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품절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사랑하는 일보다 어렵다. 사랑이란 범주에 이해가 포함되는 거라 볼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가슴이 하는 일이고 이해는 머리가 하는 일이라 여겨서다. 가강 가까운 가족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 중 하나다. 도무지 모르겠다. 왜 그러고 사는지 말이다. 당신들의 삶을 강요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독립된 존재로 보고 거리를 두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그게 참 안된다. 내 핏줄, 내 부모, 내 형제, 나와 떼어낼 수 없는 존재라 어쩔 수 없다. 그러니 한평생 빨치산으로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 당연 불가능해 보인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정지아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와 함께 살아온 이들, 그들이 겪은 세상이다. 


아버지 ‘고상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구례로 내려온 딸 ‘고아리’. 장례식장에서 죽은 아버지와 보내는 짧은 시간, 그곳으로 모여든 이들이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증인이자 역사였다. 이름도 낯선 이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아버지의 죽음에 한달음 달려온다. 딸이라는 자격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지만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장례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알아서 진행하는 사람들, 한때 동지였던 이들, 아버지와 반대편에 있던 이들, 연좌제 때문에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냈던 친척들이 오직 한 사람 아버지 때문에 한자리에 모였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생의 처음이 그러했든 생의 마지막도 모두에게 둘러싸여 배웅을 받는다. 장례식 또한 축제가 맞았다. 그들이 꺼내든 아버지와의 인연은 오래전 잊고 있던 아버지의 시간을 불러온다. 아버지로 인해 죽음을 당한 가족들, 그로 인해 평생을 형제가 아닌 원수처럼 지냈다. 아버지와 같은 빨치산이었지만 아버지처럼 살아남지 못하고 먼저 떠난 이들의 후손은 아버지를 원망했고 부러워했다. 살아남은 아버지에게는 그 사실이 부채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하나둘 떠오르는 아버지와의 기억, 사회주의자로 같은 뜻을 품고 살아온 어머니와 진정한 민중에 대해 투닥거리며 보낸 날들, 감옥에서 나와 어렵사리 얻은 자신을 극진하게 아끼고 보듬어준 아버지, 구례로 내려와 「새농민」이 알려주는 대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자신을 감시하는 형사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아버지,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일처럼 달려가 도움을 주던 아버지. 그에게 사상이나 이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촌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뜻을 꺽지 않았던 아버지. 모든 일에 “긍게 사람이제.”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았던 아버지. 


아버지 ‘고상욱’이 살아온 사회가 역사의 일부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내가 빨치산이나 사상범에 대해 안 건 그 아주 먼 나중이었다. 그러니 연좌제나 빨치산을 가족으로 둔 삶에 대해서는 소설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얼마나 순화된 내용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그랬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고 그들은 그르다 말했다. 아버지는 그 선 자체였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선을 자유롭게 오가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버지를 알고 지낸 이들은 세대, 계층, 의식 구분 없이 모두가 아버지에게 덕을 보았다. 


딸은 생각한다. 아버지는 과연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알고 싶다. 한 번도 제대로 묻지 못한 질문으로 남았다. 이제는 묻을 수도 답을 들을 수도 없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끝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안타깝고 애절하다. 화장한 아버지를 아버지의 발자취가 남은 곳을 다니며 아버지의 마음 몇 점을 남겨두는 딸을 아버지는 흡족할 것 같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은 여전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무거운 한 축을 담은 소설이지만 무거움에 취하지 않는다. 하나의 축제의 장으로 왁자지껄한 수다와 유머와 정이 넘친다. 아버지이자 고달픈 생을 살다간 한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시작된 화해와 용서를 담담히 전할 뿐이다. 어쩌면 작가는 자전적 소설이라 조금 더 신중을 기했을지도 모른다. 혁명가, 사회주의자, 이념가가 아닌 아버지의 해방일지. 그가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패를 안겨준 도시를 기억하는 일은 씁쓸하다. 그럼에도 그 도시가 여전히 그리운 것은 그곳에서 나를 채워준 사람들 때문이다. 나에게 도시란 그런 곳이다. 꿈과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이미지에 미혹된 어린 시절, 도시는 반드시 가야만 했던 곳이다. 하지만 도시에서의 삶은 피폐했고 내 모든 결핍이 온전히 드러났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더라면 도시는 내게 다른 기억으로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비비언 고닉이 두리고 다녔던 뉴욕의 거리처럼 나를 성장시키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그들과의 사연으로 풍성한 장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도시의 면면을 살피는 일보다 그곳에서 적응하느라 나는 정신이 없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다짐은 바로 사그라들었고 세련된 친구들의 모습에 자꾸만 작아졌던 시절이다. 2주에 한 번은 주말마다 집에 내려와 가기 싫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돌아온 곳. 그래도 시간은 모든 걸 안정 시켰다. 친구를 사귀고 영화관에 가고 번화가에 다니면서 한 달, 두 달, 집에 다니러 가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대학에 입학 한 후 아예 용돈을 구하는 전화만 할 뿐 시골에 가는 일은 많지 않았다. 


비비언 고닉이 『짝 없는 여자와 도시』에서 들려주는 도시의 풍경과 그곳의 일부인 사람들의 풍부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그들을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묘사하는 비비언 고닉의 탁월함이 있기에 가능하다.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사람들과 달리 고닉은 언제나 눈과 귀를 열어두었고 그 모든 장면을 소중하게 기록한다. 어떤 마음이어야 가능할까. 타인을 향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애정이라는 거창한 말은 오히려 고닉에게 핀잔을 듣기 충분하다. 그냥 고닉은 그런 사람이었다. 도시를 사랑하고 사람들과의 사귐과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그래서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누구라도 고닉에게 어떤 고민이든 말할 수 있는 사람. 고닉의 글에는 그런 기운이 있었다. 나도 그녀에게 속마음을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무엇을 그를 그렇게 단단하고 멋지게 만들었을까.





고닉 역시 뉴욕에서 태어난 건 아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시골이나 다름없는 브롱크스에서 자랐다. 고닉의 도시와 나의 도시는 같은 듯하면서도 분명 다르다. 고닉은 여전히 뉴욕을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레너드와 오랜 우정을 유지한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란 제목이 말하듯 고닉은 짝 없는 여자다. 그런데, 정말 고닉이 짝이 없을까? 아니다. 그에겐 너무도 많은 영혼의 짝이 있다. 남녀노소, 나이를 가리지 않고 고닉은 모두와 우정을 나눈다. 그 우정이야말로 고닉에게 가장 큰 동력이자, 걷기의 원천이다. 고닉의 사실적이면서도 은유적인 글 속에 살아 숨 쉬는 뉴욕을 본다.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 누군가의 징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약속으로 탈주하려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 도시가 그 여파로 어지럽게 동요하는 듯이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44쪽)


나는 그 도시를 떠났고 그 도시를 찾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이들이 나를 보러 내가 있는 곳으로 온다. 검색이나 뉴스를 통해 그 도시를 본다. 어떻게 변했는지, 간혹 친구들과의 통화를 통해 사라진 공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내가 다닌 대학은 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전했다. 같은 도시에 있지만 내겐 사라짐과 마찬가지다. 교정을 오가는 곳곳에 흐드러진 벚꽃, 그 꽃 가지 아래 친구와 함께 수줍고 어색하게 웃던 사진만 남았을 뿐이다. 도시에서 시작된 사랑은 떠났지만 우정은 지속된다는 단순한 진리에 웃음이 난다. 


고닉의 사랑은 어떤가. 도시를 걷다 만난 이와의 사랑은 뜨겁다 못해 데일 정도로 타오르고 식는다. 그게 뭐 대순가. 다시 도시를 걷고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면 그만이다. 거리를 오가는 연인 사이에 짝 없는 여자는 오히려 자유롭다. 도시 곳곳에 넘치는 사랑을 “다 흘려보내자고요.”(90쪽)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순간. 나만의 걷기를 통해 고닉은 보고, 듣고, 만나고, 발견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뉴욕은 나의 도시인 만큼이나 그들의 도시이지만 어느 누구도 이 도시를 더 가지진 못한다.’(108쪽)라고 쓴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누구에게 나 열려있는 광장이자 토론하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는 공간이 바로 뉴욕이다.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도시를 있는 그대로 느낀다. 내가 지금까지 몸으로 살아낸 것은 온갖 갈등이지 환상이 아니었으며, 뉴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하나다. (215쪽)


돌아왔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지만 나는 시골에 산다. 이제 도시를 꿈꾸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도시의 거대한 아름다움은 수많은 피곤이 쌓은 찌든 삶으로 만든 거대하고 위태로운 탑으로만 보인다. 한치의 쉼도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낸 도시 내면의 풍경을 찾는 건 소원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곳엔 나의 사람들이 만들어낼 관계와 사랑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러니 언젠가 찾게 될 도시는 그들과 함께 나의 삶에 다정하게 편입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3-03-17 07: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하게 해요. 물론 그 전에 해결해야할 숙제들이 좀 있지만.
그래도 이제 도시에 불시착한 걸 후회하진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들(시골 처자들이 도시에서 공황에 빠지는ㅋㅋㅋ)이 잔뜩 생각나는 리뷰네요.
고닉의 책보다 자목련님의 도시 회고담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도시, 서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목련 2023-03-17 09:33   좋아요 1 | URL
서울을 사랑하지 않지만 서울과 잘 협력하며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과 그곳에 소중한 이들이 있다는 게 서울의 삶을 지탱하는 게 아닐까 싶고요.
바빠서 걱정이네요. 얼른 마무리 하고 쟝쟝 님을 위한 시간 충분히 누리시길!!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텔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터미널 근처의 여관에서 엄마와 하룻밤을 보냈다. 낯선 도시의 지리를 몰랐던 엄마와 나는 여관 주인의 도움을 받아 아침을 배달시켰다. 정확하게 무얼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2인분이 아닌 1인분이었다는 사실만 생각났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자취방을 구하러 나선 길이었다. 엄마는 방을 구하지 못하면 시골의 고등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나도 그러마했다. 다행이지 불행인지 골목에서 나와 같이 방을 구하는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를 만났고 우리는 즉흥적으로 동거인이 되었다. 주인집 거실에 난 계단을 지나야만 하는 옥탑방에 방을 구했다. 보증금은 따로 없었고 사글세였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이었다. 


징글징글한 애착은 아니더라도 엄마와 나 사이에 적당한 애착이 필요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비비언 고닉의 엄마처럼 사랑을 신봉하고 남편의 죽음에 식음을 전폐하는 모습은 엄마에게 찾을 수 없다. 그럴 수도 없는 게 엄마가 먼저 돌아가셨다. 엄마와 싸운 기억이 별로 없다. 고교 입시와 대학 때만 내가 원하는 대로 고집을 부렸을 뿐, 엄마도 나를 상대로 욕을 하거나 매를 들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게 너무 속상하다. 큰 소리를 내거나 화를 내지 않은 엄마는 조금씩 스스로를 갉아먹었을 게 분명하다. 할머니 때문에 그랬을까, 참고 살기만 한 엄마를 향한 마음은 그리움이지만 당시 애틋하고 애절함은 없었다. 그러나 십 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알았다. 언젠가는 엄마와 분리되었을 텐데, 그 시기를 늦추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걸 말이다. 


모든 모녀 사이에는 애증이 존재한다. 그런데 나는 그 타이밍을 놓쳤다.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 삼고 살았던 비비언 고닉의 모녀의 일상을 지켜보는 일은 부러움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그건 고닉이 그만큼 글을 잘 썼기 때문이다. 1987년 공동주택의 한자리에 나는 착석했다. 침대에 누워 울부짖는 엄마와 창틀 난간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는 고닉의 모습. 고닉의 집을 오가는 이웃들. 그들의 면면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고닉의 엄마는 그곳에서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표정과 말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 동지의식이 생기는 것처럼 고닉의 엄마와 그네들도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고민을 토로하는 반면 험담도 오갔다. 당연하다. 사람 사는 건 다 그런 거니까.





노년의 어머니와 중년의 고닉이 뉴욕의 맨하튼, 브롱스로, 윌리엄스버그를 산책하면서 여전히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나도 변한 게 없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현재에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이동하는 두 모녀의 대화는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시간을 생생하게 구연하는데 어떻게 그 모든 걸 기억할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다. 길에서 만난 노숙자나 오랜만에 만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동네 친구까지. 그들과의 에피소드는 새로운 이야기이면서 다른 삶이다. 그것은 고닉이 성장하는 과정이자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엄마와의 대립과 갈등은 당연하다. 고닉을 대학에 보내는 것에 대해 당당했던 엄마가 고닉이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지 않았을 때 보이는 반응은 익숙하다. 뼈가 빠지게 뒷바라지해서 대학을 보냈더니 번듯한 곳에 취직도 못하는 자식을 어처구니없게 대하던 우리 부모 세대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들과는 전혀 다른 외국인 화가와 결혼을 선언한 딸에게 과연 좋은 소리가 나오겠는가. 고닉에게 그 결혼은 일종의 반항이자 독립선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의 반대는 가히 옳았다. 엄마가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뻔한 이야기지만 결혼은 현실이고 스물넷의 젊은 부부의 열정은 조금씩 균열이 생기지만 모른 척 시간을 끈다. 죽은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끝없는 사랑이 고닉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왜 자신이 음식을 해야만 하는지, 남편은 일요일에도 그림을 그리는지, 자신과의 산책이 왜 어려운지, 고닉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헤어짐은 예상된 결과였다. 


고닉의 엄마는 고닉을 키우고 만든 게 자신이라고 여겼지만 고닉을 변화하고 만든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고닉이 공부하고 문학을 읽고 경험하고 고민하고 당도한 것이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큰 틀은 엄마라 할 수 있다. 유대인 이민자로 미국에서 정착하며 살기란 얼마나 버거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배운 딸이, 작가가 된 딸이 자랑스럽지만 딸에게 주어진 환경이라면 자신은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 그게 엄마의 솔직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고닉과 산책하다 만난 고닉의 친구가 호모섹슈얼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95쪽)이라고 말하면서도 딸이 권한 전기를 읽으면서 “나는 삶으로 다 살았어. 나는 다 안단 말이다.(113쪽)라며 화를 내는 모습을 돌아가신 내 엄마로 이입하려는데 쉽지 않다. 나는 그만큼 나의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사소하거나 중대한 문제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길게 나눠본 적이 없다. 어떤 문제는 시대적 흐름에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고 사소한 것들은 사소해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만약 엄마가 살아 계시다면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어디가 아프다는 말이나, 동네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의 남의 집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 모른다. 우리는 좀 더 은밀하게 동네 아줌마나 어린 시절 친구에 대한 소문을 전할지도 모르고 어젯밤에 본 드라마 줄거리나 정치에 대해 언급할지도 모른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시간이기에 나는 그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 서럽고 아프다.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300쪽)란 엄마의 말에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301쪽)라고 답하는 고닉.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301쪽)라고 말하는 엄마. 모녀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시간도 온 것이다. 함께 인생을 말할 수 있는 사이, 가장 가깝고 먼 관계. 그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내게 없는 관계라는 게 서글프게 다가온다. 사나운 애착은 끈끈하고 숭고한 연대가 되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301쪽)


내 앞에 고닉이 앉아 묻는다. 잘 읽었어, 어땠어?라며 답을 기다린다. 치열하게 살아온 고닉의 생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지만 순간 엄숙해진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사랑과 일 앞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을 눈부신 모습에 숙연해진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 안의 공간을 확인하고 확장시킨 고닉. 그 공간이 만들어낸 매혹적인 이야기를 갈망한다고 나는 답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3-03-11 1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끄아아앙 정말 다들 비비언 고닉 읽고 글써주는 거 너무 좋다!!! 🥹 자목련님은 엄마와 빨리 분리 되셨군요? 저는 아직도 분리 중…. 😩😩😩😩😩😩

자목련 2023-03-11 15:10   좋아요 1 | URL
이렇게 읽어주고 댓글 달아주는 쟝쟝 님이 있어 진짜 좋다!!
아무것도 모르고 분리되었고, 그리고 얼마 후 영원히 분리되었어요. 쟝 님의 분리 속도는 적당한 것 같아요^^

공쟝쟝 2023-03-17 07:28   좋아요 0 | URL
... 영원한 분리라니요... ㅜㅜ 목련님 이렇게 훅 들어오시면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시러요 ㅠㅠㅠㅠㅠㅠㅠ 저 분리안될래요ㅠㅠㅠㅠ

자목련 2023-03-17 09:34   좋아요 1 | URL
식상하고 뻔한 말이지만 엄마랑 많은 시간 보내세요.
맛나는 것도 먹고 좋은 곳도 보고 잠도 많이 자고요. 돌아가시면 모든 게 후회이고 그리움이에요. ㅠ,ㅠ

솔뫼 2023-03-2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번역자인 줄. 참 잘 쓰셨는데 그림도 자화상인가요?

자목련 2023-03-22 09:00   좋아요 0 | URL
솔뫼 님,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자화상은 아니고 제가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향기로운 하루 이어가세요^^*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이주혜 지음 / 에트르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울컥하면서도 자꾸만 다짐을 하는 순간이 많았다. 무엇을 다짐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긴 힘든데 이 책을 읽는 이라면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흐르는 대로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한다. 이주혜가 번역한 책을 먼저 읽었지만 어려웠다. 좋아하는 작가 황정은의 추천이 없었다면 나는 이주혜의 소설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번역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장편소설 『자두』에서 그가 번역한 책의 인물이 등장했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엘리자베스 비숍의 인생을 말해주는 시로 시작하는 글에서 나는 가만히 어린 비숍을 마주한다. 생후 8개월에 아버지를 병으로 잃고 정신질환으로 어머니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다섯 살 소녀는 외가에서 지낸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강제로 친가로 보내진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이별과 만남, 손녀를 보내야 하는 외할머니의 담담한 슬픔. 훗날 그날의 풍경과 감정은 고스란히 비숍의 시가 된다. 


그렇게 될 일이었어, 마블 난로가 말한다.

나는 내가 아는 걸 알아, 책력이 말한다.

아이는 크레용으로 견고한 집을 그린다.

구불구불한 오솔길도, 이윽고 아이는

눈물 같은 단추를 단 남자를 그려 넣고

자랑스레 할머니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할머니가 난로를 살피느라 

분주할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작은 달들이 눈물처럼 떨어진다.

책력의 책장 사이에서 

아이가 집 앞에 꼼꼼하게 

그려놓은 꽃밭 위로.


눈물을 심을 시간이란다, 책력이 말한다.

할머니는 신묘한 난로에 맞춰 노래하고

아이는 수수께끼 같은 집을 하나 더 그린다. (비숍의 시 「세스티나」 중에서)





내가 주목한 건 아이가 집 앞에 그려놓은 꽃밭에 작은 달들이 눈물처럼 떨어지는 장면이다. 나와 함께 이 장면을 목격한 책력은 말한다. 눈물을 심을 시간이라고. 눈물은 떨어지지만 동시에 심어진다. 당신, 눈물을 심은 자리에서 무엇이 싹틀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23쪽)


내가 심은 눈물은 무엇이 되었을까. 셀 수 없이 떨어진 눈물들, 몇 개의 눈물이 싹을 틔웠을까. 그 눈물이 나를 키우고 내가 될 거라는 걸 나는 알았을까. 누군가 지겹다고 생각했을 눈물,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짓는 연습을 했을 시간이 우리에겐 있다. 말하지 않아도, 나의 눈물이 당신의 것과 같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연대는 시작된다. 이주혜의 글을 읽는 이들이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처럼.


눈물을 심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깨진 거울을 겁내는 우리에게 나는 오늘 화환처럼 무지개를 걸어주고 싶다. 산다는 게 다 그렇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고 그런 날을 살아내느라 오늘도 모진 애를 쓰고 있으므로. (45쪽)


그렇고 그런 날이라고 해서 대충사는 이는 없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껴안고 인정하며 나가길 바란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이는 대로만 말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여성에게 그런 시선은 집중된다. 시어머니가 소개할 때 이주혜는 집에서 노는 며느리였고 아이들에겐 일하는 엄마였다. 번듯한 직장에 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체성이 사라진 존재로. 나란 존재를 증명하는 이는 누구인가. 가족, 친구, 사회,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어느새 움츠려든다. 그럴 때마다 이주혜가 쓰고 기록한 것처럼, 나도 읽고 나만의 글을 쓴다. 그림을 그리던 비숍이 글을 읽고 여행하며 성장한 것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발견하고 성장하기를 원한다. 


정전은 다시 쓰여야 한다. 내겐 당장 어머니와 딸이라는 책이 필요하다.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조력자와 서당 개 역할만 주어진 채 그들만의 서당을 얼쩡거렸던 우리만의 서사가 필요하다. 죄책감을 먹고 자란 서당개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고루한 책들을 실컷 물어뜯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그리고 새롭게 한 글자 써 내려가고 싶다. (90쪽)


태어나는 순간 여자라는 이유로 삶에서 제외당했던 어머니, 마치 그게 당연한 것인 양 알고 받아들였던 우리의 과거.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세뇌당했을까. 이름조차 없었던 삶, 아들이 아닌 딸을 낳고 불행한 어머니는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낳은 엄마도 그랬다. 장손을 낳았음에도 남동생이 태어나기까지 내리 세 명의 딸을 낳은 엄마의 시간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아버지와 남자 형제 위주였기에 어린 나는 남동생을 챙겨야 하는 게 정말 싫었다. 어른이 되어야 제법 많은 나이 차가 났던 큰 언니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업고 키웠다는 걸 알았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 덕분에 미안함과 지지하고 응원하지 못해 안타까움으로 우리를 대했던 엄마. 가장 큰 원인은 아빠에게 있었지만 모든 걸 감당하는 건 엄마 몫이었다. 그러니 엄마는 새벽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몸을 움직였다.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했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영원히 이별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당신을 배우고 싶어요. 우리 제발 이 지긋지긋한 악몽의 계보를 벗어던져요. (104쪽)


여성의 삶에 대해 우리는 더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책 후반에 이주혜가 읽은 책 리뷰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여느 작가의 산문이나 에세이에서 볼 수 있는 목록이지만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게 강점이다. 약자이자 소수인 사람들의 대신해 목소리를 내는, 부당한 사회를 고발하고 연대를 외치며 여성(엄마) 작가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을 만난다. 그가 읽은 책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건 의미가 없다. 직접 만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엄마 됨의 경험이 세계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고립일 수밖에 없을 때 여성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삭제당한다. 글을 쓰는 여자는 모두 생존자라고 했던가. 이 문장을 조금 고쳐 말하고 싶다. 엄마가 된 여자는 모두 생존자다. (149쪽)


언어가 없는 곳에서 언어를, 빛이 없는 곳에 빛을 들고 찾아가는 자. 이것이 수많은 작가들이 스스로 밝힌 작가의 정의다.(162쪽)


엄마가 되지 않더라도 엄마로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고립되는지 너무도 잘 안다. 어디 엄마뿐일까. 난민, 장애인, 약자, 노인, 그 대상은 많다. 나와는 상관없는 삶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고립시킨다. 나의 눈물이 그들의 눈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우리는 닮은 존재이고 같은 존재라는걸. 그걸 깨닫고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충분하고도 충만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먼지 2023-03-0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랑 자목련님 프로필 사진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이주혜 작가님에게서 집에서 일하는 여성의 애환이 느껴집니다..(또륵) 왜 재택하면 다들 노는 줄 알까요??? ㅠㅠ

자목련 2023-03-10 08:30   좋아요 0 | URL
아, 그러네요? 저는 몰랐어요. 그러니까요! 집에 있다고 하면 왜 다 노는 줄 알까요? 재택 근무가 아니더라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가전제품은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지켜봐야 하고. 모든 삶과 일은 저마다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을...
 
지고 말 것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4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박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국』의 아름다운 문장과 풍경, 은유를 생각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은 궁금한 게 당연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기작이라고 하니 더욱 말이다. 하지만 어떤 소설은 읽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 에서 아사코와 마지막 세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지고 말 것을』은 내게 그런 느낌이었다. 수록된 7개의 단편은 여전히 아름답다. 죽음과 사랑을 다루는 서정적인 분위기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뭐랄까. 중심 서사보다는 구차한 설명이 많고 일부 단편을 읽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힘듦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읽으면서도 도통 모르겠는 단편도 있었다. 


책 전체를 감싸는 건 죽음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거나 가까운 이의 죽음에 애도하고 그리워하며 시체를 발견한 이들의 이야기, 살인사건에 대한 심층 분석 보고서와도 같은 이야기도 있다. 2개의 유언으로 구성된 「푸른 바다 검은 바다」는 연인과 동반 자살을 실행하다 실패하고 나중에 남자가 다시 혼자 자살을 하는 이야기는 다소 몽환적이다. 사랑하는 이와 시도한 죽음에 성공했다면 그들의 사랑은 영원했을까. 소설의 화자처럼 나도 모르겠다. 


시간과 공간을 정복한 저 멋지게 풍부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잠시 가지기 위해 인간은 태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죽는 걸까요. 아아, 모르겠습니다. 내가 눈앞의 푸른 바다가 아니라는 게 불행일까요, 아니, 그때는 나도 리카코도 눈앞의 검은 바다이지 않았던가요. ( 「푸른 바다 검은 바다」, 28쪽)


죽은 연인을 향한 그리움은 「서정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영원을 약속했던 ‘당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라고 할까. 그런데 정작 그 남자는 나를 떠나 다른 여인과 결혼했다. 소설에선 서로가 전부였던 두 남녀가 어떻게 이별을 했고 남자가 죽음을 맞이했는지 중요하지 않고 당신을 향한 편지의 형식으로 ‘나’의 애절함이 주를 이룬다. 이 단편에서는 종교적인 색채도 강하게 나타난다. 불교의 윤회나 심령술 같은 것으로 죽음과 산 자를 연결시킨다고 할까. 


당신을 잃고 나서는 꽃의 색, 작은 새의 지저귐도 저에게는 따분하고 허무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천지만물과 제 영혼이 통과는 길이 뚝 끊어진 것입니다. 저는 애인을 잃은 것보다 사랑의 마음을 잃은 것을 더 슬퍼했습니다. (「서정가」, 113쪽)


표제작 「지고 말 것을」은 5년 전 발생한 두 명의 젊은 여성의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한 집에 살던 두 여자는 화자인 ‘나’(소설가)에게 소설을 배우는 문하생이다. 죄를 자백한 범인은 스물다섯 살 사부로, 그는 스물세 살 다키코와 스물한 살의 쓰타코를 죽였다. 단도로 다키코를 찌르고 쓰타코는 목을 졸라 죽였다. 원한이 있거나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라 둘을 놀라게 하려다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범인과 두 여성은 아는 사이였다. 현재는 범인도 옥사했기에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없다.


‘나’는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냈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 자책한다. 그러나 정작 ‘나’는 두 여성에게 소설을 가르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다키코는 자신의 비서 정도로 여긴다. 당시 문학계에서 여성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단편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소송기록과 재판 결과를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범인인 사부로의 반복적이면서도 조금씩 달라지는 진술과 그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나름대로 해석하는 ‘나’의 의견을 첨언하는 이어지는 색다른 소설이다. 


향기롭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도 언젠가는 지고 말 것을 생각하며, 세 사람의 영혼에 명복을 빌고 싶은 소박한 마음을 나는 이 글을 썼다. ( 「지고 말 것을」, 234쪽)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남은 가족인 누나까지 죽고 고아나 다름없게 지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그의 소설에 생에 대한 강한 애착보다는 허무와 죽음이 지배적인 건 당연한 게 아닐까. 벗어날 수 없는 허무의 나락이라고 할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 단편집은 그를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이가 아니라면 만족도가 높지 않을 것 같다. 특히 『설국』에 반한 나 같은 독자라면 말이다. 어쩌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설국』만으로도 충분한지도 모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3-04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 단편 읽기조차 힘들었다는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얇은 책인데도 진짜 진도 나가기 어렵더라고요!

자목련 2023-03-06 09:32   좋아요 0 | URL
그래서 그 단편은 대충~ 읽었습니다. ㅎ