023-08-03 17:42   좋아요 0 | URL
어둡고 낯선 곳에서는 사람이 더 무서울 것 같아요. 사람 무서운 뉴스는 그만 보고 싶은 날들이에요,ㅠ,ㅠ

은오 2023-08-04 00:10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자전거 압수....
 
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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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빛을 간직하고 있기에 아름답다. 언제든 빛을 뿜어낼 준비가 돼있다고 할까. 빛을 발산하지 않아도 빛을 알아봐 주고 발견하는 이가 있으면 충분하다. 설령 그런 존재가 없더라도 내 안에 빛이 있다고 믿으면 괜찮다. 빛은 용기가 되기도 하고 사랑이 되기도 하고 비밀이 되기도 한다.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 『마지막 이야기들』 은 그런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엄 트레버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들, 10편의 짧은 소설은 그래서 아름답다. 윌리엄 트레버가 주목하는 것은 평범하면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삶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절대 당연할 수 없는 것들, 그것을 묘사하다. 그러니 뻔하고 지루한 일상은 어디에도 없다.


뭔가 수상하고 비밀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처럼 시작하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마치 당신의 삶도 그렇지 않냐고 묻는 것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은 있기 마련이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너무도 많으니까. 그리하여 윌리엄 트레버는 독자에게 궁금증과 여운을 남기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리네 삶이라고.


아버지가 남겨주신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하는 여자와 천재적 소질을 지닌 소년 제자와의 이야기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에서 제자가 다녀갈 때면 집 안의 물건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러나 여자는 소년을 추궁하지 않는다. 그녀는 다음을 기약했던 것일까.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지닌 남자와 그를 돌보는 여자가 사는 「장애인」에서도 비슷하다. 페인트칠을 하러 온 형제의 눈에 비치는 둘은 뭔가 수상하다. 장애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의 죽음을 눈치채지만 여자도 형제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윌리엄 트레버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음을, 우리도 그렇지 않냐고 가만히 말을 건넬 뿐이다.





윌리엄 트레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그래, 그렇지, 그럴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변화무쌍한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자의 법적인 아내 ‘애니타’ 와 동거 중인 ‘클레어’가 친구였다는 소위 막장 드라마 같은 「다리아 카페에서」도 누군가의 삶이지 않는가. 남자가 죽고 남겨진 저택을 팔아야 한다면 이런저런 사정을 ‘애니타’에게 털어놓는 ‘클레어’. 계절이 바뀌고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그 집을 서성이던 ‘애니타’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친구의 존재를 찾을 수 없는 공간은 쓸쓸함이 가득하다. 남편은 죽고, 친구는 사라졌고 그녀는 다리아 카페에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원고를 읽는다.


집을 판다는 표지판은 치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 집에서 산다. 클레어가 쓸쓸한 고독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그걸 애니타는 지금 뒤늦게 쓸쓸한 고독 속에 받아들인다. 사랑이 오기 전, 우정이 더 나은 것이었을 때 있었던 모든 것을. ( 「다리아 카페에서」, 64쪽)


우리가 생에서 애써 감추려 했던 것은 정말 그럴만한 것일까. 묻지 않았던 말들이 바람 따라 날아가지 않고 가슴속에 쌓아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추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은 옳은 것일까. 자신의 집 청소부였던 젊은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젊은 여자의 삶을 궁금해하는 「모르는 여자」 속 화자 역시 말을 쌓아둔다. 왜 젊은 여자가 자살을 선택했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여자들」에서도 그런 비밀이 등장한다. 엄마가 죽은 걸로 아는 딸은 아빠의 극진한 돌봄으로 성장해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간다. 학교 주위를 맴돌며 우연하게 딸과 만나는 중년의 여자들. 이처럼 쉽게 이해를 구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언제든 등장한다. 그래서 비밀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게 우리네 삶이라는 걸 안다. 그런 이유로 삶은 살만하다. 『마지막 이야기들』에서 가장 긴 여운을 남긴 건 「겨울의 목가」다. 어느 시골 농장의 딸 ‘메리 벨라’와 가정교사 ‘앤서니’의 첫사랑을 다룬 뻔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어린 소녀의 첫사랑은 미완으로 끝나고 가정교사는 지도 제작가가 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시간이 지나 둘은 그 목장에서 재회한다. 일꾼들과 농장을 운영하는 메리 벨라와 앤서니는 과거의 감정을 확인한다.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메리 벨라를 택한 앤서니, 둘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이라고 행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복잡하고 미묘한 여러 마음의 하나라고 하면 맞을까. 앤서니는 아내를 떠났듯 메리 벨라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메리 벨라는 예전과 다르지 않게 농장의 하루를 시작할 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을 느끼고 간직하며 살아갈 뿐이다.


일꾼들이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선다. 붉은 타일이 깔린 바닥에서 그들의 장홧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메리 벨라는 불안감을, 그리고 어쩌면 연민을 감지한다. 그녀는 그것들을 웃어넘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그에게는 그 사랑이 그녀의 그림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했던 방들과 장소에 있음을 일꾼들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임을, 길고 긴 느린 죽음이나 평범해진 사랑은 없을 것임을 일꾼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겨울의 목가」, 206쪽)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설명한다고 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는 이해를 구할 필요가 없는, 이해받지 않아도 될 사정이 있다는 걸 살아갈수록 깨닫는다. 거장인 윌리엄 트레버는 이미 알고 있었고 소설로 들려준다. 그가 획득한 삶의 지혜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삶의 이야기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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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7-1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엄지 척👍👍❤️❤️
이 책의 울림과 여운이 너무 강해 아직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데 너무 잘 정리해 주셨어요.
저와 자목련님과의 느낌이 꼭 같아요^^

자목련 2023-07-18 09:02   좋아요 1 | URL
❤️❤️❤️❤️
읽지 못한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을 더 읽고 싶다 생각했어요.
여전히 비가 많이 옵니다.
건강하고 안전한 하루 보내세요^^

은오 2023-07-17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는 징짜너무 좋다는 말씀들만 계속 들리네요. 알라딘 소설덕후분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윌리엄트레버 저도 얼른 도전하겠습니다!! 얼마나 좋을지 궁금....😆

잠자냥 2023-07-17 12:19   좋아요 1 | URL
안 자니...?

은오 2023-07-17 12:25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이 제피로회복제라 잠따위 안자도 쌩쌩합니다

잠자냥 2023-07-17 12:27   좋아요 2 | URL
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전 급피곤해지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윌리엄트레버 2번째 마니아입니다....(첫 번째였는데 내려갔네요?! 새파랑님이 올라오셨나! ㅎ)
암튼 은오님에게도 트레버 한 사발 권합니다~

은오 2023-07-17 13:06   좋아요 2 | URL
왜 급피곤해지신건지 전 도무지모르겟지만... 잠자냥님.... 왜 또 저 상상하게만드시죠? 그러니까 잠자냥님이 두번째 마니아인 작가의 책을 저한테 한사발이나 권하신다는건 거의 결혼신청 아닌가요?!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하니까 나랑 결혼할 너도 이 작가의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런거잖아요?....헐... 😳

잠자냥 2023-07-17 13:14   좋아요 1 | URL
나원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밥 먹다가 실소와 함께 밥알이....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07-18 09:03   좋아요 1 | URL
은오 님이 만난 윌리엄 트레버는 어떤 느낌일까요?
방학 끝나기 전에 만나시면 리뷰 기다려볼까요?

은오 2023-07-18 10:50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일단 기다리진마시고 왜냐면 읽을책이 너무많아서 무작정 소중한 자목련님을 기다리시게할순없기때문입니다.. 잊고계실때쯤 리뷰가 올라올지도....?! 🤭😍

자목련 2023-07-19 08:37   좋아요 1 | URL
은오 님이 만나는 다른 책들의 리뷰 즐겁게 기다려요!
그래도 방학에 많이 누워있기도 하세요💕

은오 2023-07-19 08:55   좋아요 0 | URL
💕💕💕💕💕

새파랑 2023-07-19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겨울의 목가>가 가장 좋았는데 자목련님도 그러셨다니 반갑네요~!!
아직 읽지 않은 트레버의 작품이 있으시다니 부럽습니다 ㅜㅜ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자목련 2023-07-19 08:39   좋아요 2 | URL
각가의 매력이 넘쳤던 소설집이었어요.
읽지 않은 트레버의 작품이 있다는 게 좋습니다. ㅎ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3-07-26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네요^^

자목련 2023-07-26 11:07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 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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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일은 아주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일, 하던 대로 지속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노력과 끈기 그런 걸로는 설명하기엔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든 건 김연수의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을 읽으면서 김연수의 소설을 계속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 소설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당연함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좋아한다고 해서 한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는 건 아니다. 좋아한다는 건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기대가 있다는 건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망에도 무릅쓰고 계속 좋아하는 일, 계속 읽는 일, 그건 용기를 넘어 확신 같은 거라고 할까.


누군가 내가 읽은 김연수 소설의 분위기가 내내 같은 게 아니겠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비슷하고 같다는 이유라면 나는 이미 그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작가와 함께 독자도 나이를 먹고 살아가다 보니 소설을 통해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점점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거창하거나 대단한 게 아닌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 이 순간의 아름다움과 평범하고 흔한 일상의 다정함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이 글은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대한 리뷰라고 할 수 없다. 처음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읽은 첫 번째 소설 이후 그의 소설과 산문을 읽는 동안 좋은 리뷰를 쓰고 싶었다. 잘 쓴 리뷰 말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대해서는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가장 최근에 만난 김연수의 단편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을 읽으면서 두 번째 바람을 맞이하는 게 인생이라고, 아니 얼마나 많은 N 번째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상실과 슬픔, 절망과 죽음 속에서 우리는 다음을 향해 나가고 있다고.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수록된 20편의 짧은 소설은 저마다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 좋음에 대해 애써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과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상냥하고 친절한 이야기라고만 하겠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 결국엔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노력,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에 대해,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다정함이 우리가 몰랐던 가능성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맞이하게 될 다음에 대한 이야기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코로나 다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김연수 작가가 어머니와 작별하지 않았더라면 딸인 열무와 작별하는 미래는 지금 쓰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뉴욕제과의 막내아들이 기억하는 어머니, 일본어를 쓰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더 나중에 쓰였을지도 모른다.


낭독회를 위해 쓰인 소설이라는 점도 특별하다. 공포로 가득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피신한 가족에게 이미 전쟁을 경험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흔한 지혜로 울림을 전하는 「두 번째 밤」으로 시작해 어머니의 임종과 엄마와의 추억과 일상을 천천히 들려주는 자전적 에세이 같은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마지막으로 배치한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원하지만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그런 과거가 바랐게 미래가 정녕 이런 모습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김연수의 말대로 우리는 미래의 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슬픔과 미련에 매달리는 대신 미래의 긍정을 향해서 말이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과 함께.


우리는 저절로 아름답다. 뭔가 쓰려고 펜을 들었다가 그대로 멈추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채, 다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바라볼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하다. 이게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세계라는 게 믿어지는가? 이것은 완벽한, 단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우리 역시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생각의 쓸모는 점점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은 낱낱이 느껴지고, 오직 모를 뿐인데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255~256쪽)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맣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 「너무나 많은 여름이」, 281쪽)


너무나 많은 비가 내리는 여름에 만난 김연수의 글이 지친 나를 달랜다. 습하고 불쾌한 감정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위로한다. 이 여름을 견디고 나면 조그만 버티면 젖은 바람이 아닌 마른 바람이 도착할 거라고. 그 당연한 걸 잊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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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3-07-16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목련님이랑 너무 같은 생각이에요. 울컥합니다....내가 젊은 시절부터 좋아했던 작가가 이렇게 여전히 세상과 공명하는 좋은 글들을 쓰며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침부터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7-17 07:49   좋아요 0 | URL
이 소설집은 김연수를 더욱 애정하게 만들었어요.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할까요. 참 좋았어요.
블랑카 님의 댓글로 다정한 하루가 열리네요!

책읽는나무 2023-07-16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용기를 넘어 확신 같은 것!!
압도적인 문장이란 생각이 듭니다.^^

자목련 2023-07-17 07:48   좋아요 1 | URL
이 소설집을 읽는 여름이라 행복했어요. 나무 님도 그 시간과 곧 마주하겠지요?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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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죽을 걸어보자면 사물 에세이는 많다. 똑같은 사물이지만 저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그에 대한 기억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물이 간직한 사연과 추억은 고유하면서도 다양하다. 누군가의 소중한 사물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많이 쓰는 소재로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누구도 쓸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이향규의 일상 에세이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사물에 대해 말하지만 남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어쩌면 저자의 보통의 일상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다 보통의 일상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영국에서 거주하는 일, 이방인으로 사는 일, 파킨슨병에 걸린 영국 남자를 남편으로 둔 일, 영국에서 우리말(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것. 그에게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까 책의 제목처럼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 에세이는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토요일 아침에 혼자 먹는 고사리나물, 미역국, 김치가 어떤 의미로 <위로 음식>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국의 땅에서 느껴지는 그리움을 생각하는 동시에 내가 기억하는 미역국은 어떤가 떠올리며 나를 위로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앞서 딴죽을 걸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저자가 들려줄 다른 사물에는 어떤 따뜻함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파킨슨병으로 외출을 할 때마다 남편을 도와주는 <지팡이>에서는 자연히 한국과 영국의 모습을 비교하게 된다. 타인과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가 한국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모르고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일지도 모르지만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이들에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보편적 시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두운 밤길 운전에 필수적인 <전조등>에서는 보이지 않는 앞을 비춰주는 전조등의 고마움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를 주는 사람들로 이어진다.


영국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펍>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단순히 맥주를 파는 가게가 아닌 동네 이정표 역할을 하는 <펍>, 나만의 단골가게가 아닌 모두의 단골가게라는 느낌이 들었다. 택배를 받아주기도 하고 이웃과 이웃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그곳이 정겹고 내게는 그런 공간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시계>란 사물에 대해서는 그저 오래된 시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돌봄’으로 이어진다. 한국 아파트에 살면서 관리사무소를 통해 수리하고 안내받았던 것과 다르게 영국에서는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하는 저자는 아파트를 돌봐준 이들의 고마움을 생각한다. 한국에서 돌봄을 받기만 하다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며 쓴 글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돌봄에 대한 인식이다.


돌보는 일은 ‘전문직’인 것 같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알아채는 뛰어난 감수성, 타인의 속도에 맞추는 인내심, 의식주처럼 삶의 재생산에 관련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 시대 변화를 학습하는 능력, 강건한 체력과 정신 건강이 요구된다. (<시계>, 186쪽)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돌봄이 전부가 될지도 모른다. 거대한 돌봄의 시대,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말로 돌봄이니까. 그런 의미로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물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단체 대화방>이라 하겠다. 성탄절 아침에 전기가 나갔을 때 동네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를 올리자 도움을 알리는 답글이 가득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끄떡없을 것 같은 든든함이 내게도 전해졌다.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이 고마웠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도 무서워진 세상에 접하는 무해한 일상이라니.


당신과 나를 연결하는 사물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 스스럼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마음을 나누는 삶을 생각한다. 삶의 가치는 거창하고 대단한 무언가가 아닌 그런 소소한 다정함에서 찾을 수 있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일, 그것이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진정한 삶이라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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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7-07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부쩍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당근‘사용하다가 동네 분에게 도움 받은 일 떠오릅니다. 소소한 다정함~^^♡

자목련 2023-07-10 09:12   좋아요 1 | URL
외국에서 한국어는 단어만 들어도 반가울 것 같아요.
당근도 이웃을 연결하는 앱 같네요. 저는 당근을 아직 이용해 본 적이 없어요^^

2023-07-14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